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들의 정신 계승하며 영광의 역사 이어와

독특한 첫 인상이다. 온갖 예배당을 만나보았지만 이런 분위기는 처음이다. 정면의 외형은 분명히 70년대 분위기인데, 전체적으로는 21세기 느낌이 있다. 시대가 혼재되어 조화를 이룬 이 풍경 앞에 서면 무언가 압도되는 힘이 느껴진다. 차곡차곡 쌓인 세월이 자아내는 무게이다.

경산 자인교회(권희찬 목사)는 124년의 시간 중 어느 하나도 허투루 보내지 않은 공동체이다. 1972년 당시 온 교우들이 손수 지은 교회당의 외관을 이후 50년 동안 수차례 증축하는 과정에서 그대로 살려놓은 모습만 보아도 이 교회가 과거의 발자취들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지를 짐작할 수 있다.

초창기에 교촌동의 한 초가집에서 예배하던 자인교회는 몇 번의 변천을 거쳐 1929년 예배당을 신축한 바 있다. 교우들이 직접 연보하여 건축한 이 예배당은 비록 수차례 증개축이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무려 40년 동안이나 유지된다. 한 번 지은 예배당을 여간해서는 무너뜨리지 않고 최대한 보존하려는 자세가, 1972년 다시 예배당을 신축한 후에도 반복된 것이다.

①20세기의 모습과 21세기의 모습이 혼재된 자인교회 예배당 모습. 옛 것의 소중함을 지켜내려는 역대 성도들의 노력과 정성이 엿보인다. ②1965년 성탄절 당시의 자인교회 교우들. 이 당시 자인교회는 추위에 떠는 이웃들을 위해 땔감을 나누고, 보릿고개에는 식량기부운동을 벌이는 등 사랑의 공동체로 우뚝 섰다. ③설립 당시부터의 교회 역사를 대대로 이어 기록해온 <자인교회 약사>. ④다음세대를 건강하게 키우는 일이 설립 120년 이후의 역사를 이어가는 자인교회의 가장 큰 과제이다. ⑤매월 정기적으로 마련되는 3대가 함께 하는 예배. 신앙의 대물림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⑥소박하면서도 산뜻하게 꾸며진 교회당 안내판.
①20세기의 모습과 21세기의 모습이 혼재된 자인교회 예배당 모습. 옛 것의 소중함을 지켜내려는 역대 성도들의 노력과 정성이 엿보인다. ②1965년 성탄절 당시의 자인교회 교우들. 이 당시 자인교회는 추위에 떠는 이웃들을 위해 땔감을 나누고, 보릿고개에는 식량기부운동을 벌이는 등 사랑의 공동체로 우뚝 섰다. ③설립 당시부터의 교회 역사를 대대로 이어 기록해온 <자인교회 약사>. ④다음세대를 건강하게 키우는 일이 설립 120년 이후의 역사를 이어가는 자인교회의 가장 큰 과제이다. ⑤매월 정기적으로 마련되는 3대가 함께 하는 예배. 신앙의 대물림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⑥소박하면서도 산뜻하게 꾸며진 교회당 안내판.

교회가 가난했기 때문에 혹은 교세가 약했기 때문에 이런 선택을 한 것은 아니다. 선배들이 땀 흘려 세우고 지켜온 유산들을 존중하고 계승하려는 분위기가 그 배경에 있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자인교회의 선배들은 어떤 존재들이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자인교회가 설립된 시기를 교회약사는 명치 31년(1898년) 4월 15일로 기록한다. 윌리엄 베어드(한국명 배위량) 선교사가 처음 대구를 방문한 그 이듬해의 일이다. 설립 당시의 다른 상세한 내용이 전해지지 않아 아쉽기는 하지만, 아무튼 자인교회는 이날을 공식 설립일로 지킨다.

초창기 교회를 이끌어간 지도자 중에는 박덕일 목사가 있다. 박덕일 목사는 선교사들이 대구에 세운 동산병원의 전도목사로 파송 받은 인물이다. 얼마나 부지런한 사역자였는지 그가 세운 교회 숫자가 무려 30개에 이른다고 한다. 자인교회에서도 물론 헌신적으로 시무했고, 1927년에는 경북노회장도 지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인물은 자인교회 약사에 ‘배은도’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실제 그의 정확한 이름은 배은희라는 것이 <자인교회 120년사>를 집필한 영남신학대학교 이혜정 교수의 설명이다.

배은희는 17세 나이에 예수를 믿고, 경산지역 교회들을 순회하며 영수와 조사로 활동한 인물이다. 자인교회에서 그의 헌신은 특히 대단했는데, 자신의 집을 예배당으로 내놓고 덕숭학교를 세워 운영하기도 했다. 1908년 설립된 덕숭학교는 1921년 문을 닫기까지 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

배은희는 겨레의 자주독립에 대한 큰 열망도 지녀서, 평양신학교 재학시절 삼일운동에 참여했다가 일제에게 태형 39대를 맞고 풀려난 이력이 있다. 훗날 전주서문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여서도 신간회 전주지부장을 지내며 독립운동을 이끌었고, 신사참배 반대와 여성운동 계몽운동에도 앞장섰다. 지금도 전주서문교회 앞마당에는 그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있다.

초창기 담임목사로 섬겼던 이들의 활약상 또한 눈부시다. 서성오 목사는 경산의 만세운동을 모의한 주역 중 하나였고, 염봉남 목사는 교남기독청년회(YMCA) 회장과 동산병원 이사 등을 역임하며 조국의 해방을 염원하다 별세한 인물이었다.

