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주님 앞에 충성스러운 신앙공동체였다

3·1만세운동과 신사참배 반대운동 앞장서다 고난의 시간들을 감내
한국교회 거목들 배출하고 제85회 총회 유치하며 복음행진 이어가

 

서부경남 최초의 신앙공동체이자 애국신앙의 산실이었던 진주교회의 예배당. 왼쪽에 진주3·1운동의 상징인 교회 종탑이 복원되어있다.
서부경남 최초의 신앙공동체이자 애국신앙의 산실이었던 진주교회의 예배당. 왼쪽에 진주3·1운동의 상징인 교회 종탑이 복원되어있다.

누구도 빠지지 않았다.

넉넉한 성도들은 건축 자재를 기부하거나 헌물을 했다. 살림 여유가 많지 않더라도 최선을 다해 헌금했다. 그마저도 어려운 이들에게는 ‘날 연보’라는 방법이 있었다. 건축 현장에서 일품을 바치는 것이었다. 하루하루 벌어야 먹고 살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또한 큰 헌신이었다.

선교 초창기부터 예배당을 짓는 것은 한국인 성도들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네비우스 선교정책’의 하나인 이 원칙은 진주선교부에서도 엄격하게 적용됐다. 진주 그리고 서부경남지역 최초의 교회인 진주교회(송영의 목사)는 여러 차례 주소를 옮기고 새로 짓는 복잡한 예배당 변천사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의 충성심을 바탕으로 성공적으로 건축을 완수할 수 있었다.

진주교회 초창기의 예배당 모습.
진주교회 초창기의 예배당 모습.

경남선교를 담당한 호주선교부는 부산에 이어 1905년 진주에 두 번째 선교부를 세웠다. 1902년 의료선교사로 파송되어 초량과 부산진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휴 커를(한국명 거열휴) 선교사 부부가 서부경남 선교의 사명을 띠고 진주로 찾아왔다.

진주교회 조헌국 장로가 저술한 <진주에 뿌려진 복음>(2015년)에는 당시 진주의 형편을 묘사한 기록이 등장한다.

“연락(宴樂)에 취한 탕자들은 술집과 기생집에 방황 골몰하여 가신을 탕진하니, 기생이 많음으로 파리의 수효에 비교하며, 부교사치(富驕奢侈)함은 제2의 음란한 고린도성이라 할 수 있고, 사신우상 숭배하는 악습은 성행되어 아덴성에 지지 아니하더라.”

1931년 개원한 배돈병원의 옛 모습.
1931년 개원한 배돈병원의 옛 모습.

이처럼 척박한 영적환경 속에서 커를 선교사는 자신의 가족, 그리고 동역하는 박성애 조사의 가족 등과 함께 그해 10월 20일 마방으로 사용해오던 초가건물을 처소로 삼아 첫 예배를 드린다. 당초 11월 5일로 알려졌던 이날을 진주교회는 고쳐 잡고, 지금까지 설립일로 지킨다.

복음을 들고 온 호주 선교사들에게 한국인 성도들은 매우 협조적이었다. 당회장은 선교사가, 제직회장인 한국인이 각각 맡으며 자신들 앞에 놓인 많은 과제들을 척척 해결해냈다. 초창기 ‘진주야소교회’ 시절부터 자리를 옮길 때마다 ‘옥봉리교회’ ‘동래정교회’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며, 그 때마다 앞서 소개한 ‘날 연보’까지 하며 새 예배당을 짓는 고생을 기꺼이 감수했다.

1915년 발급된 커를 선교사의 부부여권. 현재 진주교회 역사관에 소장되어있다.
1915년 발급된 커를 선교사의 부부여권. 현재 진주교회 역사관에 소장되어있다.

선교사들은 교회에 이어 남학교인 광림학교, 여학교인 시원학교를 각각 설립하여 사람들을 일깨웠다. 한글학자이자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안확 선생 등이 교사로 봉직하면서, 이들 학교에서는 애국신앙을 품은 젊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1913년에는 교회 옆에 호주 여선교사 페튼을 기념하는 배돈기념병원이 설립되어 근대의료의 출발을 알렸다.

