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희 목사(낙도선교회 대표)

복음 요청하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간 선교사들, 마침내 땅 끝에

총신 졸업 후 20여 년 동안 낙도선교회를 섬기며, 사람이 살고 있는 국내 436개 섬을 복음화하고 낙도와 오지의 교회들을 건강하게 세우는 일에 헌신해왔다. 한편으로는 미얀마 선교사들을 도와 음악대학을 운영하며 빈민선교에도 힘쓰는 중이다. 저서로는 <교회 하나만 주고 가이소> <책 읽기에서 선교를 만나다> 등이 있으며, 섬선교 역사를 다루는 신작도 준비하고 있다.

낙도사역을 하다 설립한 지 120년 이상 된 섬 교회를 만난 일이 있다. 궁금증이 생겨 알아보니 한국선교 초창기의 선교사들을 배를 타고 한국에 와서는, 다시 배를 타고 한국의 섬들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들은 왜 우리 민족의 땅 끝, 섬으로 찾아간 것일까?

선교사들의 땅 끝 영성

미국의 대각성운동과 대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은 한국의 섬들을 품고 있었다. 한국에 온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이 운동들의 영향을 받아 파송된 선교사들이었다. 한국선교와 두 운동 사이의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다.

미국의 제3차 대각성운동은 1886년 드와이트 무디(Dwight Lyman Moody)에 의해 매사추세츠에서 개최된 헬몬산 수련회를 통해 100명의 대학생을 중심으로 태동되었다. 무디는 이미 그전에도 1882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집회를 통해 ‘케임브리지 7인 선교사’를 일으켰다. 1806년부터는 미국 윌리엄즈 대학에서 사무엘 밀즈를 중심으로 한 건초더미기도회를 통해서 해외선교에 대한 성령의 일하심이 진행되고 있었다.

또한 대학생자원운동의 전신인 미국의 전국신학생대회가 1833년에 미국 코네티컷주 하트포드(Hartford)에서 개최되었고, 이 대회 참석자 중에는 1885년 한국에 최초로 파송 받은 언더우드(Horance G. Underwood)와 아펜젤러(Henry Appenzeller)가 있었다.

언더우드는 호남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호남은 우리나라의 섬 대부분(2100개)이 몰려있는 지역이다. 호남지역 선교를 담당한 것은 미국남장로교 선교사들이었는데, 이들이 조선으로 오도록 동기를 부여한 인물이 바로 언더우드였다. 본인은 미국북장로교 소속이었던 언더우드는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조선에 도착했을 때, 자신의 집을 숙소로 내어줄 정도로 적극 협력했다.

언더우드, 아펜젤러, 그리고 미국남장로교 선교사들에게까지 영향을 준 대각성운동과 대학생자원운동의 핵심 가치는 두 가지였다. 첫째로 “모두가 가야 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가야 한다.”(All should go, and go to all)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선교자원이 되어야 하며, 복음을 필요로 하거나 요청하는 곳은 어디든지 가야 한다는 선교 가치(‘소명의 전환’이라고도 부른다)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둘째는 “우리 세대 내에 세계복음화”(The Evan-gelization of the world in this generation)였다. 이는 선교사들의 당대에 주님의 지상명령을 완성하려는 열정으로, 그곳이 어디든 ‘땅 끝’을 향한 마음을 품게 했다.

한국선교 초기에 섬으로 들어가 사역한 선교사들의 행로를 보여주는 지도. 선교사들은 우리 민족이 사는 길은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민족이 되는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한반도의 땅 끝인 낙도와 오지로 찾아가 복음을 전했다.
한국선교 초기에 섬으로 들어가 사역한 선교사들의 행로를 보여주는 지도. 선교사들은 우리 민족이 사는 길은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민족이 되는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한반도의 땅 끝인 낙도와 오지로 찾아가 복음을 전했다.

복음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한국은 그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은 나라였다. 미국 북장로교와 남장로교 선교사들 뿐 아니라 한국선교 초창기의 여정을 함께 한 호주 출신 선교사들도 대학생자원운동의 영향을 받은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경남 통영의 섬들로 찾아간 로버트 달링 왓슨, 울릉도에 들어간 제임스 노블 맥켄지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복음을 들고 어디든지 갔다. “복음의 요청이 있을 경우에는 제아무리 멀고 깊은 심산유곡이라 할지라도 어떤 선교사에 의해 즉각 응답되었다”는 클라크 선교사의 보고에서 당시의 정신이 드러난다. 그런 특징은 순회선교라는 형태로도 나타났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물론 전킨, 서서평, 오웬, 아담스 등 초기 선교사들 중에서는 순회선교를 하지 않은 인물을 찾는 것이 오히려 더 어렵다.

