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백성, 거룩 회복하는 속죄일 엄숙히 기다렸다

신자와 교회는 하나의 연합체 … 주님의 몸 된 성전 오염 막는 공동체 전체 회개의 눈물 필요하다

▲ 김경열 목사(총신대 강사)

요아킴은 몇 달 전 실수로 안식일을 범한 뒤 하나님께 속죄제를 바쳐 용서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자신이 깨닫지 못하여 해결되지 않은 죄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지냈는데, 이것은 다른 모든 백성들도 동일하게 품고 있던 생각이었다. 요아킴은 이런 깨닫지 못한 죄를 위해서는 속죄일까지 기다렸다가 하나님의 용서를 구해야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때는 가을로 접어들어 음력 7월(우리의 음력 8월)이 되었다. 이 달은 명절이 유독 많은 중요한 달이었다. 음력 7월 1일은 나팔절로 이스라엘의 ‘설날’(신년)이었고 10일이 바로 ‘속죄일’이었다. 이어서 음력 7월 15일부터 일주일간은 가을의 과일 추수를 기뻐하며 감사하는 ‘초막절’(혹은 ‘수장절’)이었다. 특히 새해를 맞이하는 7월 1일부터 속죄일인 7월 10일까지의 열흘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한 해를 시작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기간이었다. 7월 10일이 속죄일이었지만, 7월 1일 설날이 지난 뒤 백성들은 속죄일이 오기 전에 열흘 동안 마음의 준비를 갖추려 애를 썼다. 요아킴 또한 자신과 가족이 지난 한 해 동안 행여 망각한 죄가 있었는지 기억하려 애쓰는 가운데 회개의 마음과 겸비한 자세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속죄일 예전의 놀라운 특징과 절차
엄숙한 속죄일을 맞아 제사장들이 준비해야하는 짐승은 다음과 같다. 주목할 것은 제사장들을 위해서는 소 한 마리의 속죄제를 가져오나 레위기 16장 5절이 진술하는 대로 회중의 속죄제를 위해 ‘숫염소 두 마리’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즉, 두 마리의 숫염소가 하나의 ‘속죄제’를 구성한다. 그 두 마리 중에 한 마리는 제단에 바치고 다른 한 마리는 산 채로 광야로 모든 백성의 죄를 싣고서 광야로 내보낸다.<표 참조>

이 제물들을 바치는 과정에서 놀라운 특징들이 발견된다. 우선 번제단에 속죄제 소와 염소의 피를 ‘섞어서’ 함께 뿌린다(레 16:18~19). 이것은 제단에 바쳐진 소와 염소가 하나로 묶인다는 것을 시사한다. 결국 두 염소가 회중을 위한 하나의 속죄제로 준비되는데(레 16:5), 이 중 속죄제로 바쳐진 염소는 제사장들을 위한 속죄제 수소와 피가 섞여 하나로 통합된다. 이어서 아론은 하얀 세마포 옷을 입은 채 속죄제 염소의 짝인 아사셀 염소 의식을 진행한다. 아사셀 염소는 도살되지 않고도 희생의 자격을 갖출 수 있는 특수한 형태의 속죄 제물이다. 이렇게 도합 세 마리의 짐승이 하나의 거대한 속죄제를 구성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강력한 증거는 아론이 입은 하얀 세마포 옷이다. 대제사장 아론이 아사셀 염소 의식을 마친 뒤에야 대제사장의 복장으로 갈아입은 뒤 두 개의 번제를 드린다. 분명 하얀 복장을 입고 진행한 순서들은 그것들이 하나로 통합된 속죄제 의식임을 말해준다.

