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자들을 위한 ‘곡식으로 드리는 감사의 제사’였다

극빈층 위한 ‘속죄 제물’로 허용, 기름과 향 추가하지 않은 밀가루 바쳐

▲ 김경열 목사(총신대 강사)

요아킴은 양 500마리를 키우는 목축업자였다. 약간의 논밭에서 농사도 겸하여 지으며 부족함이 없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산적 떼들이 쳐들어왔다. 그들은 순식간에 양 500마리를 모두 훔쳐갔고 요아킴의 가족은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고 말았다. 요아킴은 너무나도 큰 상실감 속에 매일 눈물이 났지만 결코 믿음을 잃지 않았다. 그에게는 이제 더 이상 하나님께 기쁘게 바칠 양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예배를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이 비탄한 형편을 돌아보아주시도록 하나님께 울부짖고 싶었던 요아킴, 또한 그분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견딜 수 없었던 그는 하나님께 번제물 대신 소제의 예물을 대신 바치기로 했다.

그는 곱게 빻은 밀가루를 준비하여 기름을 발라 먹음직한 빵을 구운 뒤 깨끗하게 잘 싸서 하나님의 성전으로 올라갔다. 제사장은 그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미 그의 소식을 들었던 제사장은 그의 손을 꼭 붙잡고 눈물로 위로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기도를 해주었다. 제사장은 그를 위한 소제의 제사를 시작했다. 먼저 요아킴이 소제의 떡을 손에 든 채 하나님께 간절하고도 애절한 기도를 마치자, 제사장은 그 떡을 손바닥으로 한 움큼 뜬 다음 제단에 태워 하나님께 바쳤다. 제사장과 요아킴은 연기로 타오르며 올라가는 그 제물을 보면서 함께 시편을 노래하며 하나님을 찬양했다. 제사를 마친 뒤 남은 떡은 하나님의 정하신 규례를 따라 제사장의 수고비로 주었다. 요아킴은 기쁨과 감격 속에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비록 나는 파산했지만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나를 도우신다. 언젠가 다시 양을 바치고 나아가 소를 바칠 수 있는 때가 올 거야.’ 매일 그의 삶은 감사로 넘쳤다.
 
소제의 특징

파산한 요아킴이 바친 밀가루의 제물은 ‘소제물’이었다. ‘소제’의 제사는 히브리어로 ‘민하’(minha)라 칭했다. 이 단어는 원래 ‘선물’ 혹은 ‘공물’을 칭하는 단어였지만(예, 야곱이 형 에서에게 바친 선물이 민하다), 제의 법안에서는 ‘곡식의 제사’를 칭하는 전문 용어로 쓰인다. 최초의 소제의 장면은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 나타나는데(창 4:3), 이때 가인은 농사꾼이었기 때문에 곡식의 제사를 바쳤고 그것이 바로 소제다.

소제의 기본 재료는 곱게 빻은 밀가루다. 간혹 몇몇 사례에서는 보리 가루가 요구되었으나 밀가루가 기본 재료라 할 수 있다. 이때 제물로 바치기 위해 일부러 곱게 빻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음식 재료로 집에 보관하는 밀가루를 가지고 정성스럽게 소제물을 준비한다. 따라서 소제물을 빻아서 드리듯 우리도 하나님께 가루처럼 연단되어 곱게 빻아져야 한다며 빻은 가루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데 이것은 풍유적 해석의 하나일 뿐이다. 단순히 집에서 기르던 가축 중 좋은 것을 골라 짐승의 제사를 바치듯, 집에서 먹던 밀가루에서 좋은 부분을 골라서 곡식의 제사를 바치는 것이다.

 5대 제사 중에 소제는 유일하게 피 없이 드리는 제사, 즉 곡식을 비롯한 농산물로 바치는 제물이었다. 이것은 번제 및 화목제와 더불어 ‘곡식으로 드리는 감사의 제사’라 할 수 있다. 기본적인 소제물의 요소를 살피면, 빻은 고운 밀가루를 주재료로 하고 기름과 유향 등을 가미했다(레 2:2). 제사에 쓰인 기름은 아마도 올리브유(감람나무 기름)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것은 제물의 품격을 높일 뿐 아니라 밀가루가 잘 타도록 하는 역할도 했을 것이다. 밀가루 위에는 향기로운 냄새를 내기 위해 고가의 유향을 놓았다. 이것은 생밀가루의 소제였는데, 그 외 요아킴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제사자는 밀가루로 만든 몇 가지 요리를 소제로 바치기도 했으며(레 2:4~7), 특히 추수기에는 첫 수확한 밀과 보리, 그리고 다른 여러 농산물을 성전에 소제로 바쳤다(레 2:12~16; 레 23장).

