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립 130주년 기념해 영남 신앙뿌리 담은 새 역사관 선보여

‘한강이남 최초의 교회’로서 걸어온 사명의 길을 확인하는 공간으로 알차게 구성해
부산 근대역사골목인 이바구길 한가운데서 겨레와 애환 함께한 교회 발자취 증언

초량이바구길은 부산이 자랑하는 근대역사와 문화의 실크로드이다. 개항 선교사 항일 전쟁 피난민 산복도로 산업화 등 대한민국의 온갖 애환을 담은 문물들과 그것들을 둘러싼 ‘이바구’(‘이야기’의 경상도 사투리)들을 이곳에서 만난다.

의술을 인술로 승화시킨 성산 장기려 박사, ‘일출봉에 해 뜨거든’이라는 첫 대목으로 유명한 ‘기다리는 마음’의 시인 김민부, 우리 대중문화에 한 획을 그은 가수 나훈아와 개그맨 이경규 그리고 뮤지컬 음악감독 박칼린 등 초량이 자랑하는 수많은 인물들도 곳곳에서 마주친다.

공식적으로는 부산역과 차이나타운이 이바구길의 시작이지만 사람들이 골목탐방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지점은 다른 데 있다. 초량교회(김대훈 목사), 부산경남 뿐 아니라 영남지역 선교의 교두보 역할을 한 바로 그 교회이다.

초량교회는 부산선교 개척자의 이름을 딴 베어드관을 역사관으로 개조해 운영 중이다.
초량교회는 부산선교 개척자의 이름을 딴 베어드관을 역사관으로 개조해 운영 중이다.

‘제법 높은 산동네에 이렇게 큰 예배당이 있네!’라는 첫 인상을 받은 이들의 눈길은 이바구길을 소개하는 안내판에 이어 자연스레 탐방로를 이루는 교회 담장의 전시물들로 이어진다.
전시물들은 이곳이 영선현이라 불리던 1892년에 세워진 ‘한강이남 최초의 교회’라는 타이틀 말고도 초량교회가 일제강점기와 6·25 등 격동기에 보여준 독립운동 배후 지원, 신사참배 거부운동, 최초의 근대식 병원 건립, 피난민들을 위한 섬김 등을 소개한다. 단순히 하나의 종교기관만이 아니라 겨레의 역사에 깊숙이 뿌리 내린 존재임을 느끼며 교회당을 다시 보게 된다.

호기심이 많은 여행자들은 아예 교회당 경내로 들어와 교회 종탑과 역사관까지 구경한다. 초량교회는 설립 130주년을 맞이한 지난해, 옛 의료선교사 찰스 어빈(한국명 어을빈)의 헌금으로 세워졌다 일제의 수탈로 빼앗겼던 종탑을 복원하고 역사관도 재개관했다.

역사관 입구는 옛 어을빈병원의 모습을 재현한 포토존으로 장식돼있다.
역사관 입구는 옛 어을빈병원의 모습을 재현한 포토존으로 장식돼있다.

당초 본당의 다락방 자리에 위치했던 초량교회 역사관은 교회 마당 쪽 베어드관으로 옮겨 관람객들의 접근성을 높였다. 부산선교의 개척자 윌리엄 베어드(한국명 배위량)의 이름을 딴 베어드관은 그 동안 당회실과 교역자 사택 등으로 활용되다가, 이번에 역사관이 들어서면서 그 이름에 걸 맞는 위상을 얻게됐다.

단지 자리만 바꾼 것이 아니다. 한국교회사 그 중에서도 영남교회사의 당대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고신대학교 이상규 교수와 부울경기독교역사연구위원회 박시영 목사가 개편 작업에 참여해, 초량교회를 중심으로 영남선교의 역사 전반을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전시체계와 다자인까지 바꾸면서 완전히 새로운 전시관으로 만들었다.

김대훈 목사는 우리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발휘해 온 초량교회의 역사적 전통을 계승하는 데 힘쓸 것을 다짐한다.
김대훈 목사는 우리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발휘해 온 초량교회의 역사적 전통을 계승하는 데 힘쓸 것을 다짐한다.

무려 1억원 가까운 막대한 공사비가 들어간 이 사업을 추진하게 된 이유를 김대훈 목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2018년 우리 교회가 총회로부터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제3호로 지정되며, 조그만 전시실 수준에 불과하던 교회 역사관을 더 의미 있고 규모를 갖춘 공간으로 확충해야 한다는 생각들이 일어났습니다. 마침 교회 설립 130주년이라는 기념비적인 시간이 다가왔고, 기존 역사관 천장에 물이 새어 보수공사가 불가피해지면서 새로운 역사관 건립으로 방향을 정한 것입니다.”

역사관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건물 입구에서부터 시작한다. 미국북장로교 선교사들이 항도 부산에 상륙해 퍼뜨린 복음은 어떻게 경남 일대로 퍼져나갔는지를 방문자들은 계단을 밟고 오르면서 한 장면씩 차례로 만날 수 있다.