이때 속죄제 소와 염소의 피가 성전의 지성소, 내성소, 성소 마당을 차례로 씻어서 성전 전체를 청소한다. 이로써 피를 통해 성전의 모든 부정결이 그 소와 염소의 고기로 흡수되고 그 심하게 더럽혀진 고기들은 밖으로 반출시켜 소각한다. 따라서 완전히 성전의 오염이 제거된다. 반면에 아론은 ‘두 손’을 얹어 모든 백성의 죄를 살아 있는 염소 위에 옮긴다. 두 손을 안수하는 이유는 모든 죄를 옮기는 집약적 전가를 위함이다. 이 아사셀 염소는 그 모든 죄를 짊어지고 광야로 내보내져 죄를 공동체로부터 완전히 제거한다. 아사셀은 필시 죽음으로써 그 임무를 완수한다. 19절은 두 속죄제 짐승의 기능이 성전 청소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결들에서 단을 성결케(히브리어 원문은 ‘깨끗하게 하고 거룩하게’) 할 것이요’ 반면에 22절은 아사셀 염소의 임무가 ‘죄를 짊어지는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반면에 평일에는 속죄제 짐승 한 마리가 이 모든 임무를 완수했다. 즉 속죄제 짐승에 제사자의 죄가 전가되어 옮겨가고 도살 후 피를 성전에 뿌림으로써 피를 통해 성전의 오염이 흡수되어 옮겨온다. 즉 짐승 한 마리에 사람의 죄와 성전의 오염이 모두 묻어있다. 오염이 심한 고기는 밖에 반출해서 태웠고, 경미한 것은 먹을 만 했기에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그것을 섭취하여 오염을 완전히 제거했다(레 10:17). 다시 말해 속죄일에는 아마도 그 날의 특수성으로 인해 성전의 오염을 씻는 짐승들의 역할과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제거하는 짐승의 역할이 분리되는 특수한 방식이 사용되었다. 반면 평일에는 속죄제 짐승 한 마리가 통합적 기능을 수행한다.

이 특수한 속죄제에서 안수는 아사셀 염소에게만 시행되고, 희생용 짐승들의 안수는 면제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에 대해 대다수 학자들은 실제로는 안수가 시행되었으나 성경에서 흔히 그렇듯이 본문에는 생략되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러 의식이 모여 하나의 통합된 속죄제가 되었다면 논리적으로 안수를 단 한 번 시행한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따라서 필자는 안수는 아사셀 염소 위에 한 번 집행되었다고 본다. 속죄제 짐승에게 안수가 실행되지 않았으니 백성들의 죄는 희생 짐승들에게 전가되지 않는다. 물론 두 짐승에게 안수가 이루어졌다해도 큰 문제는 없다. 이 때 그 안수는 대제사장을 통해 그 짐승이 백성을 대신해서 희생되도록 하기 위함일 뿐 아사셀 염소에게 넘어갈 죄가 이 짐승들에게 넘어가지 않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짐승들의 기능은 그들에게 죄가 전가되지 않았기에 성소의 청소에 국한된다(레 16:16).

평일의 속죄제 외에 왜 속죄일이 필요한가?

레위기를 면밀히 관찰하며 읽는 사람들은 죄를 깨달을 때마다 속죄제를 드린다면 왜 속죄일이 필요한지 의아스러워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제의에서 백성의 모든 죄를 완전하게 속죄하기 위해서는 평일의 속죄제와 속죄일의 속죄제가 모두 필요했다. 평일에는 죄가 드러나거나 깨닫게 될 경우 속죄제를 바쳐야 했다. 반면에 속죄일에는 일년 동안 해결되지 않고 누적된 죄들을 한꺼번에 해결한다. 다시 말해 속죄일은 대청소의 날이다. 마치 날을 잡아 집안 구석구석 청소하는 것처럼 속죄일은 미해결된 백성의 모든 죄와 성전의 지성소까지 누적된 오염을 철저히 닦아내는 날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죄들로는 요아킴의 경우와 같이 전혀 깨닫지 못한 죄가 있을 수 있고 또한 원래 즉각적인 심판이 가해지는 악행죄라도 어떤 경우 심판이 유예되어 속죄일에 용서 받을 기회가 주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악행죄의 용서는 속죄일에 용서받은 세 가지 죄의 목록에 악행죄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추론될 수 있다(레 16:16, 21; 유감스럽게 한글개역개정에는 번역의 오류로 이 두 구절에서 ‘악행죄’가 누락되어 있다). 이런 심판이 유예된 악행죄 뿐 아니라 아마도 고라 일당의 반역이나 아간의 범행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다른 사람의 죄를 자신의 책임으로 여기며 속죄일에 공동체의 죄를 회개했을 것으로 추론된다.

이와 같이 속죄일에는 평일에 처리되지 못한 백성의 모든 죄와 그로 인해 누적된 성소의 오염을 제거함으로써 온 이스라엘 백성의 전면적 속죄가 달성되었다. 성전은 매년 한 번 이루어지는 대대적 청소를 통해 원래의 거룩한 상태(original holy state)로 돌아가(19절) 성전으로서의 기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철저한 청소를 거쳐 다시 거룩해진 성소는 여호와의 지속적인 임재를 보장했다. 이 점에서 이스라엘에게 있어 속죄일은 거룩한 백성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날이었다. 이렇듯 평일의 일반 속죄제와 속죄일의 특수 속죄제가 통합되어 이스라엘의 속죄를 위한 시스템을 구성했다. 이러한 속죄 시스템은 일종의 ‘거룩 회복 장치’다. 이스라엘은 이 장치를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죄와 부정결로부터 거룩을 회복하고 유지했다.

