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시대 겨레 위해 온 몸 내던진 선배들 애국신앙 되새기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22년은 4년 전 만세운동으로 촉발된 독립운동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으려는 기독교인들의 애국신앙이 다양한 방식으로 발현된 시기입니다. 서울과 평양의 기독인들은 수양동우회를 결성해 조국 광복을 향한 몸부림을 펼쳤고, 기독여성들은 한국YWCA를 중심으로 세력을 결집해 겨레의 계몽에 앞장섰습니다. 다음세대를 일깨우는 노력들도 계속 이어져 조선소년척후대가 조직되는가 하면, 조선민립대학 설립운동이 추진되기도 했습니다. 그 격동의 시기와 기독인 선각자들의 자취를 되돌아보자는 뜻에서 본지는 2회에 걸쳐 역사기획 ‘100년 전 한국교회’를 연재합니다. 첫 회인 ‘일송정 푸른 솔은-자주독립을 꿈꾼 기독인들’에서는 사건과 인물 중심으로 이 시대를 돌아보고, 두 번째로 ‘선교사들의 눈에 비친 100년 전 서울’에서는 당시 재한선교사들이 촬영한 사진에 포착된 시대상을 살핍니다. <편집자 주>

수양동우회 일어나다

1922년 여성들을 위한 신학교육기관으로 설립된 이일성서신학교는 100년 만에 종합대인 한일장신대학교로 발전했다.
1922년 여성들을 위한 신학교육기관으로 설립된 이일성서신학교는 100년 만에 종합대인 한일장신대학교로 발전했다.

일제강점기 한국장로교회가 참여한 대표적인 독립운동 사건 중 하나가 ‘수양동우회’ 사건이다.

수양동우회란 기독인 독립운동가인 도산 안창호가 미국에서 창립한 흥사단의 국내지부격인 서울의 수양동맹회와 평양의 동우구락부가 통합한 조직이다. 청년남녀의 수양을 위한 단체로 포장했지만, 실제로는 독립운동 전개를 목적으로 움직이는 단체였다.

시작은 안창호의 지시를 받은 춘원 이광수의 활동으로 1922년 2월 서울에서 김종덕 박현환 등 11명이 수양동맹회를 결성하면서부터였다. 이듬해 7월에는 평양에서 김동원 김성업 등을 중심으로 동우구락부가 결성됐으며, 두 단체는 1926년 1월 수양동우회로 단일 조직이 된다.

특히 평양·선천지역의 기독교인들이 수양동우회의 주도 세력이 되어 독립정신 고취와 민족운동 전개에 앞장섰다. 조직의 수장인 안창호가 1932년 체포되는 난관 속에서도 이들의 기개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이들은 농촌을 중심으로 이상촌 건설과 협동운동을 전개했으며, 기관지 <동광(東光)>을 발행하는 등 다채로운 활동을 했다.

1937년 이들의 존재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사건이 벌어진다. 장로교회의 청년조직인 기독청년면려회(CE)가 전국적인 금주운동을 전개하는 가운데, 당시 전국CE 서기이자 수양동우회의 일원이었던 이양섭이 ‘멸망에 함(陷)한 민족을 구출하는 기독교인의 역할’이라는 인쇄물을 국내외에 배포한 것이다.

이를 적발한 일제가 대대적인 조사와 탄압에 나서면서 수양동우회 회원들 상당수가 검거되어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 중에는 장로교 총회장을 역임한 정인과 목사, 마산CE 회장을 지낸 이윤재 장로 등 다수의 기독교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이윤재의 경우는 수양동우회 사건에 이어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다시 수감되어 옥중에서 숨을 거두는 비극을 맞이했다.

수양동우회 사건은 연루된 인물 대부분이 무죄로 풀려나며 일단락된다. 사건 이후 상당수 인사들이 친일노선으로 변절하고, 수양동우회와 함께 전국CE도 일제에 의해 해체되었다가 해방 이후에야 복구되는 등 기독교 운동세력은 극심한 부침을 겪는다. 하지만 수양동우회 사건 그 자체는 이 땅의 기독인들이 애국신앙의 기개를 펼친 중요한 사적으로 기억된다.

한국YWCA의 발족

1922년은 이 땅의 기독여성운동이 본격화된 원년이라 할 수 있다. 한국YWCA의 원형인 조선여자기독청년회가 결성된 해이기 때문이다. 김필례 김활란 유각경 등 여성 기독교인들은 일제의 식민지배와 봉건주의 관습이라는 두 가지 억압을 극복하자는 뜻으로 4월 20일 조선YWCA를 조직한다.

