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갑신 목사(예수향남교회)

‘앞이야기’ 아닌 평안 누릴 ‘뒷이야기’ 믿음으로 승리의 삶 살자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눅 2:4)

정갑신 목사(예수향남교회)
정갑신 목사(예수향남교회)

‘뒷이야기’라는 말은 그 자체로 구미가 당깁니다. 앞에서 들었던 이야기에서는 알려지지 않았던 진짜 흥미로운 무엇인가가 있을 거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탄생에도 ‘앞이야기’와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 탄생의 앞이야기는 로마황제 가이사 아구스도의 호적명령으로 시작됩니다. 오늘날까지도 로마가 유럽의 어머니로 일컬어질 만큼 막강한 영향력을 남기고 있는 걸 보면, 당대 가이사의 명령이라는 말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였던 가이사는 할머니의 동생이었던 줄리어스 시이저의 피살 후 시저의 유언에 따라 그 자리를 계승한 후에, 막강 라이벌 안토니우스를 제압하고 기원전 27년부터 41년간 아우구스투스, 곧 존엄자로 군림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탄생 시기에 그의 권력은 최고 정점에 있었다고 알려집니다. 따라서 그의 호적명령에는 절대적 위엄성이 가득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가이사의 호적명령으로 해당 지역들은 들썩거렸을 것입니다. 로마호적법에 따르면 호적은 태어난 곳이 아니라 재산이 있는 곳에서 등록하게 되어있었습니다. 호적명령의 근본적인 목적은 세금수입의 확장과 확정이었습니다. 

그에 따라 재미로 표현하자면, 팔레스타인‘읍’, 갈릴‘리’, 시골 나사렛 주민 요셉과 마리아도 신속히 움직여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요셉이 결혼식 전에 마리아를 자기 호적지로 데려가려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당시 약혼제도는 남녀 간의 동침과 임신은 결코 허락하지 않았지만 약혼만 했어도 부부의 법적 권리는 인정받게 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미 세대주라는 법적 지위를 얻었으므로 요셉은 혼자만 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데려가려 했던 이유는 마리아의 임박한 출산 때문이었던 게 분명합니다. 만삭의 여인이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140여 킬로미터를 걸어야 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지만, 마리아가 혼자서 출산하는 신체적·사회적인 위험보다는 덜 할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고향 나사렛에서는 결코 출산할 수 없는 막막한 현실이 계속되던 중, 마침 마을 사람들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나사렛을 떠날 수 있었던 거였습니다.

요한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의 설교를 듣던 청중들이 말씀에 감동하여 예수님이 메시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베들레헴 출신이 아니라 갈릴리 출신이라는 사실 때문에 기대를 접어야만 했습니다. 다시 말해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나온다는 ‘미가 5장 2절’ 말씀은 유대인들 사이에 보편적 상식이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요셉과 마리아 역시 그 상식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에 따라 태중의 아기가 메시야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기로 한 이상, 로마황제의 호적명령에 따라 베들레헴으로 가는 동안 이들은 희미하게라도, 아기를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를 느꼈을 거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세계의 황제를 자처했던 가이사 아구스도는 자신의 권위를 실은 호적명령을 통해 온 세계와 우주의 진짜 황제이신 만왕의 왕 예수님이 나사렛이 아니라,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게 하는 일에 본의 아니게 결정적인 봉사활동을 했던 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968년, 독일의 20대 대학청년들은 2차 세계대전을 통해 선배들이 저질렀던 세계적 만행에 직면하라는 국가적 각성을 촉구하면서, 수치스런 과거에 안일하게 대처하고 여전히 비민주적으로 나라를 꾸려가는 정부에 격렬하게 저항했습니다. 그 후 22년이 지난 1990년 독일통일이 이루어졌는데, 놀랍게도 이 때 통일독일의 사회 정치적 주역들은 바로 22년 전 바로 그 대학 청년들이었습니다.

22년 전 그들은 단지 자신들의 단순한 열정에 의지해 자신과 조국에게 옳은 일을 하려고 과거의 죄악을 치열하게 반성하고 주변 피해 국가들과 새로운 화합으로 연대하는 것을 목적으로 일어섰던 것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결국 그들을 통일의 주역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많은 위대한 역사들은 본의 아니게 행한 제3의 힘과 역동을 통해 일어나는 것입니다. 물론 상황은 사뭇 다르지만 결과적으로 가이사의 호적명령은 세금수입이 아니라, 아기 예수의 베들레헴 탄생을 위한 조치였던 겁니다.

하지만 요셉 부부에게는 여전히 숙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출산한 후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였습니다. 낳은 아이를 데리고 나사렛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고, 모든 생활의 기반과 근거가 있는 나사렛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뜬금없이 동방의 점성술사들을 움직여 아기 예수님을 향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기예수를 만나기 전, 거의 만날 필요가 없었던 팔레스타인 왕 헤롯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바로 그 방문으로 인해 요셉 부부는 아기 예수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권력미치광이 헤롯이 본의 아니게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데리고 나사렛 대신 멀리 애굽으로 망명하도록 기여한 인물이 되었던 겁니다.

