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가는 거룩’에서 ‘찾아오는 거룩’으로 변화하다

구약의 제한된 수동적 거룩이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능동적 거룩의 전염성으로

성과 속의 접촉의 결과

▲ 김경열 목사(총신대 강사)

지난 호에서 우리는 성~속과 정~부정의 개념과 그것들의 상호 관계에 대해 살펴보았다. 성~속, 정~부정의 역동적 관계 속에서 서로를 연결하는 매개수단은 ‘접촉’이다. 접촉에 의해 ‘성’은 ‘속’이 되고, ‘정’은 ‘부정’이 되며, 반대로 ‘속’이 ‘성’이 되고 ‘부정’이 ‘정’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레위기를 비롯한 구약에 따르면 양극단에 위치한 ‘성’과 ‘부정’이 접촉했을 때는 부정결이 거룩을 훼손한다. 흔히 알려진 바와 달리 거룩한 것이 그와 접촉한 사람이나 물건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원칙적으로 오히려 부정한 것과 성물이 접촉할 경우 성물이 더럽혀지곤 했다(레 7:19~21). 설사 정결한 사람이나 사물이라 해도 별다른 이유 없이 성소에 나아가면(예를 들어 제사를 위해서가 아닌 단순히 성막을 구경하러 들어감) 오히려 세속에 속한 그는/그것은 성소를 더럽혔을 것이다. 율법은 성소의 무단 침입을 금지하고 있다(민 1:51; 3:38). 부정결과 거룩이 접촉할 때도 더럽혀지는 것은 언제나 거룩한 쪽이다. 학개 2장 12~13절에 그러한 원칙이 분명히 드러난다:

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 국에나 포도주에나 기름에나 다른 음식물에 닿았으면 그것이 성물이 되겠느냐 하라 학개가 물으매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니라 하는지라 학개가 이르되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여진 자가 만일 그것들 가운데 하나를 만지면 그것이 부정하겠느냐 하니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부정하리라 하더라

성과 속의 접촉으로 속이 성으로 승격되려면 단순 접촉이 아니라 성화의 절차를 통한 특별한 제의적 접촉이 발생해야 한다. 예를 들어 갓 제작된 제단은 거룩한 기름을 붓고 제사를 드려 피를 뿌린 뒤에야 비로소 희생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거룩해진다.

하지만 웬함과 밀그롬을 비롯한 대부분의 학자들은 성물은 단순 접촉만으로도 거룩을 전염시킨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제시하는 증거는 성물과의 접촉을 통해 사람과 사물들이 ‘거룩해진다’고 진술하는 구절들이다(출 29:37; 30: 26~29; 레 6:18; 예를 들어, “제단과 접촉하는 것마다 거룩하리라”). 그러나 그 히브리어 동사 이크다쉬(iqdash)는 ‘거룩해진다(become holy)’가 아니라 ‘거룩해야 한다(must be holy)’고 해석되어야 한다. 즉 “제단과 접촉하는 것마다 거룩해야 한다.” 사람과 사물은 결코 그 같은 접촉을 통해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사장 위임(출 29장; 레 8장)과 나실인 서원(민 6장), 그리고 성막 기물의 봉헌식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출 30:25~30; 40:9~11) 일련의 의식 절차를 통해 거룩의 지위로 승격된다.

한편, 법궤를 비롯한 지극히 거룩한 물건들은 강한 거룩의 기운, 거룩의 힘, 비유를 들자면 마치 고압의 전류가 흐르는 장치와 같았다. 따라서 성물에 무단 접촉한 사람은 거룩에 감염된다기보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거룩과 영광의 기운에 의해 해를 당하는 것이다. 즉, 거룩의 힘은 마치 일종의 자기장과 같아서 상대를 감염 시키는 것이 아니라 타격을 입힌다. 반면에 부정결은 마치 축축한 습기와 같아서 접촉하는 것에 스며들어 감염을 발생시킨다. 곧 법궤를 비롯한 지극히 거룩한 물건들은 거룩이 힘을 발하는 장치와도 같아서 성물에 접촉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흘려보내는 강력한 거룩과 영광의 힘에 의해 해를 당하는 것이다.

거룩의 이러한 자기 방어적 특징은 다양한 사례를 통해 암시된다. 예를 들어 민수기 4장 15절에서 성물 운반의 직무를 수행하는 고핫 자손은 성물을 만지면 죽는다는 경고를 받는다. 성물을 만질 자격은 제사장들에게만 주어지기 때문이다. 성물을 만지기는커녕 심지어 성소를 들여다보거나 두 세 겹의 보자기로 덮지 않은 성물을 보기만 해도 죽었다(민 4:20). 이와 같이 레위 자손마저 성물과 접촉할 수 없었고, 평민들은 나아가 제사와 같이 합법적으로 허용된 경우 외에는 성소에 접근 하는 것 자체가 금지되었다.