앞서 3월 27일 1차 발기회에서 기독여성들은 YWCA 발기문을 통해 “젊은 여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믿게 하며, 온 인류는 하나님 안에서 형제·자매가 됨을 인정하게 하고, 구세주이신 예수의 교훈을 자기생활에 실천하게 함으로써 평화와 정의의 사회를 건설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천명했다. 같은 해 6월 13일부터 12일 동안 서울 협성여자성경학원에서 열린 제1회 조선YWCA 하령회는 기독여성운동을 크게 확산시키는 촉매 역할을 한다.

이후 YWCA는 축첩 조혼 미신 등의 관습을 타파하고, 공창제를 폐지하는 운동을 강력하게 전개하며 여성들의 인권 수호에 앞장섰다. 한편으로는 농촌계몽운동과 물산장려운동 등에 앞장서, 겨레의 힘을 키우고 일제에 항거하는 애국활동도 전개했다.

1941년 일본YWCA에 합병되며 활동이 중단되기도 했다. 해방 후 한국YWCA로 활동을 재개한 후에는 시대별로 전쟁난민 구호사업, 소외계층 지원과 노동자 권익보호, 경제자립캠페인, 평화운동과 생명운동 등을 전개하며 우리 사회 시민운동과 여성운동을 선도해왔다.

100주년을 맞은 현재는 전국 53개 회원YMCA와 함께 청소년 교육, 성평등, 미디어소통, 평화통일, 탈핵운동 등에 주력하고 있다.

희망의 씨앗 소년척후대

중앙기독교청년회(YMCA) 소년부 간사인 정성채는 1922년 9월 30일 조선소년척후대를 조직한다. 조선소년척후대는 강한 종교적 색채를 띠며 어린 소년들을 계몽하는 데 힘썼다. 며칠 후인 10월 5일에는 중앙고등보통학교 체육교사 조철호가 군대식 조직인 조선소년군을 창설했다.

두 단체는 1924년 3월 1일 하나로 통합해 소년척후단조선총연맹을 결성했다. 초대 총재는 YMCA에서 활동하던 기독인 민족지도자 월남 이상재가 맡았다. 해방조국의 꿈을 함께 키우기 시작한 소년들은 같은 해 4월 18일 중국 북경에서 열린 극동소년군대회에도 참석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두 단체는 서로의 이념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채, 다시 분열하여 각기 운영되다 일제에 의해 모두 해산되고 만다. 이를 계승한 한국보이스카우트가 해방 후인 1946년 3월에 출범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23년에는 전북 새만금일대에서 세계스카우트가 한 자리에 모이는 잼버리가 개최될 예정이다.

조선에 대학을 세우자

교육의 중요성을 알고 있던 선각자들은 조선인을 위한 대학을 세우는 데 깊은 관심이 있었다. 교육운동은 사실상 민족운동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구한말부터 시작된 민립대학 설립을 위한 움직임은 1919년 만세운동을 계기로 다시 불붙기 시작했고, 드디어 1922년 1월 조선민립대학기성준비회가 결성됐다.

이 운동에는 남강 이승훈, 월남 이상재 등 여러 기독인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이듬해 1923년 3월 29일 조선중앙YMCA회관에서 발기인 462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총회를 계기로 대학 설립 계획서가 확정됐고, ‘한민족 1000만이 한 사람 1원씩’이라는 구호와 함께 모금운동도 전개됐다.

안타깝게도 일제의 집요한 방해로 인해 민립대학 설립 추진은 수포로 돌아간다. 하지만 이후에도 굴하지 않고 대학 설립을 위한 노력이 기독인들을 중심으로 계속 전개됐다. 이화학당의 연합기독교여자대학으로의 승격 운동, 연희전문학교 세브란스의학교 협성신학교가 연합하여 벌인 종합대학 설립 운동, 오산학교의 확장을 통한 농과대학 설립 운동 등이 대표적이다.

종합대로 발전한 여성신학교

미국남장로교선교부 소속 엘리자베스 쉐핑(한국명 서서평) 선교사는 1922년 6월 2일 전라도 광주에 ‘이일성서신학교’라는 이름으로 여성들을 위한 전도부인 양성학교를 개교했다. 이듬해인 1923년 9월 4일에는 예수병원 설립자인 마티 잉골드 선교사에 의해 ‘한예정성경학교’라는 이름으로 또 하나의 여성성경학교가 전주에 문을 열었다.

두 학교는 1961년 4월 한예정성경학교의 ‘한’자와 ‘이일성서신학교’의 ‘일’자를 딴 전주한일신학원으로 합병하며 수많은 여성사역자들을 길러냈다. 이를 모태로 오늘날 4년제 종합대학으로 발전한 한일장신대학교는 개교 100주년을 맞아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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