김경열 목사(총신대 강사)

‘성-속’과 ‘정-부정’은 레위기 모든 규례의 토대 이룬다

레위기 신학의 요체는 정결과 거룩 …
하나님 백성의 삶은 열방과 구별된 거룩한 삶이어야

▲ 김경열 목사(총신대 강사)

제사장들의 중대한 임무

아론의 두 아들은 불법적인 불로 제사를 드리다 하나님의 심판의 불을 맞고 죽었다. 그들의 사체는 아론의 두 조카인 레위인 미사엘과 엘사반을 통해 성막으로부터 진영 밖으로 옮겨져 매장되었다(10:4~5). 그들의 비극적인 죽음 직후 하나님께서는 아론에게 제사장이 준수해야 할 강력한 규정을 하달한다. 제사장들은 다시는 무서운 제의적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성막의 직무 중에는 정신을 차리고 긴장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은 직무 직전에 포도주나 독주와 같은 음주가 금지되었다(9절). 이로 미루어 볼 때 사망한 나답과 아비후는 술에 취한 채 성막 봉사를 하다가 다른 불로 분향을 시도했던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을 가능성이 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제사장은 언제나 맑은 정신으로 성막의 직무에 임해야 했다. 제사장들의 임무의 핵심이 레위기 10장 10절에 간결하게 요약되어 있다.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

성-속과 정-부정은 레위기 제의 신학의 중심 주제이며 이것들을 분별하는 것은 이스라엘을 위한 제사장들의 핵심 직무다. 제사장들은 성-속, 정-부정을 분별하는 한편 이를 기준 삼아 백성들의 삶을 지도해야 한다(레 10:11). 따라서 성-속, 정-부정은 제의뿐 아니라 레위기의 모든 규례의 토대를 이룬다.

양극의 관계 속의 성-속과 정-부정

레위기에서는 양극의 관계인 성-속과 정-부정이 충돌한다. 이스라엘은 양극의 영역에서 정결과 거룩의 편에 서야한다. 이는 의식적 정결법(레 11~15장)과 윤리적 정결법(레 18~20장)의 각각의 결론이기도 하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 11:45; 20:26). 윤리적 정결이라는 개념은 이방의 역겨운 “가증한 풍속을 하나라도 따름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레 18:30)는 명령에서 확인된다. 즉, 이스라엘은 의식적 정결과 더불어 거룩해야할 뿐 아니라 윤리적 정결과 더불어 거룩해야 한다. 이렇듯 레위기 신학의 요체는 ‘정결’과 ‘거룩’이다. 이 둘은 결국 거룩이라는 주제로 수렴한다. 거룩은 삶의 여러 차원에서 구현되어야 한다. 우리는 다양한 차원의 정결과 거룩을 검토하기에 앞서 정결과 거룩의 개념이 무엇이고, 이것은 부정결 및 세속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성경의 ‘정결’은 위생적 개념을 넘어선 관념적 개념이다. 동서양을 막론한 종교 일반의 제의 체계에서 어떤 것을 두고 깨끗하다거나 더럽다고 하는 것은 위생적인 개념을 일부 포함할 수는 있지만 원칙상 관념적이고 정신적인 개념이다. 우리말 ‘부정타다’가 위생적 개념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불쾌하거나 불길한 느낌을 주는 말을 들었을 때 ‘귀가 부정을 탔다’고 하거나 ‘다리를 떨면 부정을 타 복이 달아난다’는 말처럼 ‘부정 탄다’는 표현의 심리적, 종교적 의미는 무언가 꺼림칙한 상태,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성경의 정결-부정결의 개념도 마찬가지다.