소제의 여러 가지 특징을 볼 때 이 제사는 주로 농사꾼과 짐승을 키우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제사였음이 분명하다. 가인의 사례에서 보듯이 농사꾼이 소제를 바칠 때는 가난해서라기보다 그의 소산물을 감사의 제물로 바쳤기에 가난한 자들의 소제물과는 의미가 달랐다 할 수 있다. 기본의 소제물은 앞서 말한 대로 밀가루 1/10에바를 사용하는데(레 5:11 6:13), 약 2.2리터 정도의 양, 다시 말해 콜라 1.5리터짜리 한병 반 정도의 양이다. 거기에 기름을 위에 붓고 하얀 분말로 제조된 유향을 놓았다. 이때 기름과 유향의 양은 명시되어 있지 않다. 기름을 밀가루 위에 놓으면 아래로 스며들고 타는 성분의 유향은 밀가루 위에 놓인다. 바로 그 윗부분을 제사장이 손바닥으로 한 움큼 떠서 제단에 올라가 태운다. 이때 기름이 스며있기에 밀가루가 잘 타고 유향이 놓여있기에 하나님께 매우 향긋한 냄새로 올라간다. 그리하여 태워진 소제는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가 된다(레 2:9). 제단에 태우고 남은 부분은 수고한 제사장의 몫으로 돌아가고 그것은 ‘지극히 거룩한 성물’로서 제사장이 성소의 거룩한 뜰에서 그것을 음식으로 먹는다(레 6:14~18).

전통적으로 랍비들은 소제가 극빈자를 위한 번제의 대체물이었다고 주장해왔다. 웬함(Wenham)은 번제는 가죽을 제외하고 제물로 바쳐진 짐승을 전부 태우는 반면, 소제는 고운 가루 한 움큼만 제단에서 불사르고 나머지는 제사장의 몫으로 돌아간다는 점을 근거로 이것에 반대한다. 그러나 가난한 자를 위한 속죄제에는 밀가루가 허용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소제는 가난한 자에게 있어 번제 대용이었다는 견해에 더 무게가 실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밀가루로 바쳤던 기본의 소제물은 가난한 자들이 바치기에는 버거운 제물이었을 것으로 추론된다. 왜냐하면 감람(올리브) 기름은 당시 대중적으로 사용되었으나 유향은 매우 비쌌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유향을 넣지 않는 음식 소제물을 바쳤을 것으로 보인다. 레위기 8장의 제사장 위임식 장면에서 보듯이 요리된 소제물이 반드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바쳐진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분명 비둘기를 바칠만한 형편이 되지 못한 사람이 밀가루를 제물로 바쳤다(레 5:11). 그러나 생밀가루의 소제보다 음식 소제물이 더 쌌다고 볼 수 있는데, 유향을 넣을 필요가 없는데다 밀가루를 요리하면 양이 꽤 늘어나기 때문이다. 또한 아무리 가난해도 집에 세 가지 주방 기구 중 적어도 하나쯤은 갖추고 있었을 테니 극빈자들도 요리된 소제를 바칠 수 있었을 것이다.

바치는 때

소제는 다양한 목적과 용도로 바쳤다. 먼저 소제는 다양한 목적을 지닌 독자적인 제사로 드릴 수 있었다(레 2:1; 레 6:14~18; 레 6:19~23레 2:12, 14; 23:10, 16; 민 5:11~31)가 있었다. 그러나 소제는 따로 드려지기보다는 다른 동물 제사에 수반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매일의 번제에 소제를 함께 바쳤고, 안식일에 추가되는 정례적 번제(양 두 마리)도 항상 소제와 함께 드렸다(민 28:3~10). 떡과 고기를 함께 필요로 하는 화목제나(레 7:12, 13) 정결 의식과 같은 특별한 목적의 희생 제사에 부수적 제물로(레 14:20), 또한 여러 동물의 희생 제사 및 전제를 드릴 때 풍성한 축제의 제물로 소제가 함께 드려진다(민 15:2~5; 28:19~20, 27~29).

한편 앞서 말했듯이 추수를 감사하기 위해(레 2:12, 14) 칠칠절(오순절)에는 백성들이 ‘새로운 소제,’ 즉 새로 추수한 첫 수확물을 소제로 바쳤다(레 23:16). 레위기 2장 12절의 ‘처음 익은 것’과 14절의 ‘첫 이삭의 소제’는 구별되어야 한다. ‘처음 익은 것’의 문자적 의미는 ‘첫 번째 것의 예물’(히. 코르반 레쉬트)이다. 즉 그것은 ‘첫 수확물의 예물’로서 처음 추수한 밀을 가리킨다. 반면 레위기 23:10~11에 비추어볼 때 ‘첫 이삭의 소제’(히. 민하트 비쿠림)는 보리의 첫 이삭을 말한다. 제사장은 아직 덜 익은 보리의 첫 이삭을 볶은 뒤 기름과 유향을 첨가하여 제단 위에 올린다. 그러나 처음 거둔 밀은 제단 위에 오르는 대신 성소에 봉헌된 성물이되며 그것은 제사장들의 음식으로 사용된다. 참고로 팔레스타인 지역은 보리를 추수한 지 약 두 달이 지나 밀을 수확한다(참고. 룻 2:23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칠 때까지’). 그 지역의 주식은 밀이므로 밀이 나오기 전까지 임시적으로 보리를 먹는 것이다.

