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이 우리 겨레와 함께 하며 새겨놓은 흔적들

서양인 선교사가 이 땅의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고안한 한글점자 교재 눈길

기독인 정치가와 의료인이 남긴 격동기 기록들도 역사적·문화적 가치 지녀

2023년에는 문화재청(청장:최응천)의 기독교 관련 유물들에 대한 근대문화유산 등재가 예년만큼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로제타 홀 선교사가 제작한 ‘한글점자 교재’가 1월 5일에, 월남 이상재 선생의 ‘주미조선공사관 관련 기록’이 5월 11일에, 쌍천 이영춘 박사의 ‘농촌위생 진료기록물’이 9월 7일에 등록문화재 지위를 얻은 것이 전부이다.

로제타 홀 선교사와 그가 평양에서 여성 시각장애인들의 한글교육을 위해 제작한 한글점자 교재.
로제타 홀 선교사와 그가 평양에서 여성 시각장애인들의 한글교육을 위해 제작한 한글점자 교재.

비록 숫자는 많지 않지만 세 가지 문화재 모두 기독교인들이 주인공이 되어 우리 역사와 문화에 기여한 스토리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퍽 의미 있다. 이 땅에 들어온 복음이 단순히 종교적인 측면뿐 아니라 민족사적인 측면에서도 큰 역할을 감당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문화유산에서 기독교 관련 유물들이 차지하는 비중을 점차 높여가야 한다는 절실한 과제는 한국교회에 여전히 남아있다. 지역교회와 성도들은 물론 각 교단 차원에서의 관심과 분발이 촉구된다.

로제타 홀과 한글점자 교재

로제타 홀 선교사.
로제타 홀 선교사.

미국감리교여성해외선교회는 1890년에 로제타 홀을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한다. 남편과 함께 의료선교사로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중 로제타 홀은 이 땅에서 남편 윌리엄 제임스 홀과 딸을 잇달아 병으로 잃고 만다.

그러나 그녀는 사역을 포기하고 귀국하는 대신 두 사람의 무덤 앞에서 “하나님 내 아들 셔우드와 함께 한국에서 오랫동안 사역을 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한다.

실제로 한국에서 43년 동안의 사역을 마치고 1933년 미국으로 돌아가기까지 로제타 홀은 여성병원인 보구여관 등을 통해 많은 환자들을 돌보았으며 수많은 한국여성 의료인들을 길러냈다. 아들 셔우드 홀 또한 한국 결핵퇴치에 앞장서며 우리 겨레를 위해 크게 공헌했다. 결핵퇴치의 상징과도 같은 ‘크리스마스 씰’을 창안한 것도 바로 셔우드 홀이다. 기도는 응답됐다.

로제타 홀이 이 땅에 남긴 또 하나의 업적이 있다. 남편 제임스가 생전에 평양에서 전도한 교인 중에는 시각장애인 딸을 둔 사람이 있었다. 어린 딸의 이름은 오봉래였다. 로제타가 오봉래를 가르치기 위해 자신이 어릴 적 배웠던 점자를 가르친 것이 우리나라 특수교육의 시작이었다.

남편과 딸을 잃은 후 1898년 평양으로 돌아간 로제타 홀은 다시 오봉래를 만났다. 로제타는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만든 새로운 교재로 오봉래를 교육시켰다. 감리교선교부에서 세운 배재학당의 한글학습서 <초학언문>을 점자로 제작한 것이었다. 로제타 홀은 이 교재를 기름먹인 두꺼운 한지에 바늘로 구멍을 내어 만들었다.

이 교재에 사용된 로제타 홀의 4점식 한글점자는 1926년 박두성이 6점식 한글점자인 ‘훈맹정음’이 창안되기 전까지 우리나라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활용되었다.

또한 로제타 홀이 시각장애인 여성들을 위해 세운 평양여맹학교에서 오봉래를 비롯한 수많은 학생들이 이 교재로 한글을 배웠다. 특히 오봉래는 훗날 일봉 동경맹학교 유학을 마치고, 모교인 평양여맹학교 교사로 돌아와 일하며 ‘조선의 헬렌켈러’라는 별명을 가진 인물로 자랐다.

문화재청은 현재 대구대학교 경산캠퍼스 점자출판박물관에 소장된 로제타 홀의 ‘한글점자 교재’에 대해 “우리나라 시각장애인을 위한 특수교육 태동의 상징적 유물로서 역사 가치가 충분하다”면서 금년 1월 5일 등록문화재로 결정했다.

월남 이상재와 주미조선공사관 기록

월남 이상재 선생.
월남 이상재 선생.

충남 서천 출신의 월남 이상재는 어린시절 유학을 배경으로 성장했으나, 기독교로 개종하여 기독교청년회(YMCA)를 중심으로 겨레를 위한 자주독립운동과 계몽운동에 앞장서 지도자로 활약한 인물이다.

이상재는 1867년 과거에서 낙방한 후, 친족의 주선으로 당시 승지였던 박정양을 만나 30살이 될 때까지 그의 개인비서로 지낸다. 1881년 고종의 명으로 신사유람단이 일본에 파견되었을 때, 이상재는 박정양의 추천으로 수행원이 되어 신흥문물을 경험하며 개화파 인사들과 교분을 쌓는다.

