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봉환 교수(전 대신대학교 부총장·현 울산 대암교회 협동목사)

플레처 선교사 ‘대구애락원’ 설립, 한센인 사역…기념관 세워 뜻 기려야

대한민국역사문화운동본부(이사장:전재규 장로)는 창립 10주년을 기념해 ‘청라정신과 대구·경북 근대역사문화’라는 주제로 10월 25일 대구 인터불고호텔에서 콘퍼런스를 개최했다. 이번 콘퍼런스에서 소개된 황봉환 교수의 ‘청라정신 계승과 발전방향’이라는 제목의 강연 내용과, 전재규 황봉환 공저 <청라정신과 대구·경북 근대문화>(우리시대)에 소개된 내용 중 일부를 정리해 본 지면에 소개한다. <편집자 주>

황봉환 교수(전 대신대 부총장·현 울산 대암교회 협동목사)
황봉환 교수(전 대신대 부총장·현 울산 대암교회 협동목사)

1899년 대구에 부임한 선교사 헨리 브루언이 동산병원 동북쪽 동산에 올라 대구 읍성을 바라보면서 “다윗의 망대가 있는 예루살렘 같다”고 말한 이후부터 대구는 ‘제2의 예루살렘’이라 불리게 됐다. 조선선교의 중심이 남쪽은 대구, 북쪽은 평양이라고 인식되기 시작했다. 특별히 대구·경북은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들의 사역무대였고, 그들의 신학적 뿌리와 신앙정신과 선교사역 활동이 대구·경북 근대사의 초석이 되었다.

대구에 입성한 선교사들의 업적과 역사적인 장소들이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지역처럼 그들이 대구에 남긴 역사적인 자취와 업적을 기리고 후손들에게 교육의 장으로 활용해야 할 선교기념관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되고 부흥 성장한 대구의 교회들이 역사 보존에 대하여 무관심하고, 역사적 유적지들을 찾아 보존하고, 후대에 귀중한 역사와 문화유산으로 지정하려는 연합된 열정이 부족하기 때문일까.

대구의 청라언덕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계승한 청교도정신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뜻 깊은 공간이다.
대구의 청라언덕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계승한 청교도정신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뜻 깊은 공간이다.

청라언덕과 청교도정신

‘청라언덕’이란 ‘푸른 담쟁이 넝쿨이 무성한 언덕’을 지칭하는 말이다. 담쟁이 넝쿨은 담장이나 벽돌집을 잘 타고 올라가면서 그곳에 견고히 부착되어 사면을 푸르게 한다. 현재 대구 동산병원의 동쪽 언덕이 언제부터 청라언덕이라고 불리게 되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이 땅은 달성 서씨의 종중산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수많은 묘지가 산재해있었던 민둥산이었다. 초기 미국 북장로회 선교회가 선교부지로 매입하여 그 위에 선교사들의 거주 주택을 짓고서부터 그들의 활동무대가 된 동산이다. 당시 선교사들은 붉은 벽돌로 서구식 집을 짓고 그들 집의 경계인 담벼락과 벽돌집 주변에 담쟁이인 청라를 심기 시작했다. 초기 선교사들은 왜 이곳에 청라를 심었을까? 이것은 그들의 생활과 신앙정신과 무관하지 않다.

미국에서 대구에 온 선교사들은 대부분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부에서 파송한, 청교도정신을 가진 자들이다. 영국에서 건너온 청교도들이 미국 북동부 지역에 정착하여 세운 교회, 학교, 병원은 신대륙 최초의 종교기관, 교육기관, 의료기관이었다. 그들이 세운 선교학교는 대부분 세계적인 사립명문대학교로 성장했다. 그 명문대학들에는 대부분 담쟁이, ‘청라’(Ivy)가 심겨있다. 그래서 이 대학들을 일컬어 ‘아이비리그’라 한다. 특별히 이 대학들 가운데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펜실베니아 대학은 철저한 청교도정신을 학습목표로 정했고 성경을 배우도록 하는 조항을 두기도 했다.

청라언덕의 존재를 널리 알린 가곡 ‘동무생각’ 노래비.
청라언덕의 존재를 널리 알린 가곡 ‘동무생각’ 노래비.

이러한 미국의 초기 뉴잉글랜드의 역사를 더듬어 볼 때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에 정착하여 그들의 주택과 울타리에 담쟁이 넝쿨을 심은 것은 자연스러운 그들의 정서요, 그들 가슴에 심어진 청교도정신의 표현일 것이다. 특별한 것은 대구의 청라언덕이 교육, 역사, 의료선교의 역사적 현장이라는 사실이다. 19세기 후반부터 개화되기 시작한 대구 근대사의 요람이 청라언덕이다. 청라언덕과 맞물린 이 동산에 대구 기독교교육의 요람들이 역사적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대구의 한센병 환자를 위해 헌신한 아치볼트 플레처 선교사.
대구의 한센병 환자를 위해 헌신한 아치볼트 플레처 선교사.

대구의 교회와 주일학교가 시작된 요람인 대구제일교회가 세워진 동산, 여자 소학교에서 중고등학교로 발전하고 성장한 신명여자중고등학교가 자리잡은 동산, 동산의 언덕과 맞물린 건너편 언덕에 세워진 계성중고등학교가 세워진 동산, 의료선교의 모체인 제중원이 세워지고 후일에 동산병원과 동산의료원으로 발전했고 간호사들을 양성하는 간호대학이 세워져있는 동산, 열악한 환경과 창궐하는 질병과 비위생적 생활 속에서 대구의 복음화와 개화된 문명을 위해 애쓰다 순교한 선교사들의 무덤이 있는 동산, 민족의 독립을 염원하며 기독교정신으로 뭉쳐진 학생들과 시민들의 함성이 메아리쳤던 3·1운동길이 있는 동산, 젊은 남녀가 품은 가슴 속 깊은 사랑이 가곡으로 표현된 청라언덕의 ‘동무생각’ 노래비가 세워져있는 동산.

