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매산학교 구례인기념관에서 열린 순천노회 주일학교대회.
1925년 매산학교 구례인기념관에서 열린 순천노회 주일학교대회.

진리가 아닌 것과 타협하지 않는 불굴의 신앙으로 백년 세월 이어와

전남동부권 교회들을 관할하는 순천노회(노회장:박선홍 목사)가 역사적인 100주년을 맞았다. 특히 3년여에 걸친 분쟁에 극적으로 마침표를 찍고, 화합하는 분위기 속에서 맞이한 100주년이라 그 의미가 더욱 깊다.

순천노회의 탄생 배경에는 미국남장로교 소속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사역과, 1913년 개설된 순천선교부의 눈부신 활동들이 자리하고 있다.

순천노회 뿌리 역할을 한 순천선교부 초창기의 핵심 인물인 변요한 선교사.
순천노회 뿌리 역할을 한 순천선교부 초창기의 핵심 인물인 변요한 선교사.

1900년대 초 전남지역 선교가 본격화할 무렵 순천지역은 광주선교부의 클레멘트 오웬(한국명 오기원) 선교사에게 맡겨졌다. 하지만 오웬 선교사가 1909년 과로로 인한 급성폐렴으로 숨지자, 그 임무를 존 페어맨 프레스톤(한국명 변요한)과 유진 벨(한국명 배유지)이 대신하며 순천 광양 여수 구례 곡성 보성 고흥 등 각지에 복음을 전파했다.

특히 순천선교부가 개설될 무렵 부임한 로버트 코이트(한국명 고라복) 존 크레인(한국명 구례인) 등은 충성스러운 섬김으로 한국인들에게 깊은 감동을 일으켰다. 코이트 선교사의 경우는 두 아들을 풍토병으로 잃는 시련 속에서도 끝까지 사명을 감당하며, 매산학교와 알렉산더병원 등 순천선교부의 사역에 기틀을 놓는데 최선을 다했다.

순천노회가 복음 사역자들의 양성기관으로 세운 순천성서신학원의 1938년 풍경.
순천노회가 복음 사역자들의 양성기관으로 세운 순천성서신학원의 1938년 풍경.

덕분에 순천선교부 개설 3년만인 1916년에 이르면 이 지역 세례교인수가 581명에서 1172명으로 2배 가까이 늘어나고, 전체 교인수도 1549명에서 2507명으로 증가하는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였다.

한편으로 한국인 성도들이 보여준 자발적인 열심들도 이 지역 최초의 교회들이 자리 잡고 성장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만주 망명길에 올랐다가 복음을 듣고 회심한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세운 여수 장천교회, 선교사의 조사로 활동했던 한국인의 전도가 결실을 맺어 설립된 순천 무만동교회,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나비효과를 일으켜 세워진 광양 웅동교회 등이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이밖에도 순천중앙교회, 광양 신황교회, 고흥 신흥리교회, 광양읍교회, 구례읍교회, 여수 우학리교회 등이 각지에서 일어나 전남 동부권을 복음의 땅으로 만들었다. 전남노회로부터 분립할 무렵에는 무려 40여 교회가 세워져있었다.

순천노회원들이 기후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며 제103회 총회에서 환경캠페인을 전개하는 모습.
순천노회원들이 기후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며 제103회 총회에서 환경캠페인을 전개하는 모습.

이런 탄탄한 기반 속에서 순천노회는 1922년 제11회 총회에서 설립 허락을 받는다. 그리고 그해 10월 3일 순천남성경학교에서 선교사 2명, 목사 4명, 장로 12명 등 18명이 모여 정식으로 노회를 조직한다. 초대 노회장은 순천중앙교회 곽우영 목사, 부노회장은 변요한 선교사, 서기는 강병담 목사였다.

순천노회는 설립 초창기부터 제주도 선교의 주역으로 나서고, 곡성지역에서 전도사업을 집중 전개하는 등 복음의 지경을 넓히는데 힘을 기울였다. 한편으로는 산하 교회 성도들의 신앙을 철저하게 관리하기 위해 엄격한 규율을 적용하기도 했다. 주일을 무단히 범하는 자에게는 책벌하고 직분도 거두도록한 제11회 정기회의 결의와, 교인의 가정에서 혼례나 상례를 행할 때 절대 금주하도록 한 제12회 정기회의 결의 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순천노회원들은 더욱 복음을 위한 사명에 매진하고, 신앙의 도리와 맞지 않는 일에는 결코 타협하지 않는 자세를 확립했다. 그렇게 축적한 저력들은 위기의 순간에도 목숨을 내놓고 진리를 사수하는 모습으로 발휘됐다.

순천노회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해 여수 애양원에 조성된 추모공원.
순천노회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해 여수 애양원에 조성된 추모공원.

일제의 강압 속에서 1938년 제27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이후 순천노회원들은 참혹한 시련을 감내해야 했다. 비록 순천노회도 공식적으로는 신사참배를 결의했지만, 정작 노회원들은 총회총대로도 참석하지 않은 채, 독자적인 반대운동을 벌였다.

이 때문에 1940년 일제의 검속으로 애양원교회 손양원 목사, 순천중앙교회 박용희 목사와 황두연 장로 등 무려 17명의 목사장로들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특히 구례읍교회를 시무하던 양용근 목사는 옥중에서 숨지고, 평양신학교 1회 출신의 한국교회 최초의 목사이자 제10대 총회장을 지냈던 이기풍 목사(당시 우학리교회 시무)도 수감 중에 생긴 병으로 목숨을 잃는다.

