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열 목사(총신대 강사)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근본적 격차를 인식해야 한다

여전히 가까이 가지 못할 ‘빛’이신 하나님의 광채 앞에서 두려워 해야

▲ 김경열 목사(총신대 강사)

여호와 앞에서의 제사 잠시 광야의 성막에 번제물을 들고 들어가는 어떤 제사자를 상상해보자. 그는 번제를 드리기로 하나님 앞에 결심한 뒤, 자신의 가축 떼에서 흠 없는 짐승을 정성스럽게 골라 성막에 끌고 온다. 모든 제사자는 성막의 ‘여호와 앞에서,’ 곧 마당의 제단에서 제물을 바쳐야 한다. 먼저 제사자는 짐승의 머리에 안수를 하고 도살을 한다. 짐승의 피를 받아서 제사장에게 건네면 제사장은 그 피를 제단에 뿌린다. 제사자는 가죽을 벗긴 뒤 몸통은 각을 뜨고 복부의 기름덩이를 도려낸 뒤 내장을 깨끗이 씻는다. 각을 뜬 몸통과 내장과 기름덩이가 모두 제단 위에 놓여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로 올라간다. 이 모든 절차가 ‘여호와 앞에서’ 진행된다.

레위기는 번제를 비롯한 제사들이 ‘여호와 앞에서’ 드려진다는 표현을 쓴다(레 1:5외 총 64회). 이때 여호와는 어디에 계시는가? 바로 지성소 안의 ‘법궤 위에’ 강림하시어 앉아계신다. 성막은 일종의 왕궁이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 거하시고 좌정하신 장소다. 거기에 하나님의 보좌가 놓여 있는데 그것이 법궤다. 왕을 알연하기 위해서 신하와 백성들은 왕궁으로 가야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뵙기 위해 신하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왕궁인 성막으로 ‘예물’을 들고 나아가야 한다.

짝퉁 법궤들과 참된 법궤

여호와는 성막의 ‘법궤 위에’ 앉아 백성들을 통치하시고 명령하시고 인도하신다. ‘법궤 위’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속죄소라 불리는 법궤의 뚜껑 부분이다. 사각형 상자의 법궤 위의 놓인 물건으로서 엄연히 법궤와는 별개의 기물이라 할 수 있는데(출 30:6) 히브리어로 카포레트(kaporet)라 불린다. 이것은 엄밀히 장소를 연상시키는 속죄소보다는 뚜껑의 의미가 부여된 ‘속죄판’이 더 나은 번역이다. 카포레트가 ‘속죄판’으로 번역되는 이유는 ‘속죄하다’는 의미의 히브리어 동사 카파르(kapar)에서 기원한 단어이기 때문이다. 최근의 학자들은 동사 카파르에 ‘속죄하다’와 ‘씻어내다’는 의미는 있으나 ‘덮다’라는 의미는 없다는 주장을 하는데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그럼에도 구약의 약간의 증거들에서 ‘덮다’는 의미를 전혀 배제하기는 어려운 이유로 NIV를 따라 뚜껑의 뉘앙스를 내포한 ‘속죄판’(atonement cover)이 좋은 번역으로 보인다. 다른 영어 성경들은 흔히 이것을 ‘시은좌/시은소’(mercy seat)로 번역한다(ESV; RSV; KJV). ‘속죄판’은 그것이 ‘속죄’가 이루어지는 기물임을 의미한다. 일 년에 한 차례,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속죄판 위에 속죄제 짐승들의 피를 뿌림으로써 이스라엘을 위한 가장 중요한 속죄를 만들었다.

황금으로 제작된 속죄판에는 두 그룹들(케루빔, kerubim)이 세워져 있었으며 하나님은 그 그룹들 사이에 좌정해 계셨다(삼하 6:2). 그런데 신의 보좌를 상징한 궤의 그룹들(케루빔, kerubim)은 이스라엘만의 고유한 것이 아니었다. 이방 민족들도 궤와 비슷한 각자 자신들의 기물들이 있었고 그 위에 그룹들에 해당되는 수호천사들이 존재했으며 각종 귀중한 물품들을 궤 안에 보관했다. 그들은 그 그룹들 사이에 자신들의 대장 신의 형상을 올려놓거나 왕 자신이 신성시 되어 거기에 앉았다. 그림은 이집트의 유적에서 발견된 부조로서 왕 파라오가 승리의 행차를 하는 장면이다. 가마꾼들이 가마를 메고 행진하는 모습은 마치 제사장들이나 레위인들이 법궤를 들고 이동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관찰해야할 부분은 보좌 좌우편에 날개를 드리운 존재들이다. 그들은 그룹들(kerubim)과 비슷한 일종의 수호천사들이 분명하다.