그리고 이 순회선교의 종착점인 한반도의 땅 끝, 바로 섬이었다. 각자의 거점에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해 어느 정도 성장이 이루어진 것을 확인한 이들 선교사는 조선인들에게 교회를 맡기고, 땅 끝을 향해 머나먼 순례의 길을 떠나기 마다치 않았다. 그들은 말을 타고 배를 타고 한국의 끝을 향하여 나아갔다. 그게 바로 모든 사람에게 가야 하고, 자신의 세대 안에 선교를 성취하자는 학생자원운동의 정신이었다.

이들이 보여준 선교사역의 또 다른 특징은 복음전파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의료선교사는 위대한 의사이신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복음전파를 해야 하며, 교육선교사는 인간이 결코 가르치지 못하는 것들을 가르치시는 우리의 참 교사 그리스도를 드러내야 하며, 농업선교사들도 모든 열매의 결실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가르쳐야 한다.

한국의 초기 선교사들도 의료 교육 성경번역 등 수 많은 사역을 했지만, 그 지향점은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이었다. 맥컬리 선교사는 병원과 학교를 설립하다 비금도로 들어갔고, 맥킨지나 아담스는 한센환우를 돌보는 의료선교사로 사역하다 각각 울릉도와 욕지도로 향했다. 조선 땅에 간호사로 들어와 이일학교를 세운 서서평의 마지막 사역은 제주도에서의 사경회였다.

각자의 전문영역에서 하나님나라를 세우면서도, 그들은 땅 끝을 향한 직접전도를 놓치지 않았다. 전문인선교도 궁극적인 완성은 영혼구원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그들은 대각성운동과 대학생자원운동을 통해 체득하고 있었다.

낙도의 영혼도 예수를 믿어야

선교사들은 한국을 살리는 가장 절대적인 요소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민족이 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스도는 미국과 영국에서 영적대부흥을 경험하며 그리스도만이 민족을 살리는 길이라고 확신했다. 

이런 생각들을 원칙으로 삼으며 선교사들은 각자 선교스테이션을 중심으로 사역했다. 호남에는 군산 전주 목포 광주 순천에, 경남에는 부산 진주 마산 통영 거창에 선교스테이션이 세워졌다. 각각의 선교스테이션에는 기본적으로 교회 학교 병원 그리고 선교사들의 사택이 있었다. 이곳을 거점 삼아서 선교사들은 끊임없이 순례선교를 다녔으며, 그 종착점은 낙도와 오지였다.

순례선교 중에 복음의 핵심지역이 발견되면 그곳에 다시 선교스테이션을 만들고, 그곳을 거점삼아 또 다른 순례선교를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회심한 조선인들이 생기면 선교스테이션에 설립한 정식학교나 달성경학교를 통해 교회의 전도자로, 지도자로 세웠다. 그렇게 세워진 이들도 선교팀에 동참시켜 함께 땅 끝 낙도로 나아갔다.

그리고 낙도선교는 선교스테이션에 영성을 흘려보내는 원동력이 되었다. 중심은 땅 끝을 살렸고, 땅 끝은 중심을 세웠다. 이 둘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 속에서 선교전략을 구사하고, 선교와 목회의 영성을 형성해갔다.

초기 선교사들의 땅 끝 영성은 평양대부흥운동을 거쳐 다시 땅 끝 선교의 동력을 만들어주었으며, 1970년대 엑스폴로74와 1980년대 선교한국을 통해 계승되며 학생 선교자원들을 태동시켜 땅 끝으로 나아가도록 했다.
초기 선교사들의 섬 선교행전을 박도삼 등 당시의 한국인 권서인들이 이어받고 등대선교회를 출범시켰던 것처럼, 총신대에서도 1970년대 농촌으로 하계봉사를 떠난 학생들을 중심으로 1982년부터 낙도선교 운동이 시작되었다. 섬에서 열리는 5일 장터에서 복음을 전하면 수백 명이 모이고 결신도 이루어졌다. 결신자 수가 한 해 1000~2000명에 이르렀다.

이 선교운동은 차츰 총신대학교와 총신신학대학원은 물론 칼빈대, 어린이선교신학교, 고신대, 대신대 등 여러 학교에서 참여하면서 신학생들이 연합하는 선교운동이 되었다. 섬 선교를 통해 신학생들에게는 자연스럽게 ‘땅 끝 영성’이 형성됐다. 지금까지 37년 동안 1만 6000여 명의 신학생들이 여름과 겨울방학 기간에 낙도 단기선교에 참여했고, 오늘날 담임목사로 혹은 해외선교사로 사역하면서 땅 끝의 영성을 발휘하는 중이다.

나가는 글

복음이 필요한 곳, 복음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 간다. 그게 바로 선교사들이 섬으로 간 이유였다. 마땅하지 않은가? 복음을 가진 자들의 당연한 순종이었던 것이다.

120년 전 낙도에 세워진 교회를 보며, 왜 선교사들이 섬에 갔는지를 묻는 질문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마땅한 것을 묻고 있는 우리 자신을 이제는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시선은 마땅히 땅 끝이어야 한다. 한반도의 섬들을 땅 끝으로 삼았던 선교사들의 모습처럼 말이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