가장 특징적인 것은 극빈층을 위한 ‘속죄 제물’로 소제가 허용되었다는 것이다(레 5:11~12). 이때 속죄제에 바치는 밀가루에는 기름과 향을 추가하지 않았다. 그가 비싼 유향을 조달하기에는 턱없이 가난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소제물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해 드리는 제물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하나님은 자신의 재량으로 곡식에 피의 효력을 부여하셔서 극빈자들의 속죄를 위한 방편으로 삼으셨다. 하나님의 은혜로 누구에게나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 고대 중동 지역의 화덕의 일종으로 반죽을 안쪽 표면에 붙여 빵을 구웠다.

소제의 종류와 유의사항

소제물은 크게 생밀가루의 소제물과 요리를 한 음식 소제물로 나뉜다. 그 어떤 경우에도 누룩을 써서는 안 됐다. 소제물의 종류를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기본 소제물
고운 밀가루+기름+향
요리한 소제물
화덕에 구운 것
기름을 섞은 것
기름을 바른 것
철판에 부친 것
냄비에 요리한 것

화덕과 냄비와 철판은 모두 고대 이스라엘의 가정에서 사용한 요리 기구들이다. 생밀가루 소제물이든 음식 소제물이든 제사장은 한 움큼을 떠서 제단에 올려 태운다. 나머지 부분은 제사장의 몫으로 돌아갔다. 이 때 그 태워지는 한 움큼을 ‘기념물’(히. 아즈카라)이라 부른다. 히브리어 ‘아즈카라’는 동사 자카르(zaqar ‘기억하다’)에서 온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아마도 그 태워지는 부분은 하나님의 보살핌과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시키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소제에서 가장 중요한 주의할 점이 있다. 제단 위에 바치는 소제물의 경우 어떤 경우라도 누룩과 꿀을 소제물에 첨가해서는 안 된다(레 2:11). 누룩(히. 하메츠)은 재료를 발효시키는 효모를 말한다. 그런데 꿀을 뜻하는 히브리어 데바쉬(debash)는 벌꿀이나 과일 시럽 둘 다를 가리킬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의 주장과 달리 꿀이 이방 제의에서 사용되어서 금지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방의 제단에 바쳐진 밀가루, 향, 기름과 소금도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자연에서 채취되는 벌꿀은 농산물이 아니므로 자동적으로 제단에서 배제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과일 꿀의 사용을 금지했다고 보는 편이 문맥상 자연스럽다. 이런 점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표현은 목축(젖)과 과일 농사(꿀)가 매우 잘되는 땅이라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누룩이 금지되는 이유는 변질과 부패라는 부정적 변화를 상징하기 때문일 것이다(마 16:6; 눅 12:1; 고전 5:6; 갈 5:9). 벌꿀과 달리 과일 꿀도 과일을 갈아서 만든 것이라 쉽게 변질되며 그래서 금지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변질의 상징성은 이어지는 ‘소금을 반드시 넣으라’는 상반된 명령에서 유추할 수 있다. 소금은 누룩과 정반대로 반부패와 불변성을 상징한다. 소금이 지닌 강력한 방부제로서 변질이 안 되는 특징으로 인해 고대 중동에서 소금은 동맹, 친목, 약속, 충성의 맹세에 사용되었다. 바벨론에서는 부족 간 동맹을 맺기 위해 양자가 소금을 먹었으며, 페르시아 왕실에서는 신하들이 왕 앞에 충성할 것을 맹세하며 소금을 먹었다(참조. 스 4:14). 유목민인 베두인 사이에서는 상호 동맹과 보호의 표시로 소금을 먹는 관행이 있었는데, ‘우리 사이에 소금이 있다’는 그들의 격언에 단단히 결속된 그들의 우정이 드러난다. 이것이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화목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배경일 수 있다(막 9:50). 특별히 소금이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으로 묘사된다(레 2:13). ‘언약의 소금’은 분명히 ‘소금 언약’(민 18:19; 대하 13:5)과 관련되어 있는 의미있는 표현이다.

마지막으로 레위기 2장 13절에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라고 명시된 것으로 보아 소제물 뿐 아니라 모든 짐승의 제물에도 소금을 쳤을 것이다(겔 43:24). 그렇다면 제단에 제물을 올릴 때마다 언약의 소금을 치는 이유는 하나님과의 언약, 곧 그들과 하나님의 변치 않는 결속을 상기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언약은 결코 변치 않는 ‘소금 언약’이며 제물에 들어가는 소금은 그 언약을 상기시키는 ‘언약의 소금’이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