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희 목사(낙도선교회 대표)

남쪽 섬 진도, 믿음의 사람들 세우며 끝까지 한국 사랑한 선교사

조선으로 온 언더우드 목사는 1891년 안식년을 맞이하여 미국으로 돌아간다. 귀국 후 언더우드는 맥코믹신학교에서 신학생들에게 조선선교에 대한 도전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이를 계기로 미국남장로회 선교사 7인이 헌신하여 조선으로 온다.

‘7인의 선발대’로 불리는 이들 중 한 사람인 레이놀즈(William D. Reynolds) 목사와 의료선교사 드루(A. D. Drew)는 한국어를 가르치는 서 선생과 동행하여 자신의 선교지역을 답사한다. 1894년 3월 7일부터 5월까지 2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군산→전주→고창→영광→함평→무안→목포→우수영→진도→녹동→벌교→순천→여수→남해 등으로 이어지는 선교정탐에 나선 것이다. 특히 이 기간 레이놀즈와 드루 선교사는 각 고을을 돌며 장터에서 환자를 진료하고, 기독교 서적을 판매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따라서 진도에 복음이 맨 처음 전파된 것은 이 정탐여행의 시기인 1894년 4월경으로 추정된다.

프레스톤 선교사가 사역한 진도 일대의 선교루트 지도.
프레스톤 선교사가 사역한 진도 일대의 선교루트 지도.

첫 번째로 세운 분토리교회

레이놀즈 일행에 이어 공식적으로 진도에 처음 선교사들이 방문한 시기는 1905년이다. 그 주인공은 프레스톤(John Fairman Preston Sr·한국명 변요한) 목사와 오웬(Clement C.Owen) 목사 그리고 의사인 다니엘(T. H. Daniel) 선교사였다. 이들은 목포에서 출발하여, 해남 우수영을 거쳐, 배를 타고 울돌목을 건너 진도로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프레스톤 선교팀은 서울에서 진도로 유배 온 젊은 선비를 만나 전도했으며, 그를 중심으로 진도 분토리에서 최초로 예배모임을 가졌다. 이것이 진도 최초의 교회, 분토리교회(현 진도초대교회)의 시작이었다.

진도선교와 순천선교의 개척자인 프레스톤 선교사.
진도선교와 순천선교의 개척자인 프레스톤 선교사.

“이번 여행은 더욱 기이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섬에 발을 내딛은 첫 선교사들이었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은 우리가 접근하자마자 신속히 도망갔다. 분토와 그 근처 마을을 방문한 우리는 상부 치안판사에게 간청하여 편지로 전해진 젊은 유배자를 찾았다. 그는 서울에서 직접 가져온 중국성경을 읽고 회심한 사람이었다.”(프레스톤의 1906년 선교보고서 중)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에는 조금 다른 기록이 나온다.
“진도군 분토리에 교회가 성립되다. 초 정경숙 김경원 김경오의 7인이 도정의의 전도로 신교하고, 동리서재를 차득하여 예배하다가 불과 일 년에 신도가 칠십여 인에 달하매 삼백여원을 출연하여 예배당을 신축하였고, 후에 정경숙을 장로로 장립하여 당회가 조직되니라.”

여기에 나오는 도정의라는 인물은 권서인으로 오웬의 선교팀 일원이었다. 이 두 가지 사료를 근거로 정황을 살피면 진도의 첫 교회, 즉 분토리교회는 권서인 도정의에 의해 복음을 들은 주민들이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고, 그 이후 프레스톤을 비롯한 선교사들에 의해 정식 교회로 세워져 나갔을 것이다.

순천중앙교회 앞을 장식하고 있는 프레스턴 선교사 기념종탑.
순천중앙교회 앞을 장식하고 있는 프레스턴 선교사 기념종탑.

이런 예는 수없이 많다. 시골에서 읍내로 나갔다가 혹은 서울에 다니러 왔다가 복음을 듣고서는 고향으로 돌아가 예배를 시작하고, 이후 선교사가 합류하여 지역에 복음이 왕성해지는 사례가 부지기수이다. 선교란 첫 교회를 개척하는 것뿐 아니라, 세워진 교회를 자립교회로 나아가 전도하는 교회로 성장시키는 모든 과정을 포함한다. 즉 교회 개척에서 교회 성장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이 선교이다.

읍내나 서울에 갔다가 복음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 예배를 드리다가 선교사가 합류하여 복음이 왕성해지는 일은 너무 많다. 선교란 첫 교회를 개척하는 것 뿐 아니라 세워진 교회를 자립교회로, 전도하는 교회로 성장시키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즉 교회개척과 교회성장에 이르는 모든 과정이 선교이다.

복음은 더욱 힘을 얻고

진도 최초의 교회인 진도초대교회(옛 분토리교회) 전경.
진도 최초의 교회인 진도초대교회(옛 분토리교회) 전경.