이 모든 역사의 자취와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이 청라언덕은 선교사들이 심은 청라의 기상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의 뿌리가 되고, 개혁신학을 꽃피운 청교도신앙과 선교의 정신이 살아 숨쉬는 곳이다.

대구애락원과 플래처 선교사

1920년 8월 28일 아치볼드 플레처가 미국 북장로회 의료선교사로 내한했다. 플레처 선교사는 1909년 11월에 안동에서 선교하던 소텔 선교사가 장티푸스에 걸려 대구로 후송되었을 때 소텔을 치료하기 위해 대구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후 안동 강계지역에서 잠시 선교활동을 하던 중 1910년 9월 연례선교대회에서 대구 선교지로 임명을 받았고, 건강이 나빠진 존슨 선교사가 휴식 차 안동으로 이동한 후에 플레처는 대구로 돌아와 1942년까지 동산병원장으로 봉직했다.

청라언덕에 세워진 블레어선교사 주택.
청라언덕에 세워진 블레어선교사 주택.

플레처는 의료선교를 시작하면서 대구지역에도 한센병자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직 대구에는 별도의 나환자 수용시설이 없는 가운데 플레처는 끔찍할 만큼 발이 망가진 두 소년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이 소년들 외에도 몇 사람의 한센병자가 더 있는 것을 알고 우선 부엌이 딸린 방 하나가 있는 작은 집을 마련하고 나환자들을 그곳에 살게 하며 치료했다. 이것이 대구 나환자치료의 첫 시작이었다. 플레처는 주님께 기도했다.

“주 하나님이여, 저희에게 돈을 마련해주세요. 소망의 빛이 저 버림받은 사람들의 삶에 비추게 하옵소서. ‘내가 살아있으니 너희도 살게 되리라’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최초의 교회인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에 청라, 즉 담쟁이넝쿨이 우거진 모습.
최초의 교회인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에 청라, 즉 담쟁이넝쿨이 우거진 모습.

‘인도와 동양지역 나환자선교회’ 창립자 웰즐리 베일리 부부가 1913년 플레처의 초청으로 대구를 방문한 바로 그 주간에 영국인 기증자가 5000달러를 선교회에 보내왔다. 그 중 2000달러가 대구 나환자 병원에 전달됐다. 플레처는 1916년 영국에서 보내온 돈으로 달성군 달서면에 1만8000여 평의 병원 부지를 매입했다. 1917년 건물 3채가 완공되어 병원을 개원했다, 1924년에는 ‘대구나병원’이던 병원명을 ‘대구애락원’으로 개칭하고, 서양식 병동을 증축해 환자 238명을 수용하게 됐다.

대구의 의료사역에 미국 청교도 정신이 스며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1925년에 미국 뉴저지주에 있는 프린스턴대학교 재단의 후원으로 애락원에 앤더슨기념관이 건축됐다. 프린스턴대학은 청교도사상으로 미국 북장로회의 신학적 정체성을 지켜가는 대학이었다. 이 청교도적 신학사상이 한국장로교회 특히 예장합동 교단의 신학적 정체성이며, 대구 선교사들의 신학적 정체성이었다.

아치볼트 플레처 선교사가 세운 대구애락원의 옛 모습.
아치볼트 플레처 선교사가 세운 대구애락원의 옛 모습.

대구애락원에서 플레처의 선교사역은 멈추지 않았다. 1927년 가을에 경북 군위에 한센병자 치료소 건축을 시작해 1928년 봄에 준공했으며, 1931년에는 의성에 나환자 치료소를 설립했다. 이뿐만 아니라 1932년에 애락원 중앙봉사관 건물 1동과 축사 4동을 신축하여 원생들에게 양돈을 장려하고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왔으며, 농사 및 양계도 장례했다.

특별히 플레처가 한국에 선교사로 온 지 25주년을 기념하는 해인 1934년에는 일본 정부 표창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그가 얼마나 한센병 환자 치료를 위해 헌신적으로 사역했는가를 일본 정보도 인정했다는 뜻이다. 이후에 그는 자신의 사재를 투자하여 한센병 미감아 약 4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건물을 신축하기도 했다. 플래처 부부는 1950년 4월에 휴식 차 미국에 간 기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1970년 6월 7일 소천하여 캘리포니아주 몬로비아 오크기념공원에 안장되었다.

플레처 부부가 참으로 따뜻한 가슴으로, 청교도신앙의 정신으로 국가도 싫어하고 외면했던 한센병 환자들을 손수 치료하며 그들이 회복되고 자생할 수 있도록 설립한 대구애락원은 결코 잊힐 수 없고 사라질 수 없는 역사의 현장으로 남아있어야 한다. 그들의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의 정신이 그곳에 배어있다. 그들의 사랑과 희생에 깊이 감사드린다.

대구 근대화에 남긴 기독교 역사의 현장들을 찾아 발굴하고 보존하고, 플레처 선교기념관을 세우고 우리 후손들이 그곳에서 교육받고 꿈을 키우며, 영원히 잊지 못할 역사문화유산으로 남겨주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고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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