훼손되는 거룩

또한 이 원칙에 의하면, 성물과 접촉은 죽음과 중벌을 불러올 수 있다. 이것은 오히려 부적격자의 접촉이 성물을 더럽혀 즉각적인 신적 심판이 임한 결과로 보아야 한다. 실제로 이런 자격 없는 자가 성물과 접촉하거나, 불법적인 물품을 가지고 성소에 접근했다가 무서운 징벌을 받은 경우가 여럿 있다(법궤를 만지다 몸이 찢겨 죽은 웃사(삼하 6:6~8; 대상 13:9~11); 왕의 신분으로 성소에 들어가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다 이마에 나병이 생긴 웃시야(대하 26:16~21); 다른 불을 가지고 분향을 하다 죽은 나답과 아비후(레 10:1~7); 성막에 안치된 향로가 아닌 자신들의 향로를 가지고 야웨 앞에서 분향하며 제사장직에 도전하다 멸망한 고라와 일당들(민 16:16~21) 등).

같은 맥락에서 거룩한 시내산의 접근금지 구역에 무단 침입한 백성은 죽임을 당했는데 이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직접 치시거나(출 19:12, 22~24), 백성들이 하나님을 대신해 돌을 던짐으로써 사형을 집행했다(출 19:13). 이처럼 성물과의 접촉이 사람을 거룩하게 한다기보다는 거룩을 훼손했다는 이유로 하나님께서 즉각적인 방어조치를 취하신다고 보는 것이 맞다. 이를 뒷받침하는 또 다른 근거는 다음과 같다. 과실치사를 저지른 사람은 성소의 제단으로 피신하여 제단 뿔을 잡고 무죄를 호소할 수 있었다(출 21:12~14; 왕상 1:50~53; 왕상 2:28~35). 이때 그가 거룩한 제단 뿔을 잡았다 해서 거룩해지지는 않았지만 합법적인 행위였기에 그에게 신적 심판이 내려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를 체포하러 누군가 무단으로 제단에 접근하는 것은 죽음의 경고와 더불어 금지되었다. 합법적 수단을 통하지 않은 제단과 접촉은 제단을 더럽히는 중범죄이기에 즉각 죽음이나 그에 준하는 처벌을 내렸다.

구약에서 거룩한 것이 접촉을 통해 거룩을 전염시키는 경우는 오직 하나님 자신이 직접 임하실 때뿐이다. 그 분이 거하시고, 임재하시고, 머무시는 곳은 어디든 거룩해진다(성막(출 29:43~44; 30:25~30); 불붙는 가시떨기 나무 주변 땅(출 3:5); 시내 산(출 19:11~12); 진영 밖의 회막(출 33:7)). 제단 봉헌식에서 진술되듯이(출 29장; 레 8장) 성막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성막에 관유를 뿌리고 특별한 희생제들을 드리기는 하지만(출 30:25~30; 40:9~11),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거룩하게 만드심이 선언된다. “내 영광으로 말미암아 회막이 거룩해지리라… 내가 그 회막과 단을 거룩하게”(출 29:43~44).

전염의 방향성

하나님의 직접적인 접촉 외에는 거룩한 것이 속된 것에 ‘불법적으로’ 접촉하는 경우 거룩이 더럽혀진다. 특히 거룩이 부정결과 접촉하면 중대한 문제가 발생한다. 지금까지 논의를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구약에서 전염의 방향성이다. 구약에서는 거룩과 부정결이 접촉하면 거룩이 훼손되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부정결의 접근을 철저히 차단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전염의 방향성(구약) : 부정결 → 거룩

이러한 이유로 거룩한 성전은 인간의 죄와 부정결로 더럽혀진다. 사체 접촉으로 더럽혀진 자와 접촉하면 이차 감염이 발생했다. 거룩은 언제나 부정결과 동떨어진 채 격리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 구약의 교훈이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놀랍게도 방향이 역전되어 거룩과 부정결이 접촉하면 오히려 부정결이 제거되고 거룩이 전달된다. 거룩과 부정결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뀐 것이다.

