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 탄압 순교의 아픈 역사 딛고 찬란한 믿음의 꽃 만개한 신앙공동체

“우리는 장로교 신자입니다. 신앙의 자유가 없는 이 병원에서는 도저히 못 살겠습니다.”

소록도를 탈출하려다 붙잡혀온 세 사람은 주눅 들어 있기는커녕 도리어 당당했다. 대구에서 온 최재범 김금영 그리고 부산에서 온 박장영 등 세 사람의 이처럼 의연한 모습에 일본인 원장은 깊은 고민을 시작했다.

100년 역사를 가진 소록도교회의 초창기 성도들.
100년 역사를 가진 소록도교회의 초창기 성도들.

일제 조선총독부가 소록도에 자혜의원을 세우고 한센인들을 수용하기 시작한 것은 1916년의 일이었다. 서양선교사들이 주도하고 있던 한센인 치료와 선교활동이 자신들의 식민지배 체제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해 이루어진 대응조치였다. 사실상 무단통치 방식으로 운영되던 소록도에 변화의 조짐이 나타난 것은 하나이 젠키치가 제2대 자혜의원장으로 부임하면서부터였다.

전임 원장과 달리 하나이 원장은 환자들에게 조선식 생활방식을 허용하고, 병원 직원들에게도 환자를 멸시하거나 학대하는 일이 없도록 엄중히 지도했다. 탈주자들에게도 중한 형벌을 가하는 대신 그들의 불만사항을 경청하고 이를 해소하는데 힘쓴 온화한 인물이었다.

소록도 최초의 예배가 열렸던 구북리 1호사.
소록도 최초의 예배가 열렸던 구북리 1호사.

그 결과 소록도에도 기독교 복음이 들어올 수 있었다. 머나먼 길을 찾아와 어려운 환경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한 인물은 일본성결교회 목사인 다나카 신자부로였다. 1922년 10월 2일 소록도에 도착한 다나카 목사는 섬에 머물면서 환자들에게 열심히 전도했고, 바로 이 사역이 소록도교회의 기원이 됐다.

이후 광주와 대구 등지에서 건너와 입원한 장로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약 80여명이 모인 가운데 구북리 1호사와 8호사에서 소록도의 첫 예배가 시작됐다. 이듬해에는 광주에서 온 박극순이 다나카 목사의 설교를 통역하고 찬양을 지도하면서 예배에 참석하는 인원이 점점 늘었고, 그해 11월 10일에는 남녀 44명의 성도에게 첫 세례식이 거행되기도 했다.

1925년에는 전도원 집사 방문원 등 교회의 역원들이 선출되고, 그 다음해에는 주일학교가 조직되는 등 소록도교회는 점차 체계를 잡아간다. 하나이 원장과 그 후임인 아자와 준이치로 원장인 교회들의 활동에 대단히 호의적이어서 예배 처소는 물론 강단 풍금 시계 종탑 등 각종 비품들까지 마련해주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초대교회인 북부교회에 이어 1928년에는 남부교회가, 1933년에는 동부교회(현 신성교회)가 잇달아 세워진다.

소록도에 복음의 문을 연 일본인 다나카 신자부로 목사.
소록도에 복음의 문을 연 일본인 다나카 신자부로 목사.

초창기 일본성결교단 목회자들이 담임하면서 ‘소록도성결교회’로 불리던 교회들은 감리교 목사의 부임을 계기로 1934년 ‘소록도기독교’로 개칭해 운영되기 시작한다. 교세 확장에 부담을 느낀 일제의 견제와 탄압이 본격화되었지만 이후로도 부흥의 물결은 멈추지 않아 동성교회(1937년) 중앙교회(1938년) 서성교회(1938년)가 문을 열었고, 해방 후에는 장안교회(1946년)와 병원 직원들 중심의 소록도교회(1951년)가 설립되어 소록도에 여덟 교회의 시대가 열렸다.

첫 한국인 담임목사이자 순교자 김정복 목사.
첫 한국인 담임목사이자 순교자 김정복 목사.

소록도의 교회들의 장로교회로 전환은 해방 직후에 이루어졌다. 일본인들이 떠난 후 병원이 혼란기를 겪는 중에 교회도 한 동안 담임목사 없이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속수무책 상태였던 교회를 돕기 위해 찾아온 것은 신사참배 반대로 옥살이를 하다 해방과 함께 출옥한 여수 애양원교회의 손양원 목사와 고흥 길두교회 오석주 목사 등이었다.

소록도교회 재건작업에 들어간 이들은 당시 고흥읍교회를 담임하던 김정복 목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미 65세의 나이였던 김정복 목사에게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인생의 마지막을 하나님 영광을 위해 드리자’는 마음으로 소록도로 사역지를 옮겨왔다.

소록도교회 100주년을 맞아 중앙교회에서 열린 기념예배.
소록도교회 100주년을 맞아 중앙교회에서 열린 기념예배.

이후 장로교 총회로 소속을 정한 소록도교회들은 성도들에게 장로교 헌법을 교육하고, 공동의회를 통해 장로 8명을 선출하면서 조직교회의 면모를 갖추어갔다. 1946년 6월 12일에는 ‘대한예수장로교회 소록리교회’의 역사적인 첫 당회가 열리기도 했다.

소록도교회와 한센인 선교 부흥의 기틀을 놓은 김두영 목사의 공적비.
소록도교회와 한센인 선교 부흥의 기틀을 놓은 김두영 목사의 공적비.

이후 6·25 전쟁 중 김정복 목사의 순교, 한국인 병원장의 탄압정책으로 1954년에 발생한 4·6사건 등 여러 고비들이 남아있었지만 소록도교회 교회들은 인내와 소망으로 이를 극복하고 지금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김정복 목사의 후임으로 고대작 지익풍 이덕길 여운원 김두영 박창훈 김명환 박주천 목사 등이 이들 교회의 강단을 지켰으며, 현재는 제10대 김선호 목사가 담임목사로 재직 중이다.

소록도교회 성도들의 순수한 신앙과 나라사랑의 마음은 여전하다. 사진은 소록도교회 연합찬양대가 찬양하는 모습.
소록도교회 성도들의 순수한 신앙과 나라사랑의 마음은 여전하다. 사진은 소록도교회 연합찬양대가 찬양하는 모습.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2001년 김정복 목사를 순교자 명부에 등재한데 이어, 2019년에는 소록도교회들을 한국기독교 역사사적지 제12호와 순교사적지 제3호로 지정해 그 발자취를 기렸다. 소록도교회의 더 자세한 이야기들은 2019년 발간된 <소록도교회사>와 김남식 목사의 저서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소록도 순교자 김정복 목사의 삶>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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