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들고 산을 넘는 자의 아름다운 발걸음

베어드 선교사가 대구경북 선교 거점 마련하고자 넘었던 복음의 통로
수많은 교회들 세우고 겨레의 각성 일깨운 청도기독교의 상징적 존재

구비구비 높고 험한 청도 팔조령 옛길. 이 고개를 넘어온 베어드 선교사를 통해 대구경북 선교의 첫 장이 시작됐다.
구비구비 높고 험한 청도 팔조령 옛길. 이 고개를 넘어온 베어드 선교사를 통해 대구경북 선교의 첫 장이 시작됐다.

담이 큰 사람이라도 혼자 가기는 어려운 길이었다. 해발 410m의 가파르고 굽이진 고개 자체가 난코스이기도 했지만, 자주 출몰하는 산적 떼 때문에 여차하면 목숨까지 걸어야하는 도전이 필요했던 것이다. 오죽하면 여덟 사람이 함께 모여야 겨우 넘을 수 있다고 고개 이름이 ‘팔조령(八助嶺)’이었을까.

지금은 수월하게 통과할 수 있도록 터널도 뚫리고 대체 도로가 나 한적한 길이 되고 말았지만, 경북 청도의 팔조령 옛길은 오랜 세월 부산에서 대구로 향하는 마지막 관문 역할을 하던 길목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 이 험준한 길을 열심히 올라가던 서양인이 있었다. 미국북장로교선교부 소속 윌리엄 베어드(한국명 배위량) 선교사는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경북 내륙으로 사역의 지경을 넓히고자 1893년 4월 14일 답사여행을 떠났다. 부산에서 밀양을 거쳐 대구까지 이르는 그 멀고 험한 길을 베어드 일행은 8일 만에 주파했다.

팔조령 옛길에 건립된 청도기독교 100주년기념비.
팔조령 옛길에 건립된 청도기독교 100주년기념비.

한시라도 빨리 대구에 도착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싶었던 선교사였지만 팔조령의 거대한 위용 앞에서는 잠시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가 쓴 <베어드의 일기>에는 당시의 상황이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우리는 어제 이른 오후 안새부리(현 청도군 이서면 양원리)의 작은 산골마을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우리는 2~3시간 더 여행을 했어야 했는데, 앞에 있는 매우 높은 산이 마부들에게 넘고자 하는 마음이 들 수 없게 만들어 그들의 의견에 따랐다. 책에 대한 문의가 시작되어 잘 시간까지 계속되었다. 전도할 틈은 거의 없었으나 많은 책을 배포했다. 대구에 오전에 도착하려고 우리는 일찍 출발했다. 팔조령의 제일 높은 산을 먼저 넘었다. 산을 내려온 후 우리는 몹시 길고 폭이 좁은 계곡을 지나 서서히 넓어지며 대구를 둘러싼 계곡으로 들어갔다.(1893년 4월 22일)”

베어드의 선교길에 휴식처 역할을 한 청도역 인근의 납닥바위.
베어드의 선교길에 휴식처 역할을 한 청도역 인근의 납닥바위.

이 여정은 두고두고 대구·경북 교회사의 결정적인 순간이 되었다. 대신대학교 역사신학 교수인 김병희 목사는 “청도를 거쳐 들어간 복음은 대구에서 ‘한국의 예루살렘’이라 불릴 만큼 풍성한 복음의 꽃을 피워냈고, 다시 경북 전체로 퍼져나가 수많은 교회들을 세우며 사람들을 새 생명의 길로 인도했다”고 설명한다. 팔조령 옛길을 오늘날 기독교학자들은 ‘베어드의 선교길’ 또는 ‘팔조령 선교길’이라 부른다.

그로부터 딱 100년이 지난 1993년 4월 22일에는 선교길의 오르막 막바지 지점에 청도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사업위원회가 당시 청도 일대 67개 교회의 힘을 모아 ‘청도기독교100주년기념비’를 건립했다. 베어드가 팔조령을 넘은 바로 그날을 청도교회사의 기원으로 간주한 것이다. 기념비는 건립 이후 지금까지 선교길의 상징적 존재로서 역할을 해오고 있다.

대구중CE 주최 팔조령 선교길 걷기행사에 참가해 이 땅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한 선교사들의 발자취를 되새기는 성도들.
대구중CE 주최 팔조령 선교길 걷기행사에 참가해 이 땅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한 선교사들의 발자취를 되새기는 성도들.

또한 청도읍내에는 팔조령 등정을 앞둔 베어드 일행이 쉬어간 장소로 알려진 ‘납닥바위’가 존재한다. 비록 청도역이 세워지고 철길이 놓이면서 바위의 옛 형체는 많이 사라졌지만, 지금도 순례자들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선인들의 발자취를 음미하는 명소로 남아있다.

이러한 사연들이 널리 알려진 이후 베어드의 선교길은 많은 신학생과 성도들이 즐겨 찾는 순례길이 되었다. 최근에도 대구중CE 주최로 팔조령 일대에서 200여 명의 남녀노소 성도들이 참여한 가운데, 선교길 걷기 행사가 개최된 바 있다.

청도 최초의 교회인 풍각제일교회의 옛 예배당. 2019년 예장통합 총회로부터 한국기독교사적 제37-1호로, 대구동노회 기독교사적 제1호로 지정됐다.
청도 최초의 교회인 풍각제일교회의 옛 예배당. 2019년 예장통합 총회로부터 한국기독교사적 제37-1호로, 대구동노회 기독교사적 제1호로 지정됐다.

