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품고 조국 품으며 자신의 인생을 던진 양림동산의 선구자들

기독교신앙을 기반으로 한 다채로운 사상과 문화를 꽃피운 광주 양림동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양림동인물 100> 표지.
기독교신앙을 기반으로 한 다채로운 사상과 문화를 꽃피운 광주 양림동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양림동인물 100> 표지.

‘선교역사마을’ ‘펭귄마을’ ‘호랑가시나무언덕’ ‘만세운동길’ 등 깊은 역사가 배이고 다채로운 문화들이 공존하는 곳이 광주 양림동이다.

기독교복음과 함께 서구문물이 이 지역에서 가장 먼저 유입되면서 여러 문명과 사상이 때로 충돌하다 조화를 이루어가는 과정에 이런저런 사건도 많았고, 더불어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된 동네이기도 하다.

양림동 일대 기독교 문화유산들을 탐방객들에게 안내하는 투어를 비롯해 갖가지 선교·문화사역을 전개하고 있는 양림선교동산이 이 동네에서 나고 자랐거나, 이 동네를 찾아와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인물들을 선정해 최근 <양림동인물 100>이라는 한 권의 책으로 내놓았다.

양림선교동산 대표 최용남 목사가 집필하고, 동화작가 박에스더 씨가 각 인물들의 캐리커처를 담당해 제작한 <양림동인물 100>에는 유서 깊은 이 마을 출신의 역사적 인물들을 시작으로 사회교육문화분야, 독립운동가, 선교사, 병원학교교회분야 등 5개 부문에 걸쳐 각자 뜻을 펼치고 인생을 빛낸 수많은 이름들이 망라되어 있다.

전남선교의 개척자인 유진 벨 선교사, 광주가 낳은 첫 번째 한국인 목사이자 사회사업가인 오방 최흥종 목사, 기독여성운동의 선구자이자 독립운동에 앞장선 김마리아, 한반도를 넘어 중국에서까지 음악적인 명성을 떨친 작곡가 정율성, 만세운동의 불꽃이자 순교자로서 생을 마친 윤형숙 전도사,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라는 구절로 수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린 시인 김현승 등이 양림동에서 자랑하는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양림교회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 광주기독병원 등을 중심으로 꽃피운 기독교세계관이라는 자양분을 먹고 자란 인물들로서, 복음의 향기를 기독교공동체 안에서 뿐 아니라 자신들이 속한 시대와 사회 전체에 퍼뜨리며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한 공통점이 있다.

앞서 양림동주민자치위원회 등 15개 단체로 구성된 ‘양림동마을공동체’에서 자체 발간한 <양림동 인문학지>를 통해 85명의 인물을 간추려 소개한 바 있는데, 양림선교동산에서는 여기에 추가 조정을 거쳐 100명의 이야기를 완성한 것이다.

<양림동인물 100>을 집필한 최용남 목사(오른쪽)와 캐리커처를 담당한 박에스더 작가.
<양림동인물 100>을 집필한 최용남 목사(오른쪽)와 캐리커처를 담당한 박에스더 작가.

최용남 목사는 “양림동에서 살다간 수많은 분들이 각각 퍼즐조각처럼 이루어낸 스토리들은 가슴 벅차고 감동적”이라면서 “이분들의 생애를 널리 알릴 수 있도록 도움 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리며 책에서 소개한 인물들에 대해 앞으로도 더 깊은 연구를 해나갈 계획”이라고 밝힌다.

박에스더 씨는 “되도록 각 인물들의 특징을 살린 캐리커처로 이 책에 대한 독자들의 친밀감을 더해보고자 노력했다”면서 “일부는 사진 등 관련 자료들을 구할 수 없어 작업을 다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한다.

비매품으로 1차 출간된 <양림동인물 100>은 각 인물들의 사적에 대한 내용들을 보강하고, 한글과 병기한 영문 내용도 수정한 개정판으로 조만간 정식 출시될 예정이다.

[<양림동인물 100>에 소개된 기독인들]

▲최흥종 목사(1880~1966)

호는 오방. 1909년 광주 제중병원에서 근무하며 선교사들을 도와 한센병 환자 치료에 헌신했으며, 1919년 3·1운동 때는 김철과 함께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감 후 평양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광주 북문밖교회를 설립했고, 광주YMCA 창립을 주도했으며, 시베리아 선교사로도 활동했다. 광복 후에는 결핵환자과 한센병환자 등을 위해 광주나병원 삼애학원 송등원 무등원 등을 설립하고 별세할 때까지 이 땅의 약자들을 위한 사회복지활동을 전개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됐다.