‘거룩’의 의미에도 동일한 관념이 들어있다. 우리는 이미 <제2편>에서 거룩이란 ‘분리성’과 ‘완전성/온전성’을 내포하는 개념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이러한 거룩은 사물의 적합한 질서와 관련되어 있다. 곧 거룩이란 하나님께서 세상에 주신 질서를 온전히 유지하는 것이다. 따라서 거룩을 침해하면서 무질서를 야기하는 혼란(disorder)과 혼합(hybrids), 그리고 불완전함은 용납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여기서 질서는 정결한 것이고, 질서를 이탈한 무질서는 부정결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같은 거룩의 개념은 사회적 영역과 신체, 그리고 자연 속에 반영된다. 정결과 거룩은 이와 같이 공통의 관념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양자는 구별된 개념이다. 어떤 사람들은 거룩을 정결과 같은 개념으로 보는데 이 둘은 분명하게 구별된다. 예컨대 정결한 짐승과 거룩한 짐승은 다르다. 정결한 짐승 중에서도 엄선된 짐승만이 거룩한 짐승으로 승격되어 제단에 바쳐진다. 쉽게 말하면, 거룩은 정결보다 상위 개념인 것이다. 정결은 신적 영역인 거룩에 접근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정결을 기반으로 거룩의 단계로 올라간다. 성경에 따르면 거룩은 하나님 고유의 특성으로, 거룩의 원천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거룩은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이다. 장소와 사람의 거룩함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거룩하다’고 말할 때 동일한 거룩의 개념이 적용되어 그들의 분리성과 온전성으로 인해 열방과 구별된다. 평민보다 제사장에게 요구되는 거룩의 기준이 엄격한 것처럼(레 21:6~8),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의 거룩한 백성으로서(출 19:6) 열방보다 더 엄한 표준을 따라야 한다. 밀그롬의 말대로 거룩의 개념에서 중요한 측면은 ‘윤리’이며, 거룩은 특히 그분의 성품, 즉 인격적 속성과 관련된 것이다. 거룩은 “…로부터의 분리”(separation from)일뿐 아니라 “…으로의 분리”(separation to)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는데, ‘하나님을 향해’ 분리되어 있다. 따라서 그들의 삶은 제의적 차원에서 뿐 아니라 윤리적 차원에서 열방과는 구별된 삶이어야 한다.

성-속과 정-부정의 차이점

성-속은 신적 영역이고, 정-부정은 인간의 영역이다. 다시 말해 성-속은 신적 영역에서의 구분이고, 정-부정은 인간 영역에서의 구분이라 할 수 있다. 즉, 성-속은 신적 영역에서 하나님께 속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기준으로 나뉜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역을 벗어난 인간의 영역은 속된 곳이다. 그러나 정-부정은 언제나 인간의 영역에서 깨끗한지 더러운지 나누는 구분이다. 실제로 성경에서 ‘하나님이 정결하다’는 표현은 전혀 나타나지 않으며 매우 이상하고 어색하다. 이때 세속의 영역은 인간의 영역일 뿐 더럽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음 도식은 성-속, 정-부정의 관계를 잘 보여준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성-속의 구분은 이원론의 도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영역이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통치 하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성경은 만물 안에서의 성과 속을 명확히 구분한다. 즉,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는 거룩의 경계선이 존재한다. 성-속의 대비는 하나님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의 구분을 위한 개념으로, 창조주와 피조물의 간격을 말해준다. 이때 후자가 전자의 지배를 받는다는 점에서 이원론적으로 분리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과 구분되는 거룩한 ‘성도’(saints)임과 동시에 세상을 위해 선한 청지기의 삶을 산다.

참고로 여기서 거룩이 상대성을 지닐 수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세속의 부정결한 민족들에 대해서는 ‘거룩한 백성’으로 규정된다. 하지만,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는 그들은 단순히 ‘정결한 백성’일 뿐 성전과 그 안의 제사장들만이 거룩한 그룹으로 구별된다. 나아가 심지어 제사장이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스스로를 거룩한 존재라 여길 수 없다. 그들은 선지자 이사야와 같이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부정한 사람이요’라고 고백해야했을 것이다(사 6:5). 따라서 이스라엘이 거룩한 영역에 있다함은 세상 나라에 대해서 그러한 것이며, 반대로 이스라엘이 세속의 영역에 있다함은 하나님에 대해서 그러하다.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성과 속을 나누는 근원적 거룩의 경계선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세속과 정결은 중립의 상태다. 즉 평소 이스라엘은 세속의 영역에서 정결을 유지한다. 그들 중 거룩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자들은 종신직의 제사장들과 특별한 서원 기간의 나실인들처럼 따로 구별된 사람들뿐이다. 일상의 정결한 가축들 또한 거룩한 제물로 승격되어 성소의 제단에 바쳐진다.