그 열매들은 1919년 3월 18일 진주에서 독립만세운동이 벌어졌을 때 확실히 드러났다. 진주교회 성도들과 광림학교 학생 그리고 배돈병원 직원들이 주도한 이날 봉기는 당일 정오에 진주교회 종탑의 타종과 동시에 힘차게 진행됐다. 이후 만세시위는 그해 4월까지 아홉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광림학교 악대가 시위행렬을 선도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당시 악대에 참여한 천명옥 박성오 김영조 이영규를 비롯한 여러 성도와 학생들이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으며, 이들 중 상당수가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았다. 이렇게 발현된 항일정신은 훗날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재현된다.

6·25 당시 성도들에게 발급된 신분증명서.
6·25 당시 성도들에게 발급된 신분증명서.

1938년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에도 불구하고, 당시 진주교회를 담임하던 김용규 목사와 성도들은 스스로 교회문을 걸어 잠그고 신사참배를 거부한 역사가 있다. 배돈병원 원목이던 이현속 전도사는 신사참배 반대로 인해 체포되었다가 옥중에서 순교하기도 했다. 호주선교사들과 진주교회 성도들에게서 나타난 이 같은 저항의 신앙은 해방 후 고신교단 창설의 뿌리가 된다.

안타깝게도 애국신앙의 산실이었던 광림학교는 재정난으로 1929년에, 시원여학교는 신사참배 거부에 대한 일제의 탄압으로 1939에 각각 폐교된다. 배돈병원 또한 1941년 일제의 외국인 추방조치로 어려움을 겪다가 6·25전쟁 때 파괴되어 다시 복구되지 못했다.

신분 차이를 극복하고 백정들과 동석예배를 드리며 한 공동체를 이룬 진주교회의 사적을 기념하며 지역 사회단체에서 설치한 표지판.
신분 차이를 극복하고 백정들과 동석예배를 드리며 한 공동체를 이룬 진주교회의 사적을 기념하며 지역 사회단체에서 설치한 표지판.

다만 광림학교 건물은 훗날 경남성경학원이 인수해, 그 전통이 오늘날 부산신학교 등으로까지 이어진다. 광림학교와 배돈병원이 있던 터에는 그 역사를 알리는 표지판이 설치되어있다. 만세운동의 상징이었던 교회 종탑은 2012년에 복원되었다.

한편 이후로도 진주교회는 호주 선교사들에 이어 박성애 김이제 이약신 김용규 김영환 김문태 황철도 박원섭 김영환 김동권 목사 등이 이어 담임하면서, 지역을 대표하는 신앙공동체로 위상을 굳건히 했다. 특히 이약신 목사와 황철도 목사는 예장고신 총회장을, 김동권 목사는 예장합동 총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2000년 열린 진주교회에서 열린 제85회 총회의 모습.
2000년 열린 진주교회에서 열린 제85회 총회의 모습.

제85회 총회를 성공적으로 치러내는 한편으로 진주노회의 사회복지시설인 성로관 건립과 운영에 적극 참여하고 출산장려운동 전개, 사랑의 쌀 나누기 등으로 교계와 지역사회에 크게 이바지해왔다.

이런 자랑스러운 세월은 2011년 건립된 커를기념비전센터의 역사관에 잘 정리되어있다. 역사관에서는 커를 선교사 부부 여권, 1905년부터 1930년까지의 교회의 약사가 정리된 <진주면옥봉리예수교장로회연혁사>, 호주 선교사들이 사용하던 생활용품, 6·25전쟁 중에 발행된 신도증 등 진귀한 자료들을 관람할 수 있다.

진주교회 예배당 종탑 앞에서 진행되는 만세운동 재현행사.
진주교회 예배당 종탑 앞에서 진행되는 만세운동 재현행사.

현재 진주교회를 담임하는 송영의 목사는 “지역사회는 물론이고 한국교회사에 빛나는 자취를 남긴 진주교회 전통을 앞으로도 잘 계승하고 그 정신을 널리 알리는데 힘쓸 것”을 다짐한다.