분토리교회는 스스로 자립하여 진도 전역에 전도할 수 있는 교회가 아니었다. 우수영교회 교인들이 분토리교회와 협력하여 진도선교를 도와주었고, 이후에는 선교사들이 합세하면서 진도지역에 복음이 들어가게 된다.

진도선교의 과정에는 이처럼 모든 선교사들의 참여와 헌신이 들어가 있었다. 전체로서의 선교와, 개인의 선교가 있어야 비로소 교회는 탄생된다. 개인의 구원이 공동체의 구원으로 완성되듯이, 개인의 선교는 공동체의 선교로 완성된다. 선교는 부분이 아니라 전체이다.

맥컬리(Henry D. McCallie·한국명 맹현리) 선교사는 한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단계에 이른 1908년 가을에 본격적인 전도를 목적으로 진도를 방문할 수 있었다. 프레스톤이 맥컬리를 도와 일주일간 함께 전도했으며, 그 결과 여섯 교회가 진도에 세워졌다. 1909년에는 맥컬리가 부모에게서 선물 받은 배를 타고 와서 의료선교사 포사이드(W. H. Forsythe·한국명 포위렴), 간호선교사 코르델(Miss Emily Cordell)과 함께 더욱 열심히 전도에 임했다. 그 사이 분토리교회는 더욱 확장되었다. 1911년 1월의 상황을 맥컬리는 이렇게 보고한다.

“1월에 가장 큰 섬 진도를 방문하였다. 주일학교가 시작되었으며, 교회를 확장하고, 교인도 증가함으로써 사기가 진작되었다. 부인 3명, 남자 2명, 어린아이 4명에게 세례를 베풀었으며, 8명의 부인과 4명의 학생은 교리문답 교인으로 받아들였다. 근래에 들으니까 교회가 좁아서 인근 부락에 별도의 교회를 세우려 한다.”(맥컬리 ‘A Report from Mokpo’, <The Missionary> 1911년 6월)

이런 과정을 거쳐 진도에는 복음이 활발하게 전파되고, 차츰 자생교회들도 생겨났다. 1920년에는 진도중앙교회, 1921년에는 금갑교회, 1927년에는 고군중앙교회 등이 각각 세워진다.

매산여학교 경내에 세워진 프레스턴 선교사 사택. 등록문화재 제126호로 지정되어 있다.
매산여학교 경내에 세워진 프레스턴 선교사 사택. 등록문화재 제126호로 지정되어 있다.

끝까지 한국을 사랑한 프레스톤

한편 프레스톤 선교사는 1909년 숨진 오웬 선교사의 빈자리를 대신하기 위해 광주선교스테이션으로 옮겨간다. 광주에서부터 장흥과 순천 일대를 순회하며 선교하던 중, 순천지역의 중요성을 발견한 프레스톤은 이곳에도 선교스테이션을 만들기로 한다. 이를 위해 1911년 미국으로 건너가 선교스테이션 개설을 위한 모금활동을 하였고, 필요한 선교사들도 모집하였다. 프레스톤은 순천선교스테이션의 아버지였다.

순회사역 중 선교의 거점이 될 만한 지역을 발견하면 선교스테이션을 만들기 위해 본국으로 가서 모금하고, 선교사들도 모집하는 일은 선교사들의 일상 중 하나였다. 선교사는 선교동원가이기도 하였다. 그렇게 선교스테이션을 만든 후에는 다시 땅 끝으로 순회하는 사역을 지속하는 삶을 살았다. 선교스테이션의 중심과 땅 끝 영성을 잇는 흐름이 늘 그들에게 있었다.

프레스톤 선교사는 조선에서 낳은 자신의 아이를 조선에 묻었다. 서울 양화진에는 프레스톤 아들의 무덤이 있다. 땅 끝 순교의 피를 품고 있는 양화진이다.

그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1940년에 추방당하였다. 하지만 미국으로 돌아가서도 한국선교를 위해 끝까지 모금운동을 벌였다. 죽을 때까지 한국을 사랑한 프레스톤 선교사. 한국에 대한 그의 사랑이 땅 끝 진도까지 가게 만들었고, 아들의 죽음마저 견딜 수 있게 했던 것이다.

한국의 많은 담임목사들이 안식년을 갖는다. 그중 한 달이나 일주일 동안 교회에서 후원하는 선교지역으로 가서 배낭 메고 순회선교를 해보면 어떨까? 아니면 최전방의 선교지에서 선교사들과 함께 직접 선교활동을 하고 돌아와 강단에 서면 어떨까? 그렇게 강단 위에 땅 끝의 영성이 발휘되면 무슨 일이 생길까?

순천중앙교회의 프레스톤기념비 앞에서 섰다. 그리고 땅 끝을 품은 프레스톤의 영성을 생각했다. 중심은 땅 끝을 축복하고, 땅 끝은 중심을 세운다. 땅 끝을 품은 중심이 그리워진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