이후 1887년 6월 박정양이 초대 주미공사로 부임할 때도, 이상재는 2등 서기관으로 채용되어 함께 미국으로 건너간다. 당시 청나라가 우리나라와 미국 사이 외교관계 수립을 방해하였으나, 이상재가 청국공사와 담판을 벌여 국서(國書) 전달을 성사시켰다는 일화가 있다.

월남 이상재 선생과 그가 주미조선공사관에서 서기관으로 근무할 당시 미국정부와 주고받은 외교문서들을 모은 &lt;미국공사왕복수록&gt;.
월남 이상재 선생과 그가 주미조선공사관에서 서기관으로 근무할 당시 미국정부와 주고받은 외교문서들을 모은 &lt;미국공사왕복수록&gt;.

주미조선공사관에서 보낸 1년 동안 그는 여러 기록물들을 남겼다. 미국정부와 주고받은 문서의 한문 번역본과 외교활동 참고사항 등을 모은 <미국공사왕복수록(美國公使往復隨錄)>, 이상재 본인이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를 묶은 <미국서간(美國書簡)> 등에 그 기록물들이 담겨있다.

특히 <미국서간>은 주로 집안일에 관련된 내용들이지만 ‘미국 상황’(민주주의, 물가) ‘공관의 임대료’ ‘청나라로 인한 업무 수행의 어려움’ 등 당시의 시대상과 국제 외교현장에서의 생생한 모습들도 보여준다.

문화재청은 이 문서들에 대해 “조선이 서양국가 중 최초로 개설한 워싱턴 공사관의 실상과 경인철도 부설 초기 자료 및 자주적인 외교 활동 노력 등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가치를 지닌” 자료라고 평가하며 금년 5월 11일 문화재로 등록했다.

귀국한 이후 이상재는 서재필 윤치호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만민공동회 등에서 활동하는 한편, 황성YMCA에 가입하여 계몽운동에 헌신했다. 그가 전국의 YMCA 조직들을 규합해 결성한 조선YMCA 전국연합회는 나중에 3·1운동의 발판이 되었다.

그가 1920년 YMCA 전국연합회 회장을 지낼 때, 자신의 옛 근무지 미국에서 찾아온 미국 국회의원 시찰단을 맞이하기도 했다. 이후 조선교육협회 회장, 조선민립대학기성회 회장, 조선일보사 사장 등으로 활동하고 일제에 의해 옥고까지 치르며 민족지도자로서 역할을 감당했다.

쌍천 이영춘의 농촌위생 진료기록물

쌍천 이영춘 박사.
쌍천 이영춘 박사.

평남 용강 출신의 쌍천 이영춘은 1929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병리학을 연구했다. 이후 일본 교토제작대학에서 의학박사학위를 받은 후 돌아왔다. 귀국한 후 얼마든지 안락을 누리며 부와 명성을 쌓을 수 있는 길이 열려있었지만 정작 그가 찾아간 곳은 전북 군산에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구마모토농장의 진료소였다.

이영춘은 일제의 수탈에 시달리던 소작농민들을 위해 농장 사무실을 개조해 자혜진료소를 만들고 진료를 시작했다. 군산 뿐 아니라 인근 대야와 멀리 정읍 화호 등지까지 다니면서 하루 100명 이상의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았다. 자혜진료소에서 그가 돌본 사람들의 숫자는 3000가구 2만여 명에 이른다.

진료소에서 치료하기 어려운 입원환자와 수술환자들을 위해서는 1947년 개정중앙병원, 1948년에는 화호중앙병원을 각각 세워서 돌보았고, 일심영아원 일맥영아원 등을 설립해 버림받은 아이들을 양육했다. 해방 후 개정간호학교와 화호여자중고등학교 등을 세워 여성 인재들을 양성하기도 했다.

쌍천 이영춘 박사와 그가 군산 개정중앙병원에서 농민들을 돌보며 남긴 의료일지.
쌍천 이영춘 박사와 그가 군산 개정중앙병원에서 농민들을 돌보며 남긴 의료일지.

특히 그는 세브란스의전 재학 당시 스승 에비슨 선교사의 “치료보다는 예방”이라는 가르침을 따라 1948년 농촌위생연구소를 설립하고, <농촌위생>이라는 이름의 학술지도 발간하며 기생충, 결핵, 전염병 등으로부터 사람들의 생명을 지키는 데 힘썼다.

그가 기록으로 남긴 자혜진료소 일지, 개정중앙병원 일지, 농촌위생연구소 일지 등은 ‘이영춘 농촌위생 진료기록물’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금년 9월 7일 문화재청 등록문화재가 되었다. 앞서 이영춘 박사가 살던 군산의 옛 가옥도 2003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바 있다.
문화재청은 이 기록물들에 대해 “당시 농촌 주민의 건강상태와 농촌의 의료실태를 확인할 수 있으며, 농민의 건강을 지키기 위하여 펼친 농촌위생사업 활동과정을 엿볼 수 있는 자료”라면서 “의료체계가 구축되기 전 농촌 보건위생 체계를 갖춘 드문 사례로써 공중보건 의료사적으로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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