진주교회 송영의 목사 인터뷰

“묻혀있는 역사 발굴 멈추지 않을 것”

“진주교회의 역사는 한 교회만의 역사가 아니라, 서부경남 교회사의 핵심이라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가치를 가집니다.”

송영의 목사
송영의 목사

송영의 목사는 설립 120주년을 앞둔 진주교회의 역사를 정확하게 규명하고 그 의미를 찾는 작업은 대단히 중요한 과제라고 힘주어 말한다. 증경총회장 김동권 목사 후임으로 2006년 진주교회에 부임한 이후, 역사 찾기 작업에 손수 많은 힘을 쏟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 동안 한국교회사에서 서부경남을 다루는 부분은 상대적으로 빈약했고, 그나마 관련해서 발표된 책이나 논문에 기술된 내용 중 오류도 많았습니다. 그만큼 이에 대한 연구가 소홀했다는 뜻입니다.”

이를 바로 잡고자 송 목사는 같은 교회 조헌국 장로의 도움을 받아 직접 역사적 현장들을 탐방하고, 증언자들을 만나며, 심지어 해외까지 찾아가 자료를 수집해오기도 했다. 그 결과 진주를 중심으로 서부경남 선교를 개척한 호주선교회의 당시 선교보고서 등을 입수할 수 있었고, 그 기초 위에 고신대 이상규 교수 등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의미 있는 실적들을 거두게 됐다.

진주교회 120년을 준비하며 소중한 역사를 발굴하고 조명하는 작업에 힘쓰고 있는 송영의 담임목사(사진 왼쪽)와 교회사무장 이찬흠 장로.
진주교회 120년을 준비하며 소중한 역사를 발굴하고 조명하는 작업에 힘쓰고 있는 송영의 담임목사(사진 왼쪽)와 교회사무장 이찬흠 장로.

“오래전 ‘배건너마을’이라 불리는 마을에 백정들이 모여 살았는데, 당시 신분을 중시하는 문화 때문에 복음이 진주에 들어오고 교회가 세워졌어도 이곳의 성도들은 따로 예배들 드려야 했습니다. 호주선교사 라이얼 목사님이 1909년 8월 이분들을 교회로 불러 동석예배를 드리도록 했는데, 이 일을 계기로 진주에서 신분 차별을 없애자는 ‘형평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이 사실이 뒤늦게 지역사회에 알려지면서, 2013년 진주형평운동기념사업회가 진주교회 앞마당에 기념판을 세우는 일로 이어졌다. 송 목사와 진주교회에게는 큰 보람을 느끼는 결실 중 하나였다.

이밖에도 진주 3·1만세운동을 개시하는 신호탄 역할을 한 교회 종탑을 2012년 복원해 그 앞에서 매년 만세운동 재현행사를 열고,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모의했다가 체포된 진주교회 성도들의 공판기록을 찾아내는 등 항일 애국운동에 앞장선 교회의 역사까지 규명해냈다. 이에 대한 자료들은 2011년 건립한 교회 비전관 6층의 역사실에 전시되어있다.

“아직도 묻혀있는 소중한 역사들이 많습니다. 계속 발굴하고 조명하는 일이 저희 진주교회에가 계속해서 감당할 책임이겠죠. 그래서 설립 120주년 기념사업으로 호주선교부의 진주사역에 관련된 세미나 개최 등 여러 활동들을 구상하는 중입니다. 아직 우리 교단에 호주선교부의 역사를 연구하는 전문가가 많지 않은데, 혹시 나타나게 되면 적극 지원할 생각도 있습니다.”

진주교회가 제107회 총회에 진주노회를 통해 한국교회역사사적지 지정을 청원하는 헌의안을 올리게 된 데는 이런 배경들이 있다. 송 목사는 “사적지 지정이 이루어지면 우리 교회의 역사적 가치를 널리 드러내며, 다가올 120주년 역사를 뜻깊게 기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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