▲ 속죄판에는 두 그룹들이 세워져 있으며,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다(왼쪽). 고대 이집트의 부조에는 가마꾼들이 파라오의 가마를 메고 행진하는 모습이 있다(오른쪽). 또 이방에는 귀중한 물건을 넣은 궤를 신성시하는 풍습이 있었다. 성경의 속죄판이 이들과 차별되는 것은 숭배의 대상인 하나님을 어떠한 식으로든 형상화하지 않은 것이다.

법궤도 이와 매우 흡사한 모습과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오직 이스라엘의 법궤만은 거기에 아무 것도 놓여 있지 않았다. 하나님은 어떠한 식으로든 형상화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시 고대 중동의 동일한 문화권의 비슷한 보좌 모델을 차용하셨지만 무엇이 하늘의 참된 보좌 모델인지를 보여주셨다. 이로써 땅의 보좌 모델들은 모두 거짓됨이 드러났다. 하늘 왕이신 그분은 법궤의 속죄판에 보이지 않게 좌정하고 계신 것이다. 이 자체로 이미 여호와 신앙은 근본적으로 이방 종교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경은 보이지 않게 임재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궁전인 성막 위에 구름기둥과 불기둥과 같은 초자연적인 현상을 동반해서 자신의 임재를 드러내셨다고 증언한다(민 9:15-17). 이때 불기둥과 구름기둥은 하나의 합체된 기둥이다(출 14:24; 40:38; 민 9:16). 흔히 알려진 대로 각각 낮과 밤을 위해 별도로 나타난 두 개의 다른 기둥이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불-구름(fire-cloud), 혹은 구름에 둘러싸인 내부의 강한 화염의 빛이 발산되는 발광성 구름이다. 그것은 출애굽기 40:38에서 분명하게 증거된다.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에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았더라.’ 다시 말해, 저녁이 되면 구름기둥에서 불기둥으로 교체되는 것이 아니라 구름 속의 하나님의 불이 벌겋게 구름을 뚫고 나와 구름기둥이 불기둥으로 보인다. 물론 때로는 신적 화염은 특별한 이유로 강력해질 때는 때로 낮에도 구름을 뚫고 나와 맹렬한 불처럼 보였고(출 24:17), 이러한 불-구름 기둥은 또한 이스라엘 백성과 이집트 군대 사이를 가로 막기도 했다(출 14:19-20). 하나님은 불-구름 기둥으로 강림하시어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시내산에 도착하셨다. 하나님의 강림과 더불어 시내산 꼭대기에는 짙은 구름이 두텁게 산을 가렸고 여호와의 영광은 그 구름 속에 맹렬한 불처럼 보였다. 하나님은 그 빽빽한 구름 속으로 모세를 올라오라 하셨다(출 24:15-18). 바로 그 구름이 성막이 건축된 후에는 성막 위, 구체적으로는 법궤 위로 이동해 왔다(출 20:34-35). 이로써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와 레위기 말씀을 전하는 장소가 시내산에서 성막으로 바뀐 것이다(레 1:1).

여호와께서는 산 사면에 경계를 그어 산을 거룩하게 하라고 하시고 백성들이 오르지 못하게 하셨다(출 19:23). 시내산은 거룩한 성전인 셈이다. 멀리 산 기슭에 백성들이 머물러야 했던 것처럼, 일반 백성들은 성막 내의 마당까지만 들어갈 수 있었으며 성막의 내성소 출입은 절대 금지되었다. 그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아론과 칠십 장로의 구역이었던 산 중턱에 올라가면 안되었다. 역시 그 경계선을 넘으면 백성은 죽을 것이다. 시내산 꼭대기에는 모세만이 입장이 허용되었다. 한번은 여호수아가 장차 모세의 후계자의 자격으로 특별한 은혜를 입고 모세와 동반하기도 했지만(출 24:13), 그는 여전히 접근성에 제한을 받았다.
 