그렇게 2층의 역사관에 도착하면 ‘어을빈병원’이라고도 불리던 정킨기념병원의 풍경을 소재로 제작한 포토존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의료선교사 찰스 어빈 그리고 그와 함께 기거하며 성장해 훗날 경남도지사가 되는 양성봉 장로가 나란히 선 모습에서 깊은 정감을 느낄 수 있다.

순교자 주기철 목사가 초량교회를 담임하던 시절 사용한 강대상.
순교자 주기철 목사가 초량교회를 담임하던 시절 사용한 강대상.

순교자 주기철 목사가 초량교회를 담임하던 시절 사용한 강대상, 윌리엄 베어드의 아내 애니 베어드 선교사가 한글로 작사한 찬송가 ‘멀리 멀리 갔더니’ ‘나는 갈길 모르니’ 등에 대한 이야기처럼 기존 역사관에 소장되어있던 아이템들도 반갑지만, 한국교회사와 민족사에 큰 영향을 끼친 초량교회의 인물과 사건을 중심으로 새로 꾸민 전시물들이 더욱 눈길을 사로잡는다.

한국학 연구의 선구자인 제임스 게일 선교사, 백산상회를 통해 임시정부와 독립군을 지원한 윤현진 윤현태 형제 집사, 이들 형제를 돕다가 옥고를 치른 정덕생 목사, ‘한국의 조지 뮬러’로 불린 고아들의 아버지 이약신 목사, 3·1운동과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앞장선 조수옥 손영복 문순복 주경대 등의 생생한 스토리는 우리 가슴을 뛰게 한다.

20세기 초에 제작된 제니스 라디오와 바우마이스터 피아노, 한국선교를 위한 재정후원에 큰 공로를 세운 언더우드 타자기, 선교사들이 사용한 여행용 트렁크 등 신앙선배들의 땀과 눈물이 서린 유품들을 만나는 것도 적잖은 기쁨이다.

설립 130주년을 기념해 복원한 초량교회 종탑.
설립 130주년을 기념해 복원한 초량교회 종탑.

온통 긍지 가득한 공간이지만 초량교회는 이 역사관을 자신들만의 소유나 자랑으로 여기지 않기로 했다. 부산을 비롯한 영남의 모든 교회들이 신앙의 같은 뿌리를 찾는, 그래서 믿음의 형제로 깊이 연대하는 자리로 만들어가려 한다.

김대훈 목사는 “모든 좋은 것을 이웃들과 함께 하며, 선한 영향력을 우리 사회와 한국교회 안에서 발휘해 온 초량교회의 오랜 전통을 역사관을 통해서도 구현해 나갈 것”이라고 다짐한다.

이 사역을 위해 초량교회 역사위원회(위원장:정충권 장로)는 역사관의 관리는 물론 안내와 해설, 자료수집 등 다양한 역할들을 감당하려 한다. 벌써부터 많은 성도들이 교회사를 다시 공부하며 사역에 참여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옛 역사를 동력으로 삼아 더욱 위대한 새 역사를 써나가는 초량교회의 미래를 기대한다.

“우리 교회 역사공간 만들어보세요”

광화문의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동상을 보면서 우리 국민들은 물론 외국인들까지도 대한민국의 무엇을 자랑스러워 하는지, 어떤 인물을 소중히 여기는지 깨닫게 됩니다.

훈민정음으로 대표되는 애민정신과 문화 창달의 역사, 거북선으로 대표되는 애국심과 국난 극복의 역사입니다. 역사를 가진 모든 국가와 단체들은 이처럼 가장 눈에 띄는 공간에 가장 보여주고 싶은 것들을 설치합니다.

‘우리 교회를 찾아오는 이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것’을 골라보라면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교회의 비전, 화려한 사역, 부흥하는 교세, 뛰어난 사역자들 등등 갖가지 자랑거리들이 생각나실 겁니다. 물론 그런 부분도 교회의 정체성을 이루는 훌륭한 요소들이겠지요. 하지만 정체성에 관한한 ‘역사’라는 것을 능가할만한 다른 무엇이 과연 있을까요.

처음 교회를 세울 때의 초심, 오늘의 우리 교회를 있게 한 뿌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들을 놓치지 않아야 우리는 완전히 다른 존재로 변질되는 비극을 피할 수 있고, 반드시 나아가야 할 우리의 항로를 향해 꿋꿋이 전진할 수 있습니다.

예배당 안에, 이왕이면 가장 눈에 띄는 자리에 교회 역사를 기념할만한 공간을 만들어 봅시다. 그 공간이 꼭 넓고 쾌적해야 한다거나, 세련된 디자인으로 장식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추억의 장면이나 인물들이 담긴 사진 몇 장이어도, 기억할만한 교회의 사건들이나 연혁을 보여주는 글귀 몇 줄이어도 충분합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기념비인 ‘에벤에셀’이 그저 길가에 큰 돌 하나 세워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세요.

단, 그 역사는 우리가 진심으로 자랑스러워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이어야 합니다. 내가 하찮게 여기는 그 무엇을 남들이 알아주고 인정해줄리 만무합니다. 만약 그 조건만 충족된다면 이 공간은 우리 교회 구성원들의 결속력을 훨씬 더 높여줄 것이고, 다른 이들이 우리가 어떤 교회인지 제대로 알게 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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