전염의 방향성(신약) : 거룩 → 부정결

거룩의 근원이신 예수님은 부정결한 자들에게 먼저 접근하신다. 문둥병자를 만지시고(마 8:2~3), 혈루증 여인의 접근을 허용하시고(마 9:20), 귀신들린 자들에게(마 10:1) 다가가심으로써 그들이 회복되고 치유되고 온전케 된다. 거룩이 훼손되지 않으면서 부정결을 해결한 것이다. 나아가 인간은 그분으로 인해 거룩한 존재로 바뀌는데, 이를 곧 성화라 한다. 바울이 우리를 ‘성도’(거룩한 무리)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다. 우리는 정결과 부정결을 가르는 경계는 생명과 죽음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앉은뱅이와 소경들도 그분과의 접촉으로 온전해졌으며, 심지어 가장 더러운 오염원으로 간주된 시체, 곧 죽은 나사로에게 다가가 그를 소생시킨다(요 11장). 만성 혈루증(혈우병이 아니다)을 앓고 있어 아무도 가까이 하지 않았던 여인 역시 그분을 만짐으로써 온전해졌다(마 9장; 막 5장; 눅 8장). 특히 나병 환자는 구약에서 가장 무서운 부정을 입은 저주받은 자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그분은 타인을 스스로 기피했던 나병 환자에게 찾아가 친히 ‘접촉’하여 그들을 치유하셨다. 또한 예수님은 극도로 부정결하다 여겨져 타인을 기피했던 나병 환자를 찾아가 친히 ‘접촉’하여 그들을 치유하셨다.

이러한 일들은 당시 사제들과 바리새인들로서는 상상도 못할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여전히 부정결→거룩의 패러다임에 갇혀 있었기에 문둥병자와 혈루병 환자, 소위 죄인과 세리와의 접촉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들에게 능동적으로 접근하시고 그들과 접촉하신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와 같이 신약에서는 거룩의 근원이신 예수께서 백성들에게 다가오신다. 돌로 지은 성전의 역할과 기능이 끝나면서 그분은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성전으로 오셨다. 그러나 그분은 더 이상 정결한 자격을 갖추고 ‘찾아가야 하는 성전’이 아니라, 더러운 자를 직접 ‘찾아오는 성전’이셨다.

구약에서는 거룩에 접근하는 데 있어 여러 가지 시·공간적 제한과 제약이 뒤따랐다. 성전에 다가가기에 적법한 상태가 요구됨은 물론 다양한 제의적 절차와 안전장치들을 갖춰야 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나가기 위해 ‘신발을 벗고’(출 3:5), ‘손발을 씻고’(출 30:19), 몸을 씻어야’ 했으며(출 29:4; 레 14:9), ‘옷을 빨고’(출 19:10, 14; 레 11:25) ‘성결해야’(출 19:10, 14)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날짜에 접근해야하며(출 19:11; 레 16:2), 제사와 같은 합법적 목적으로 그분께 나아갈 수 있었다. 더불어 공간의 제약, 즉 거룩의 등급에 따라 정해진 경계선을 넘으면 죽음의 위협이 뒤따랐다(출 19:21~22; 참고. 레 16:2).

이렇듯 구약에서 하나님의 임재는 대체로 법궤가 놓여진 성전(성막)이라는 특정 장소에 제한되어 있었으며, 능동적이기보다는 수동적이었다. 이렇듯 구약에서 하나님의 임재는 법궤가 놓인 성전(성막)이라는 고정된 장소로 제한된 수동적 방식이었다. 그 가운데 성과 속은 언제나 구분되고 격리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런 구약의 방식은 잘못된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계시와 은혜가 오기 전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을 드러내시고 또한 거룩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시기 위한 임시적 방편이었다.

이렇듯 구약에 ‘찾아가는 거룩’이 나타난다면, 신약에는 ‘찾아오는 거룩’이 나타난다. 예수님이 오심과 더불어 신약에서는 거룩의 움직임이 능동적 차원으로 변했다. 더 이상 백성들이 성전을 찾아가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이 백성들을 찾아오신다.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정하신 우리에게 다가오실 때에 우리의 죄는 사라지고 그 분의 속성에 따라 우리 역시 거룩해진다. 이것이 우리가 얻은 구원의 실체다.

한편 우리에게 주어진 거룩은 그리스도의 거룩과 같이 전염성을 지닌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이 발산되고 방사되는 것이다. 지금은 구약시대처럼 어떤 특정한 음식, 사물과 공간이 거룩한 것으로 지정되어 있지 않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기도로 인해 내 음식과 물건이 거룩해진다(딤전 4:5). 마찬가지로 우리가 거룩을 선포함으로써 내가 있는 곳, 나의 주변과 이웃이 거룩해질 수 있다. 세상을 거룩케 할 능력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이것이 다른 측면에서 본 전도요 선교라 할 수 있다. 우리 안에 계신 거룩하신 성령 덕분에 우리는 거룩의 전염성을 지닌다. 세상 속에서 거룩을 전달하고, 선포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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