한편 베어드가 팔조령을 지나간 후 청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대구선교를 준비하던 베어드의 사역지가 갑자기 바뀌면서, 그 책임은 베어드의 후배이자 처남인 제임스 아담스(한국명 안의와)가 맡았다.

아담스 선교사는 대구약령시와 청라언덕을 주 무대로 삼아 대구제일교회 동산의료원 계성학교 등을 세우며 대구 복음화를 위해 눈부신 활약을 하는 한편, 경북 전역에 복음을 전파하는데도 최선을 다했다. 1897년 청도군 화양면 사람 김경수가 기독교 복음을 처음 접한 것도 대구약령시에서 만난 아담스 선교사를 통해서였다.

김경수는 조병종 김양석 홍종찬 등에게 전도하고 이들과 함께 1901년 이서면 가금리에 송서교회(현 풍각제일교회)를 세운다. 풍각제일교회는 초창기 교인들의 헌신 속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매개체 역할을 훌륭히 감당해낸다. 1906년에 오산교회와 서상교회(현 화양읍교회), 1908년에 삼신교회와 칠곡교회가 풍각제일교회를 통해 설립된다.

옛 청도의 중심지에 1906년 설립된 화양읍교회.
옛 청도의 중심지에 1906년 설립된 화양읍교회.

한편으로는 일신학교를 세워 사람들을 문맹에서 구출하고, 겨레와 교회를 짊어질 인재들을 양성하기도 했다. 그런 과정에서 홍재범과 같은 애국지사들도 배출되었다. 일신학교 교사로 봉직하면서 임시정부를 도와 대구·경북 일대에서 군자금 모금 등의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고초를 겪은 홍재범은 올해 대한민국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 지정을 받았다. 이와 같은 사적들은 풍각제일교회 역사관에서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1905년에는 에드윈 맥파랜드(한국명 맹의와) 선교사가 청도 동부의 산악지대로 진출해 매전면 온막리에 명대동교회(현 온막교회)를 설립한다. 온막교회는 청도의 또 다른 복음의 거점으로 큰 역할을 했으며, 설립자인 이창기 집사가 일본군에 의해 순교하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이창기 집사의 순교행적을 기념하는 작업도 지역교계와 학계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다.

보배로운 역사를 간직한 청도의 교회들은 내년이면 기독교선교 130주년을 맞이한다. 대구경북 선교역사의 기점으로서 청도의 교회사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래서 지역교계와 학계에서 옛 선교사와 성도들의 발자취를 기리는 작업들이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김병희 교수는 “팔조령을 시작으로 납닥바위 풍각제일교회 화양교회 온막교회 등을 잇는 역사벨트가 조성되고, 베어드가 거쳐간 선교길의 여러 거점들을 복원하고 기념하는 작업들이 일어나 청도교회사의 중요성을 집중 조명하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소망한다.

팔조령 선교길을 대구·경북 역사문화벨트 중심으로

 

대한민국역사문화운동본부(이사장:전재규 장로)는 대구·경북의 기독교문화유산들로 역사문화벨트를 조성하는 사업을 구상 중이다. 사업안에 따르면 대구를 중심으로 인근 시군을 연결하는 총 4개의 역사문화벨트 조성이 추진 중인데, 그 중 ‘제2길’로 불리는 벨트가 바로 경북 청도와 대구광역시 및 경산 일대를 잇는 코스이다.

 

제2길은 대구 청라언덕에서 시작해 구 대구제일교회와 가창을 거쳐 청도 팔조령과 납닥바위 그리고 풍각제일교회를 경유한다. 이어 다시 사월교회와 경산교회를 지나, 대신대학교 선교박물관과 경산 메노나이트선교기지 그리고 영남신학대에서 매조지 된다.(그림 참조)

 

전재규 장로는 특히 윌리엄 베어드 선교사의 복음전래길인 제2길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부산에서 건너온 복음의 씨앗이 대구에서 꽃피우고, 다시 경북 일대로 번져가 많은 열매를 맺는 여정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으로 꼽히는 것이 바로 청도에서의 여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벨트 조성과 함께 팔조령에 베어드의 스토리를 활용한 조형물과 순례자들을 위한 쉼터를 조성하는 계획 등도 함께 추진코자 한다.

 

실제로 청도 팔조령의 역사적 의미를 잘 알고 있는 이들이 이곳을 직접 답사하며 탐방하는 움직임도 있다. 기독청장년면려회 대구중노회연합회(회장:최신효 장로·대구중CE)가 10월 10일 개최한 팔조령 선교길 걷기대회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청도 대곡교회에서 청도기독교100주년기념비까지 왕복 8km의 길을 걸으며, 복음과 선교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는 시간이었다. 걷기대회에 동참한 성도들은 복음을 위해 온갖 위험과 수고를 기꺼이 무릅쓴 선교사들의 헌신을 되새기는 기회가 됐다고 소감을 밝혔다.

전 대신대학교 부총장인 황봉환 교수는 자신의 저서 <청라정신과 대구경북 근대문화>에서 “역사문화 벨트 조성 사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등의 행정적·재정적 지원과 후원도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누군가가 앞장서서 할 일”이라며 지역교회와 성도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협력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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