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정성과 헌신 통해 애국신앙의 표상이 된 공동체

3·1운동 앞장선 자랑스러운 역사…후대에 계승하고자 온 교회 발 벗고 나서
구암동산 성역화 작업 수십 년간 차근차근 진행, 생생한 교육현장으로 구현

어느 때보다 우렁찬 함성이 궁멀 일대를 뒤흔들었다. 1919년 3월 5일 한강 이남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군산만세운동의 주역들이 코로나19 이후 4년 만에 다시 모여 외치는 “대한독립만세!”였다. 그 선봉에는 군산구암교회(김영만 목사) 성도들이 서 있었다.

해마다 3·1절이 돌아오면 구암교회 성도들이 흰옷으로 갈아입고, 태극기를 꺼내들어 군산 시가지를 행진하며 만세운동을 재현한 지 어느 덧 30여 년이 되었다. 군산 3·5만세운동의 주역들이던 미국남장로교 군산선교부와 영명학교 멜볼딘여학교 군산예수병원 등은 이미 오래 전 궁멀(구암동산)에서 떠나고 교회만 홀로 남아 그 자리를 지키던 중이었다.

군산구암교회가 만세운동의 후예인 군산제일고, 영광여고 학생들과 함께 3·1운동 재현행사를 여는 모습.
군산구암교회가 만세운동의 후예인 군산제일고, 영광여고 학생들과 함께 3·1운동 재현행사를 여는 모습.

하지만 혼자서라도 사라져가는 군산만세운동의 기억을 되살리고, 선배들이 보여준 애국신앙의 기개를 계승하겠다는 다짐으로 구암교회 성도들은 군산삼일운동기념사업회를 결성하고 만세운동 재현행사를 시작한 것이다. 그날이 오면 비가 오던, 눈이 오던 만세행렬은 언제나 펼쳐졌다. 심지어 교회에 이런저런 시련이나 내분이 발생했을 때조차 이 행진만큼은 쉬지 않았다.

한결같이 진심이었던 구암교회의 정성은 수십 년이 지나면서 본격적으로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구암교회의 만세행진은 군산의 3·1절 공식행사가 됐고, 만세행진이 끝나면 구암교회 예배당 앞 광장에서 시민들이 다함께 모여 3·1절 기념식을 갖는 것이 관례가 됐다.

뿐만 아니었다. 예배당 하나만 덩그러니 서있던 구암동산 일대가 군산3·1운동기념공원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이다. 동산 한 가운데 구암교회 100주년 예배당이 우뚝 서고, 예배당 입구부터 꼭대기 전망대까지 군산선교부 및 3·1운동 관련 역사자료들이 전시돼 사실상 교회당 전체가 역사교육장의 역할을 감당하게 됐다.

전북지역 기독청소년들이 구암동산 일대에서 선교역사 순례캠프를 갖고 있다.
전북지역 기독청소년들이 구암동산 일대에서 선교역사 순례캠프를 갖고 있다.

또한 3·1절 기념식과 재현행사 뿐 아니라 기념예배, 어린이 백일장대회, 사진전 등 관련 행사들을 연이어 개최하면서 구암교회는 그야말로 만세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로 우뚝 섰다.

새 예배당이 건축되면서 옛 예배당은 3·1운동 기념관(현재는 영상관)으로 변모했고, 옛 영명학교 건물을 복원하여 새로운 기념관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동산 꼭대기에는 기념탑과 광장 그리고 군산선교부의 개척자인 윌리엄 전킨(한국명 전위렴) 선교사의 가족묘가 조성되었고, 그날의 함성을 떠올리게 하는 각종 조형물들이 설치되었다.

이제 구암동산은 서울의 탑골공원, 천안의 아우내장터, 대구의 청라언덕 등과 함께 명실공히 3·1운동의 대표 유적지로 발돋움해 사시사철 방문자들을 불러 모은다.

믿음의 선배들이 물려준 자랑스러운 애국신앙을 후대에 계승하는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겠다고 다짐하는 군산구암교회 김영만 목사(사진 오른쪽)와 성도들.
믿음의 선배들이 물려준 자랑스러운 애국신앙을 후대에 계승하는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겠다고 다짐하는 군산구암교회 김영만 목사(사진 오른쪽)와 성도들.

하지만 가장 큰 성과는 눈에 보이지 않는데서 나타났다. 지속적인 역사조사와 발굴 작업을 통하여 처음에는 다소 막연했던 3·5만세운동의 구체적인 상황일지가 드러났고, 이 항쟁에 앞장섰던 인물들의 면면도 상세하게 확인할 수 있게 됐다.

