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창기 군산선교역사와 관련된 여러 유적과 유물들. 옛 영명학교 건물을 재현한 군산3·1운동기념관.
초창기 군산선교역사와 관련된 여러 유적과 유물들. 옛 영명학교 건물을 재현한 군산3·1운동기념관.

선교사가 세운 학교, 신사참배 반대 ‘일등공신’

격동기 군산 찾아든 복음 영향력 다각도 조명…애국신앙만세운동 앞장
동학혁명 세력과도 충돌·협력 과정 거쳐 우리 겨레 역사에 깊숙이 개입

군산지역 초기 선교사의 활동 및 역사에 대해 탐구하는 세미나가 11월 25일 군산 근대역사관 장미공연장에서 열렸다.

전킨기념사업회(이사장:장철희 목사)가 주관하고 군산근대역사박물관(관장:김중규)이 주최한 이날 세미나는 동학농민운동 한일병탄 3·1만세운동으로 이어지는 격동기의 군산에서 개신교 선교사들과 기독인들의 활동상은 어떠했으며,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남겼는지 조명했다.

군산선교 개척자인 전킨과 드류 선교사를 태우고 가는 황포돛배 복음선.
군산선교 개척자인 전킨과 드류 선교사를 태우고 가는 황포돛배 복음선.

주제발표로는 송현강 교수(한남대학교)의 ‘군산의 교육선교 역사’, 전병호 목사(전킨기념사업회 전 이사장·나운복음교회)의 ‘동학혁명과 전킨 선교사’, 서종표 목사(전킨기념사업회 추진위원장·중동교회)의 ‘초기 선교사의 역사와 유물 소개’ 등이 이어졌다. 또한 정상호 원장(군산문화원)과 주명준 명예교수(전주대학교)가 토론자로 참여했다.

송현강 교수는 미국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세운 영명학교(현 군산제일고)와 멜볼딘여학교(현 군산영광여고)의 1902년 설립 무렵부터 1940년까지의 상황을 시대별로 살펴보았다. 특히 두 학교가 주도한 군산 3·5만세운동과 신사참배 반대 등의 항일활동을 깊이 다루었다.

전병호 목사는 군산선교의 개척기에 서양선교사인 윌리엄 전킨(한국명 전위렴)과 당시 전북지역을 중심으로 맹위를 떨치던 동학세력이 서로에게 어떤 영향력을 미쳤는지를 살펴보았다. 이와 관련해 전킨 선교사가 남긴 기록물의 내용을 살펴보며, 당시 상황을 재구성하는 과정도 몹시 흥미로웠다.

미국남장로교 선교사들의 군산 첫 기착지였던 수덕산의 선교기념비.
미국남장로교 선교사들의 군산 첫 기착지였던 수덕산의 선교기념비.

서종표 목사는 초창기 선교사들의 면면과 그들이 이 땅을 위해 남긴 업적들을 소개했다. 전킨과 어다머 드류(한국명 유대모) 외에도 의료선교사 알렉산더(한국명 안력산) 레이놀즈(한국명 이눌서) 윌리엄 불(한국명 부위렴) 리니 데이비스 등과 한국인 쌍천 이영춘 박사 등의 인물들이 다루어졌다.

이번 행사를 공동 주최한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은 실제로 전킨과 드류가 군산에 첫 발을 내딛은 자리에 세워져 있으며, 옛 미국남장로교 군산선교부 자리인 구암동산의 군산3·1운동기념관도 함께 운영하는 등 군산의 기독교 역사와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다.

전킨기념사업회 이사장 장철희 목사는 “군산근대역사박물관과 함께 초기 선교사들의 활동을 고찰하고, 이분들이 군산 복음화와 근대화에 큰 영향을 끼친 부분을 학문적으로 규명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밝혔다.

군산지역 초기 선교사의 활동 및 역사 세미나 요지

■군산의 교육선교 역사-영명학교와 멜볼딘여학교를 중심으로(송현강 교수·한남대)

송현강 교수(한남대)
송현강 교수(한남대)

1902년 윌리엄 전킨 선교사에 의해 군산남학교(영명)가, 이듬해인 1903년에는 여선교사 프레디리카 스트래퍼에 의해 여학교(멜볼딘)가 각각 문을 열었다. 이후 미국남장로교 군산스테이션에서 직영한 이들 남녀학교는 지역 최초의 근대식 학교로서 1940년 폐교할 때까지 민족복음화와 근대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영명과 멜볼딘의 민족운동은 김인전 박연세 문용기 고석주 등 우국지사격인 교사들의 가르침이 그 배경이 되었다. 교사들 대부분은 신앙을 통해 시대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단 전형적인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이었다. 그리고 그 항일정신은 영명과 멜볼딘의 학생들에게 충분히 계승·고취되었을 것이다.