하지만 법궤가 자동으로 위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거룩 회복 장치 역시 그 자체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아무리 제사의 형식이 완벽하다 해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제사자의 회개의 태도와 정성이었다. 특별히 속죄일에는 모든 노동을 중단하고 종일토록 ‘자기 고행’을 통해 진정한 통회자복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레 16:29, 31, 23:27~32). 인간의 내면보다는 정교한 제사 의식에 더 관심을 두는 속죄일 규정은 ‘스스로 괴롭게 하라’(자기 고행)는 간략한 법정적 지침만을 주고 있을 뿐 구체적인 실천사항에 대해선 입을 다문다. 밀그롬은 ‘자기를 괴롭게 하다’에서 동사 아나(ana) 개념의 성경적 범위는 다음을 포함한다고 말한다:금식, 맨 땅에서 잠자기, 옷 갈아입지 않기, 부부 관계 절제, 목욕 금지 등. 이와 같이 마음의 중심이 바르지 않은 자의 제사는 결코 열납되지 않았을 것이다. 백성들의 형식적 예배를 질타한 선지자들은 이미 이 점을 간파했다.
  
성전과 교회: 속죄제와 속죄일의 현대적 적용

나는 지난 호의 글에서 구약에서 이미 언약의 피로 성전과 백성이 하나로 결속된 관계에 놓였다는 것을 설명한 바 있다. 그러나 두 실체가 각기 공간의 간격을 두고 떨어진 상태에서 피로 연결된 통합적 관계를 형성했다. 하지만 신약에서 예수님은 이 둘을 하나로 통합하셨다. 이제 더 이상 백성 건너편에 성전이 따로 존재하지 않고 백성이 곧 성전이고 성전이 곧 백성이 되었다. 시내산에서 모세는 옛 언약을 체결하면서 막대한 양의 피를 성소와 백성에게 각각 뿌린 뒤 선언한다. ‘이것은 언약의 피다.’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새 언약을 체결하시면서 자신의 살과 피를 제자들에게 먹고 마시게 하면서 동일하게 말씀하신다. ‘이것은 곧 나의 언약의 피다.’ 건물 성전의 시대가 폐하여지고 사람 성전의 시대가 도래했다. 이로써 신약의 시대에는 그리스도의 피가 백성들에게 뿌려질 때 곧 그것은 성전에 뿌린 것이 되며, 역으로 성전에 뿌려진 피는 곧 백성에게 뿌려진 피가 된다. 또한 구약에서는 성전과 백성이 피로 연결되어 있었기에 백성이 죄를 지으면 성전이 오염되었고 역으로 성전이 깨끗케 되면 백성이 깨끗케 되어 속죄되었다. 놀랍게도 바울은 레위기에 나타난 성전 오염의 원리를 교회에 그대로 적용한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6~17)

신약에서도 신자가 죄를 지으면 마찬가지로 성전된 교회 공동체가 더럽혀진다. 바울은 신자가 악독한 부도덕으로 거룩한 교회를 심각히 더럽히면, 여전히 신약의 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멸하실 것이라고 경고한다.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신자의 죄는 이제 사람 성전, 곧 교회를 오염시킨다. 오늘날 신자들은 교회를 오염시킨다면 하나님의 무서운 벌을 받고 죽을 수 있다는 경고를 두려워해야 마땅하다. 내가 더럽혀지는 것은 곧 교회의 오염이요, 반대로 교회의 타락은 곧 나의 부정함으로 이어질 것이다. 나와 교회는 하나의 연합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나의 죄가 주님의 몸된 교회를 더럽힌다는 사실을 깨닫고 죄와 회개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야 한다. 죄는 개인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성전된 공동체를 더럽히는 결과를 낳는다. 만일 이것을 인식한다면 죄인은 회개의 자리에서 자신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것에 그칠 수 없다. 그는 나아가 공동체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 기도해야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죄든 그것이 곧 공동체 전체의 문제임을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도 공동의 책임의식을 갖고 함께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것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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