오랫동안 군산 만세운동을 상징했던 인물로 당시 영명학교 교사였던 문용기 열사가 부각되었으나, 사실 그는 익산 출신으로 솜리장터에서 벌어진 4·4만세운동의 주역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실제 3·5만세운동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던 박연세 목사, 김병수 장로는 물론 김윤실 교사 등 당시 영명학교와 구암교회 구성원들이 활약상이 분명하게 밝혀지면서 아쉬움을 덜 수 있게 됐다.

특히 이들 중 만세운동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영명학교 교사 이두열과 고석주, 투옥된 이들을 대신하여 시위에 앞장섰던 김수남, 그리고 이들의 독립운동을 배후에서 지원했던 선교사 윌리엄 린튼(한국명 인돈) 등 4명은 지난해 3월 국가보훈처로부터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나란히 선정되기도 했다.

내친김에 구암교회는 구암동산을 3·1운동의 역사뿐 아니라 옛 미국남장로 선교사들로부터 시작된 기독교 선교역사의 공간으로 꾸미고자 준비하고 있다. 전킨기념사업회와 협력해 군산기독교역사기념관을 옛 예배당 옆에 건립하고, 멜볼딘여학교와 군산예수병원 건물 또한 복원하여 겨레의 희망이자 동반자였던 군산선교부의 위용을 재현한다는 계획이다.

구암동산은 오랜 수고와 헌신을 통해 3·1운동의 대표 유적지로 발돋움했다.
구암동산은 오랜 수고와 헌신을 통해 3·1운동의 대표 유적지로 발돋움했다.

김영만 목사는 “많은 이들에게 이 땅의 교회가 걸어 온 참 모습을 보여주는 배움터로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믿음의 선배들이 지녔던 애국신앙을 후대들이 바르게 계승할 수 있도록 기초를 놓는데 힘쓰는 중입니다”라고 말한다.

실제로 다음세대를 향한 역사계승 작업은  이미 시작된 상태다. 지난달에는 총회기독학생면려회(SCE) 전북권역위원회와 공동으로 전북지역 16개 노회에서 청소년들을 모아 구암동산 일대를 비롯한 군산선교 유적지를 탐방하며 역사를 배우는 순례캠프를 열었다. 

특히 구암교회 김영만 목사와 성도들은 손수 강사와 해설자 역할을 맡아 학생들이 초창기 호남선교 역사와 3·1운동 당시의 발자취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열심히 섬겼다. 구암교회 교우들에게 역사란 자신들의 존재 이유이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긍심이기에, 어떤 헌신이라도 기꺼이 감당할 각오가 되어있다.

3월 1일에는 군산제일고(옛 영명학교) 영광여고(옛 멜볼딘여학교) 학생들과 함께 만세운동 재현행사를 열었고, 3월 25일에는 군산 관내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3·1운동을 주제로 한 그림· 글짓기대회도 개최한다. 대회 입상작은 5월 한 달 동안 군산3·1운동100주년기념관에서 전시할 예정이다.

역사를 가르치는 것은 단번의 작업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꾸준히, 힘들어도 뚜벅뚜벅 나아가는 시간을 통해 성취해 나가는 것이다. 그 끝에서 어떤 결실을 맛볼 수 있는지를 구암교회의 오늘이 보여준다.

역사를 가르칩시다
사람을 찾습니다

교회의 창립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지만, 교회의 설립자는 사람들입니다. 한 사람만이 아니라 여럿이서 함께 교회를 세워나갔고, 그 공동체를 지탱하기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이 수고와 희생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역사란 결국 이렇게 숱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모여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언젠가 꽤 오랜 역사를 가진 교회가 남다른 형태로 100년사를 발간하는 것을 보며 마음에 깊은 울림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모든 교회 역사가 항상 연대기적으로나 거대 담론으로만 서술될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잘 정리된 역사가 이미 존재한다면 그 교회처럼 색다른 방식을 택해보는 것도 영적 자산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가는 길이라 여겨집니다.

교회 설립일이 되면 기념예배나 임직식 헌당식 같은 큰 행사가 열리고, 어떤 교회에서는 외부전문가들을 초청해 역사세미나를 열기도 합니다. 그런 일들도 소중하지만 믿음의 선배로부터 자신이 교회를 통해 보낸 세월에 대한 이야기 한 대목을 듣는 것이, 어쩌면 그 공동체 구성원들에게는 교회의 생일을 기념하고 결속을 다지는 더 의미 있는 방식 아닐까요.

그러니 사람을 찾읍시다. 교회의 힘만으로 어려우면 향토사학자나 국가보훈처 등 기관들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희미해져버린 이름들의 남은 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숨어있던 엄청난 보화들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런 식으로 순교사적을 비롯한 엄청난 역사를 찾아내는 경우들이 적지 않습니다.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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