그 뒤를 이은 김영옥 목사는 상해임시정부의 군자금 조달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했고, 김용규 목사는 덕숭학교 출신으로 일생을 복음사업과 항일투쟁에 바쳤다. 첫 위임목사인 김병호 목사 또한 독립군의 군자금 모금활동을 벌이다 일제에 의해 옥고를 치른 바 있다.

이처럼 자랑스러운 믿음의 선진들이 교회를 이끌어갔기에 후진들은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그 뒤를 따라갈 수 있었다. 선배들이 남긴 자취 하나라도 소홀히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소중한 이름과 행적들은 교회약사와 당회록 등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물론 위기의 시기도 있었다. 전국적으로 교회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극심했던 시절, 자인교회도 창씨개명의 압력에다 예배당이 징발되고 비품을 도난당하는 등의 아픔을 겪었다. 급기야 당시 교회를 담임하던 김정준 목사가 일제의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사임하는 일도 발생했다.

해방 후에는 잇따른 장로교회들의 분열 파동 속에서 일부 교인들이 다른 교단으로 이탈하고, 1960년에는 자인제일교회와 분립하는 아픔을 겪었다.

하지만 해방 직후에는 비록 강압에 의한 것이었을망정 일제의 압력에 굴복했던 과오를 참회하며 당회원과 제직 전원의 사직으로 교회 갱신에 나서고, 자인제일교회와는 분립 6년 만에 화해를 이루어 부흥회나 각종 절기에 함께 연합예배를 드리며 지금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등 난국을 잘 극복하는 슬기를 발휘했다.

한편으로 자인교회는 점차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교회로도 자리매김한다. ‘보릿고개’라는 이름의 극심한 춘궁기를 겪던 시절에는 최병환 목사를 비롯한 당회원들부터 솔선수범해 곡식 기부운동을 벌이고, 땔감을 마련해 교회 난방은 물론 가난한 이웃들에게도 나누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크고 작은 재난이 발생할 때마다 기부와 봉사에도 앞장섰다.

1991년 중국에 첫 선교사를 파송한 것을 시작으로 해외선교에도 발 벗고 나섰다. 이후에 인도 태국 필리핀 등지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예배당을 세우며 수많은 영혼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다.

인접한 북사리의 군부대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지원하며 군선교에 한 몫을 감당하는가 하면, 대신대학교가 장소문제로 어려움을 겪던 시절에는 교회당을 강의 장소를 제공하면서 지역교계에서 큰 몫을 감당하는 공동체로 우뚝 섰다.

권희찬 목사는 “더욱 건강한 교회,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면서 선배들이 써내려온 자랑스러운 역사에 부끄럽지 않은 새 역사를 만들어갈 것”이라고 다짐한다.

“역사 속 교훈이 건강한 신앙 대물림”

[경산 자인교회 권희찬 목사]

권희찬 목사는 신앙의 대물림이 바르고 건강하게 이루어지는 자인교회의 모습을 기대한다.
권희찬 목사는 신앙의 대물림이 바르고 건강하게 이루어지는 자인교회의 모습을 기대한다.

“마치 어떤 계주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19세기의 이야기가 담긴 교회약사가 21세기까지 이어져 기록되고, 1918년 6월부터 쓰기 시작한 당회록이 지금까지 진행형이니 말입니다. 수많은 필자가 대를 이어 적어나간 이 문서들을 보면서 ‘신앙의 대물림’ 가치를 다시 생각합니다.”

자인교회를 7년째 담임하는 권희찬 목사는 세대를 잇는 믿음의 힘이 얼마나 깊이 뿌리내렸는지를 강조해 설명한다. 성도 개인들을 살펴보아도 3~4대를 이어가는 신앙가문 출신이 적지 않다. 거기서 비롯된 저력은 위기의 순간에 더욱 빛난다.

“코로나19 이후 어려움을 겪는 교회들의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들려오지만 저희 교회에서는 예배 출석률이나 헌금 집계 등에서 지금까지 큰 변동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어떤 상황을 마주하더라도 교우들의 신앙온도가 늘 일정하다는 증거이죠. 교회의 전통과 신앙적 정체성이 강력하기에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고 봅니다.”

사실 목회자 입장에서 이런 교회를 담임하는 일은 행운이면서도 동시에 큰 부담이다. 권 목사라고 어찌 짓누르는 무게를 느끼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목회자로서 품어온 야망이나 소신을 고집하는 대신 온 교우들과 조화를 이루고 소통하는 방식으로 이 난제를 극복할 수 있었다. 오히려 교회의 강점을 더욱 부각시키는 방식으로 교회가 나아가야할 방향도 찾게 됐다.

“매월 셋째 주일 낮 예배는 3대가 함께하는 예배로 마련합니다. 총회에서 제작한 <하나바이블>로 온 세대가 같은 말씀을 듣고 배웁니다. 저녁에는 가정예배를 통해 서로의 깨달음과 다짐을 나누는 시간도 갖지요. 세대통합사역은 우리를 더욱 단단한 공동체로 만들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장학제도를 확충하고, 주일학교 사역을 위해서는 투자를 아끼지 않는 등 자인교회는 농촌교회의 한계를 뛰어넘는 다음세대 사역을 전개하고 있다. 아낌없는 사랑을 베풀며 교회의 또 다른 자랑이 될 믿음의 세대를 건강하게 길러내는 것이다.

“사적지 지정이 모든 교우들, 특히 다음세대의 교회에 대한 자긍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신앙의 대물림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어온 우리 교회의 모습이 널리 알려져 한국교회에 귀감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권희찬 목사의 바람은 성취 가능해 보인다. 이미 보배가 된 당회록도, 교회약사도 지금 한창 건강하게 자라는 젊은 세대들에 의해 새로운 기록들이 점점 쌓이며 그 가치를 높이는 동시에 자인교회가 여전히 건강한 공동체로 견고히 서있음을 증명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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