성-속과 정-부정의 상태는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다음 도식은 네 가지 범주의 역동성을 잘 보여준다.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 밖의 일상의 상태, 즉 세속의 영역에서 정결한 신분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그들은 ‘거룩’, 즉 성스러운 영역을 지향하는 한편 부정결의 상태로 전락할 것을 경계해야 한다. 그들의 신분은 정적인 상태에 있지 않고 늘 유동적이었다. 즉, 그들 중 일부는 성화의 과정을 통해 거룩한 상태로 올라갔고(예, 나실인), 그러다 다시 세속으로 돌아오기도 했으며, 오염으로 인해 부정한 상태로 전락되었다가 다시 정결한 상태로 복귀하기도 했다. 앞서 지적한 대로 흔히 ‘세속’이라는 말을 사람들은 더럽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사용한다. 그러나 구약에서 세속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명사 ‘홀’(holo)은 신성한 것과 대치되는 일상의 것을 가리키며, 동사 ‘할랄’(halal)은 신성한 것의 침해를 지시한다. 다시 말해 ‘세속’이 더럽다는 개념을 지닐 때는 주로 ‘거룩’에 대해서 그럴 뿐 일상의 상태에서는 중립적 가치를 지닌다. 다만 간혹 그 의미가 확장되어 인간의 영역에서 부정적 의미로 적용될 때가 있다(창 49:4; 레 21:9, 레 19:29).

부정결한 것의 침범으로 거룩한 것이 모독당할(halal) 때도 있는데 이는 거룩이 사라지면서 세속화되는 것이 아니라 거룩이 부정결로 오염된 상태다. 이 문제를 시급히 해결하기 위해서는 성물의 부정결을 즉시 청소하여 제거하거나(예, 레위기 4장에서 제단을 속죄제의 피로 닦아냄), 아니면 그 성물을 파괴해야 한다(예, 레 7:19에서 부정결과의 접촉으로 더럽혀진 화목제 고기를 태움). 정결한 상태에서는 언제든지 성화의 단계로 승격될 수도 있고, 부정결의 상태로 강등될 수도 있다. 제사장과 성물들처럼 속된 것이 성화 과정을 거쳐 거룩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속된 것이 부정을 타서 위험에 빠지는 경우 즉시 오염을 씻어내 정결함을 되찾아야 한다. 여러 가지 이유로 발생하는 부정결은 대개 일시적 상태이나 11장의 부정한 동물들처럼 일부는 항구적인 부정을 지닌다. 항구적 부정 자체는 전염성이 전무하기에 백성들의 영역에서 함께 공존한다. 그러나 모든 짐승이 하나님의 창조물이므로 그 부정한 짐승들이라도 결코 그 자체로 부정하게 여기지 않으며 음식으로서 부정할 뿐이다.

특히 부정결은 전염성을 지닌다. 많은 학자들의 주장과 달리 거룩은 거룩한 제사장이나 성물과의 접촉을 통해 전염되지 않는다. 구약에서 거룩이 전염되는 경우는 하나님의 임재에 의해 직접적 접촉이 발생할 때 뿐이다. 반대로 부정결과 접촉한 것은 더럽혀진다. 하지만 정결과 속됨은 사물이나 사람의 기본 상태(ground state)로서 그 어떤 수단을 통해서도 다른 대상에 전달될 수 없다. 감염력이 없는 중립의 상태인 정결과 속됨의 등급을 나눌 수는 없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더 속되고’, ‘더 정결한’ 상태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음 호에서 우리는 구약 전반에서 ‘거룩’이 전염성의 증거가 있는지 살펴보고 신약에서는 어떠한지 토론할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관련하여 매우 중대한 쟁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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