이들이 애굽에 얼마 간 머물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사렛 사람들이 별달리 의심할 수 없는, 헤롯이 더이상 해코지할 수 없는 시간이 지난 후였을 거라는 건 분명합니다. 물론 나중에 알게 되는 것이지만 아기 예수님이 애굽으로 가신 일은 단지 헤롯의 살해위협을 피하기 위해, 또 나사렛 고향 사람들의 사회적 위협에서 보호받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출애굽을 완성하시는 자로 오셨다는 사실과 관계됩니다. 그에 따라 예수님은 어린 양으로 탄생하시는 동시에 애굽으로 가셨고, 어린양을 잡아 바치는 유월절에 십자가에 죽으셨던 것입니다.

결국 자칭 세계의 왕 가이사 아구스도는 보석 박힌 보좌에 앉아 천하를 호령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명령은 진정한 만왕의 왕을 베들레헴 외양간의 구유로 안내하는 봉사활동이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왕 헤롯은 메시야를 살해함으로 모든 종류의 경쟁자를 제거하려 했지만, 그의 살해위협은 아기로 오신 우주의 진정한 통치자로 하여금 출애굽을 준비할 수 있게 해 준 봉사활동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위해 모세는 광주리에 담겨 나일강에 던져졌지만, 우리의 출애굽을 위해 아기 예수님은 강보에 쌓여 애굽으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우리의 출애굽을 위해 첫 예수는 말구유 나무통에 뉘어졌고, 마지막 예수는 나무에 달렸습니다. 우리의 출애굽을 위해 첫 아기예수는 강보에 쌓였고, 마지막 예수는 세마포에 쌓였습니다. 그 날 아기 예수를 감쌌던 강보는 피로 얼룩졌을 테지만, 오웬이라는 분에 따르면 그것은 공개적인 피투성이 죽음을 예견한 예표였던 겁니다.

생각해 보면, 요셉만큼 힘들고 애매한 상황이 또 있었을까 싶습니다. 결혼 전에 내 여자가 남의 아이를 가졌고, 그 아이가 하나님 아들이라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습니다. 기성의 지식대로라면 거짓말이라고 외쳐야 했고, 내 경험대로라면 세상이 미쳤다고 생각해야 했고, 내 정서대로라면 죽을 것 같은 분노로 이를 갈아야 했을 것입니다. 동시에 이해할 수 없는 믿음의 결단 때문에 긴장감 속에서 불러오는 배를 만삭 때까지 가까스로 숨겨야 했고, 이내 곧 만삭의 몸을 이끌고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죽을 힘을 다해 걸어야 했습니다.

어느 것 하나 자신의 의지와 선택과 결정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 거부할 수 없게끔 찾아온 일이었고, 누군가의 결정에 의해 끌려 다녀야만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이 이루어지는 방식이었던 겁니다. 드러난 앞이야기는 온통 초라함과 누추함과 불안과 두려움과 의심과 원망의 이야기일 뿐 이지만, 뒷이야기는 인류역사에서 영원토록 가장 위대한 이야기, 세계를 호령하던 대단한 왕들도 자원봉사요원으로 동원되어야만 했던 이야기였던 겁니다.

종종 성탄절 뮤지컬로 공연되곤 하는 <빈 방 있어요>를 들을 때마다 가슴 깊은 뭉클함이 찾아옵니다. 우리도 그 때 베들레헴,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다른 사람들처럼 낯선 부부의 앞이야기만 알고서 혀를 차고만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급기야 어린이들이 “아기 예수님~ 마굿간에 가지 마세요. 여기 빈 방 있어요”라는 대목을 소리 높여 부르는 순간이 되면, 우리 눈은 어느새 충혈됩니다. 그 이유는 배부른 마리아와 초조해 하는 요셉이 빈방을 찾아 헤매는 안쓰러운 앞이야기에 대한 긍휼 때문이 아닙니다. 그 노래가 요셉과 마리아의 진짜 뒷이야기를 알게 된 자들만 마음을 다해 부를 수 있는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빈 방 있어요”라는 외침은 ‘불쌍한 나그네들이여! 내가 당신들에게 긍휼을 베풀겠다’는 제안이 아니라 ‘나 같이 천한 자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왕이시여! 내 집 전부를 당신의 처소로 삼게 해 주소서’라는 외침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둘러싼 상황이 어떻든지 내가 구유에 오신 예수님과 함께, 그 예수님을 통해 그의 말씀과 함께, 그 말씀을 따라 그 상황 가운데 있기만 하다면, 그 어떤 종류의 더 나은 다른 상황에 비할 길 없는 가장 위대한 여정을 통과하는 상황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당장의 현실들, 곧 우리들의 앞이야기들 뒷편으로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이뤄 가시는 뒷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아직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고통과 초조와 긴장뿐 일 수 있지만, 언젠가 그 뒷이야기가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상상할 수 없었던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틀림없이 밝혀질 그 이야기가 반드시 있을 것을 믿는 믿음으로 오늘을 이기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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