이렇게 시작된 순천노회원들의 순교 행렬은 해방 후까지 이어진다. 1948년 발발한 여순사태의 와중에 영흥교회 김병준 장로, 애양원교회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 동인 동신 등 여러 교회 지도자와 성도들이 좌익세력들에게 생명을 빼앗긴다. 손양원 목사 역시 2년 후 6·25 전쟁의 와중에 인민군의 총격으로 순교하고, 조상학 김정복 이선용 안덕윤 목사도 같은 길을 걷는다.

당시로서는 순천노회에 엄청난 아픔이자 손실이었지만, 이들이 흘린 피는 순천노회에 신앙의 뿌리를 둔 이들에게는 평생의 긍지이자 자산이 되었기 때문이다. 순천노회 산하 교회들, 매산학교와 매산여학교, 순천성서신학원 등에서 배출된 수많은 믿음의 후예들이 그 증거이다.

순천노회 100주년을 맞이해 화합예배를 열고 있는 순천노회원들.
순천노회 100주년을 맞이해 화합예배를 열고 있는 순천노회원들.

이후 장로교회의 거듭된 분열기 동안 순천노회는 여러 차례 헤어짐의 아픔을 겪으며, 교세가 크게 약화된 시절을 견뎌야 했다. 하지만 1979년 떠나보냈던 예장개혁 순천노회가 2005년 교단 합동과 함께 다시 한 가족이 되면서 예전의 위상을 되찾았다. 교세 확장으로 여수노회 고흥보성노회 등을 분립하고서도, 전남지역에서는 목포제일노회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규모를 보유하고 있다.

현재 순천노회에는 97개 교회, 51개 당회가 몸담고 있다. 순천시찰 남부시찰 동부시찰 광양시찰 동광양시찰 구곡시찰 등 6개 시찰에, 구례중앙교회 광양읍교회 벌교성산교회 순천가곡교회 웅동교회 등 100년 넘는 역사를 가진 대표적 교회들도 건재하다.

특히 환경부를 노회 상비부로 조직하고 지역교회들이 기후위기 대응에 앞장서는 한편, 총회 차원에서 지구촌 생태문제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며 일회용품 사용을 최소화하는 ‘환경총회’를 시도할 수 있도록 캠페인을 전개하는 등 전국교회에 선한 영향력도 발휘해왔다.

비록 지난 3년 동안 노회원들 사이에 극심한 불화가 발생하기는 했지만, 순천노회는 설립 100주년을 맞은 올해 극적으로 화해를 이루고 분위기를 일신하고 있다. 8월 18일 순천 강남중앙교회에서 다시 하나의 조직으로 단일화를 이루고서 새로운 도약을 준비 중이다.

특히 백주년을 기념해 역사자료 수집과 관련 전시회 개최, 성지순례 등의 사업을 추진하는 한편 연말에는 감사예배와 학술세미나를 개최할 계획이다. 화합 무드를 더욱 공고히 하고자 전체 노회원 친교행사도 준비하고 있다.

노회장 박선홍 목사는 “지금의 순천노회가 있기까지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바른 신앙과 신학을 지키고자 애쓰며 여러 신앙선배들이 흘린 피땀이 있었다”면서 “앞으로도 하나님의 말씀을 푯대 삼아 열심히 전진하는 순천노회와 산하 교회들이 될 것”이라고 다짐한다.

역사의 교훈을 바탕으로 화합의 새 시대를 열어가자고 당부하는 순천노회장 박선홍 목사.
역사의 교훈을 바탕으로 화합의 새 시대를 열어가자고 당부하는 순천노회장 박선홍 목사.

[인터뷰] 순천노회장 박선홍 목사

“교회와 노회 발전 위해 힘 기울여야”

“우리 노회는 중대한 변곡점 위에 서있습니다.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교회와 노회의 발전을 위해 모든 힘을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기념비적인 순천노회 100주년의 노회장으로서, 그리고 길었던 분쟁을 끝내고 화합의 서막을 열어가야 하는 노회장으로서 박선홍 목사(사진)의 표정에는 결연함이 묻어났다. 아깝게 잃어버린 지난 시간들을 만회하는 노력을 서두를 것을 다짐한다.

“같은 지역에서 수십 년 동안 형제처럼 지내온 정말 평화롭고 아름다운 노회가 순천노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3년 간은 다시 생각하기 싫을 정도로 아픈 세월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서로에게 이렇게 상처를 주며 갈등했던 적이 없습니다. 앞으로 회복하기까지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극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섬기겠습니다.”

박선홍 목사는 특히 지나온 세월 속에서 해답을 찾는 ‘온고지신’의 정신을 강조한다. 믿음의 선배들의 보여준 불굴의 정신을 계승해, 지금 그리고 앞으로 닥칠 난관들을 극복해나가자는 것이다.

“순천노회는 확고한 신앙적 정체성으로 한국교회 역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겨왔습니다. 그 열심을 가지고 이 지역을 복음화율 30%의 영적 도시들로 가꾸어왔습니다. 세 차례 순천노회장을 지내고 제헌국회에서 국회의원으로 활약한 오석주 목사님처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 그리고 조국을 세워가고자 소망한 선배들의 정신을 우리도 본받아 따라가려 합니다.”

박 목사는 순천노회가 제 궤도를 찾을 수 있도록 협력해 준 여러 동역자들과 총회 임원회 등에 감사를 표하는 한편으로, 다시는 개교회에서 발생하는 분쟁 때문에 노회 전체가 뒤흔들리는 과오가 반복되지 않도록 공의롭고 신중한 교회정치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노회장으로서 전하는 당부는 이것이었다.

“쓰린 과거에 묶이지 맙시다. 더 용납하고, 더 사랑합시다.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고 생각하며, 그 정신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노회원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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