 

▲남궁혁 교수(1881~?)

서울에서 태어나 배재학당을 졸업한 후, 1909년 광주숭일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광주북문안교회 제2대 장로로 취임해 사역하다, 1917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해 신학자로서 삶을 시작했다. 3·1운동 당시에는 자신의 집을 광주만세운동 모의장소로 제공했다가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평양신학교 교수로 임용되어 <신학지남> 편집장 등으로 활약했다. 1932년 장로교 제21대 총회장으로 선출됐으며, 신사참배 문제로 평양신학교가 폐교한 후에는 중국 상해에서 망명생활을 했다. 6·25 당시 공산군에게 납북 후 행방불명됐다.

 

▲김필례 선생(1892~1983)

황해도 장연 출신으로 1915년 일본 동경에서 유학한 후 모교인 정신여학교와 광주여성여학 교사로 지내던 중, 1919년 조카인 김마리아가 동경에서 반입해 온 2·8독립선언문을 광주의 자택에서 복사해 서울로 보내는 등 3·1운동의 도화선을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22년에는 김활란 유각경 등과 함께 한국YWCA를 창설하고 초대 총무를 맡아 한국기독여성운동계를 이끌었으며, 정신여중과 광주수피아여중고 교장 등으로 평생 여성교육에 헌신했다. 1950년에는 전국여전도회연합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1972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했다.

 

▲윤형숙 전도사(1900~1950)

여수에서 태어나 광주 수피아여고에 재학하던 중, 3·1운동이 광주에서도 일어나자 선두에서 시위를 벌였다. 만세시위 중 일본 헌병대의 칼에 의해 오른팔이 잘렸으나, 다시 일어나 왼팔로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더욱 크게 외치며 군중들을 선도했다. 중상을 입은 상태로 체포되어 4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후 신학교를 나와 여수제일교회 전도사로 사역하던 중, 6·25 발발로 남침한 인민군들에 의해 손양원 목사 등과 함께 순교했다. 2004년 건국포장이 추서됐다.

 

 

▲조아라 선생(1912~2003)

호는 소심당, 나주 출신으로 1927년 수피아여학교에 입학해 김필례의 지도를 받으며 학생운동가로 활동했다. 1936년 수피아여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될 당시 동창회장을 지내다, 일제에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 광주부인회와 광주YWCA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1980년 광주항쟁 당시에는 계엄법 위반으로 신군부에 의해 또다시 옥고를 겪었으며, 출감 후에도 부상자 치료와 사망자 수습에 앞장서며 ‘광주의 어머니’로 추앙받았다. 2003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상했다.

 

▲김현승 시인(1913~1975)

호는 다형. 호남 출신 최초로 목사가 된 김창국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목회지를 따라 제주를 거쳐 광주로 이사한 후 양림동에서 성장했다. 숭실대 졸업 후 모교인 광주 숭일학교로 돌아와 교사생활을 시작했으며, 조선대학교 교수로도 활동했다. 특히 대학 시절 등단해 시인으로 활동하면서 ‘가을의 기도’ ‘눈물’ 등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작품들을 발표했다. 1953년부터 광주에서 계간지 <신문학>을 간행하기도 했다. 광주 무등산과 양림동에는 이를 기리는 시비(詩碑)가 세워져있다.

 

▲김준곤 목사(1925~2009)

전남 신안 출신으로 남산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남노회에서 안수를 받은 후 광주 숭일학교 교장과 교목을 지냈으며, 양림교회 임시당회장을 맡기도 했다. 6·25 중에는 가족들이 좌익세력에 학살당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1958년 한국대학생선교회(CCC)를 창설해 왕성한 청년선교 활동을 펼치며 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1966년에는 국가조찬기도회를 결성하고, 1974년에는 여의도 엑스폴로74 집회 준비위원장으로서 현대 한국교회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기도 했다. 2002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했다.

 

 

▲허진득 원장(1931~2012)

전남 진도에서 화가 허백련 선생의 차남으로 태어나, 전남대 의대를 졸업하고 1967년 광주기독병원에 들어가 30년 동안 양림동에 거주하며 의사로 활동했다. 한국인 최초로 광주기독병원장으로 취임해 병원 발전에 크게 공헌했으며, 특히 1980년 광주항쟁 당시에는 밀려드는 부상자들을 적극적이고 효율적으로 대처해 치료하며 칭송을 받기도 했다. 또한 광주전남 일대 의료사각지대에 의료진들을 파견하고 지속적인 의료봉사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동신대 이사장으로서 인재양성에 앞장서면서 청렴한 삶의 모범을 보여준 인물이기도 하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