호남 최초의 3·1운동은 바로 군산에서 일어났다. 멜볼딘여학교에서는 비밀리에 태극기를 그렸고, 영명학교 지하실에서는 독립선언문을 등사하였다. 두 학교는 3·1운동 이후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최종적으로 박연세 등 교사 4명이 징역 1년 6개월에서 3년의 실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으며, 양기철 등 학생 11명이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36년부터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심해지자 남장로교 선교부는 이 문제에 대해 가장 강경한 입장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모든 남장로교 계통 미션스쿨이 잇달아 폐교를 선택했다. 영명학교 역시 고등과는 1938년 문을 닫았고, 보통과는 1940년 10월 폐교되었다. 멜볼딘은 1940년 10월 8일 선교사들이 전격적으로 철수하면서 폐쇄되었다.

■군산의 동학농민혁명과 전킨 선교사 (전병호 목사·나운복음교회)

전병호 목사(나운복음교회)
전병호 목사(나운복음교회)

전킨 선교사는 <The Korean Repository>라는 영문잡지 1895년 2월호에 ‘동학’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다. 그는 당시 조선에 체류 중인 선교사들에게 동학에 대한 개론적 이해를 돕고자 이 글을 서술하였다. 

1896년 군산선교부 가동을 시작한 전킨은 동학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김제지방의 선교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다. 송지동교회를 비롯해 월성리교회 대창교회 입석리교회 봉월리교회 등을 세우는데 열심을 다하였다. 관군의 추격과 감시를 피하여 많은 동학농민들이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월천면 동학접주 김국현은 자신의 4칸짜리 집을 기도처로 삼아달라고 전킨에게 요청하였고, 이렇게 하여 입석리교회가 설립됐다.

갑오경장 이후 동학도들은 상투를 자르는 등 개혁을 선도했는데, 이에 당국은 상투 자른 자들은 동학교도들이니 무조건 잡아들이라고 공포했다. 그러나 동학교도들이 불심검문에 걸려도 기독교인이라 말하면 모두 방면하였다. 상투 자른 기독교인들까지 검문하여 강제로 잡아가는 것을 전킨 선교사가 관청에 찾아가 강하게 항의함으로 방면받게 한 것이 소문났던 때문이다.

미국 남북전쟁의 격전지 버지니아 출신이었던 전킨은 전쟁의 참담함과 패배자들의 절망과 분노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선교지인 호남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깊었고, 그들의 자유와 정의를 향한 열망에 깊이 동감했다. 그 결과 전킨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교회에 찾아와서 신실한 교인으로, 후에 한국기독교의 지도자들이 된 동학인들도 상당수에 이르렀다.

■초기 선교사의 역사와 유물 소개 (서종표 목사·중동교회)

서종표 목사(중동교회)
서종표 목사(중동교회)

윌리엄 전킨(1865 ~1908)은 1895년 3월 드류 선교사와 함께 군산 수덕산 기슭에 초가 두 채를 매입하여 의료선교활동을 펼친다. 군산이 개항하는 해(1899년) 지금의 구암동산인 궁멀로 이주해 선교스테이션을 세운다. 병원 학교 교회설립 등 선교활동을 활발히 펼치는 중 아들 셋을 잃는 아픔도 겪는다. 궁멀 습지대에 살면서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고 설교에 열정을 다하다 1904년 몸져누웠다. 휴양하라는 선교부 결정에 따라 군산을 떠나 전주로 간다. 전주에서도 활동을 멈추지 않았던 그는 1908년 1월 2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어다모 드류(1895~1924)는 군산에 애착이 강했다. 마을이 아름답기도 했지만, 서울에서 선박으로 접근이 쉬운 항구도시였기 때문이다. 그의 고향 버지니아 노포크가 바닷가였고, 군산 지형과 비슷한 점도 작용했으리라 짐작된다. 그의 군산에 대한 애착은 몇 년 후 선교사들이 군산선교부를 폐쇄하고 나주선교부를 열고자 하자, 끝까지 반대하여 군산선교부를 지켜낸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는 군산선교부가 호남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개척정신을 발휘했고, 1901년 미국으로 돌아가서도 샌프란시스코 항만검역관으로 일하며 조선인 선교사역을 담당했다.

알렉산더(1875~1929)는 의료선교사로 자원하여 군산에 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부임 2개월도 채 되지 않아 부친의 별세소식을 듣고 귀국했다. 대신 군산선교에 빚진 마음을 가지고 청년 오긍선을 미국으로 초청해 의과대학을 졸업시켰다. 오긍선은 한국인 서양의사면허 1호가 되어 1907년 한국으로 돌아와 세브란스병원 최초로 한국인 의사가 됐다. 뿐만 아니라 알렉산더는 호남선교 1년 예산의 2/3에 해당하는 기부금을 보냈으며, 구암병원 2채를 기와집으로 지어주었다. 순천에는 알렉산더병원을, 목포에는 영흥학교 건물을 세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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