구름의 의미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구름’과 그 구름의 기능이다. 그 구름은 자연적인 물리적 구름이 아닌 하나님의 현현의 수단으로 가시적으로 나타난 초자연적 구름이라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왜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인 그 꼭대기에 구름이 겹겹이 둘러쳐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선 그 신적인 구름은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나타내면서 백성을 인도하고, 동시에 광야에서 성막 위에 임할 때는 뜨거운 햇볕을 차단하여 백성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 주는 역할을 했다(민 10:34). 그러나 가장 중요한 기능은 구름이 하나님의 압도적인 영광의 현시를 차단하고 가리는 기능을 했다는 것이다(출 16:10). 다시 말해 구름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방편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피조물과 인간의 죽음을 방지하는 수단이었다. 빛이신 하나님은 시내산 위에 강림하시어 자신의 거룩한 영광의 발현인 광채와 강력한 화염을 발하신다(출 20:18). 만일 인간이 그 빛과 화염에 맞닥트리면 그 자리에서 사망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얼굴을 보는 자는 살 자가 없을 것이라 말씀하신다(출 33:20). 인간은 하나님의 형언할 수 없는 빛 앞에 설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단 10:7-10; 사 10:16-18). 바울은 ‘하나님은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다’고 묘사한다(딤전 6:16).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히 12:29)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과 피조물 앞에서 빽빽한 짙은 구름으로 자신의 화염과 광채를 감추셔야 했다(출 19:9). 그 구름이 ‘흑암’으로 표현되기도 하는데(출 20:21), 히브리어의 원뜻은 오히려 ‘먹구름’이다. 만일 이렇게 그분이 자신의 영광을 이중 삼중으로 가리지 않으면, 이것을 견뎌낼 사람이나 피조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피조물의 멸절을 의미했다(출 19:21).

바로 그러한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레위기 16장에서 대제사장이 일년 일차 지성소에 들어올 때, 다음과 같은 안전조치를 취할 것을 명령하셨다. ‘여호와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우게 할지니 그리하면 그가 죽음을 면할 것이며 (레 16:13).  여기서 ‘향연’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아난(anan)인데 ‘구름’(cloud)라는 뜻이다. 실제로 대다수 영어 성경들이 이것을 구름으로 번역한다(ESV; RSV; KJV; 그러나 NIV는 ‘smoke’[연기]). 이 구름은 바로 시내산 정상에 나타난 ‘구름’과 동일한 단어이다. 모세가 산에 올라갈 때 ‘구름’(anan)이 산을 가렸다(출 24:15). 빽빽한 구름이 둘러쳐진 시내산 정상에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러 들어간 것처럼, 아론은 짙은 구름을 피우고 지성소 안의 법궤 위에 임재하신 하나님 면전에 들어가야 했다. 비록 이 구름은 사람 편에서 만들어진 것이었고 그로 인해 여러모로 한계가 있고 미약했지만, 하나님은 그런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만들어 지성소에 입장할 것을 명령하셨다. 그렇게 해야 대제사장이 지성소 안에서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다.

덧붙여 열왕기상 8장의 기록에 의하면, 솔로몬의 성전 봉헌식에서도 동일한 구름이 성전을 가득 채웠다(왕상 8:10-11). 신약에서도 ‘빛난 구름’이 나타나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막 9:7; 참조. 마 17:5), 예수님께서 구름 속으로 승천하셨고(행 1:9), 천상에서 구름 위에 앉아계신다는 말씀(계 14:14-16)과 장차 하늘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재림하신다는 말씀도 이런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마 24:30). 따라서 주께서 구름을 타는 이미지는 동화나 손오공 이야기 따위와 다른 것이다. 이처럼 구름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가려 인간을 보호하려는 하나님의 조치였다. 구름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차단했다. 하나님과 백성 사이를, 하나님과 모세, 그리고 하나님과 아론 사이를 나누셨다.

결국 지성소의 휘장 또한 바로 그런 차단막 기능을 했으며 백성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가린 수건 또한 일종의 구름과 같은 차단막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써 그 수건은 거두어졌으며 지성소의 휘장은 찢겼다.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물리적 차단막인 구름은 사라져 담대히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피조물은 저 너머에 홀로 거룩한 분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와 근본적 격차를 인식해야 한다. 그분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이다. 그분은 여전히 가까이가지 못할 ‘빛’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광채 앞에서 두려워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여전히 구약 백성들이 ‘여호와 앞에서’ 제사를 드릴 때 그랬던 것처럼 두렵고 떨린 겸비한 마음으로, 그러나 기쁘게 받으시며 응답해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힘찬 찬송을 부르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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