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계몽 앞장서고 신앙 정체성 100년 지켜낸 공동체

충북은 역사적으로 우리 교단의 교세가 강한 지역이 아니었다. 초기 선교사들의 예양협정 당시 감리교 담당지역이었던 충남과는 조금 경우가 다르지만, 비슷한 시기에 여러 교단들이 이 지역에 진입하여 활동하면서 할거한 영향이 크다. 게다가 1960년 교단 분열 당시 충북노회 소속 교회들 대부분이 예장통합 쪽을 선택하면서 더욱 저변이 약화됐다.

충북노회 산하 교회들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간직한 부강장로교회. 진리와 사랑의 통로로 우뚝 선 모습은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사진은 교회당 탑체의 모습.
충북노회 산하 교회들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간직한 부강장로교회. 진리와 사랑의 통로로 우뚝 선 모습은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사진은 교회당 탑체의 모습.

그래서 100년 역사를 지닌 부강장로교회(조용준 목사)의 존재는 몹시 귀하다. 2010년 출범한 세종특별자치시에 편입되며 행정구역상 변화는 생겼지만, 부강장로교회는 여전히 총회 산하 충북노회 교회들 중 가장 깊은 유서와 전통을 자랑하면서 지역적으로 큰 몫을 감당하고 있다.

1921년 3월 1일을 설립일로 정하여 지켜오기는 했어도, 사실 부강장로교회의 정확한 설립 연대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교회가 설립된 게 1921년 이전인 점은 확실하다는 것이 부강장로교회 100년사를 집필 중인 충북대학교 전순동 명예교수의 설명이다.

부강장로교회 설립 100주년을 맞이해 건립한 기념비.
부강장로교회 설립 100주년을 맞이해 건립한 기념비.

이 무렵 청주읍교회 부인전도회에서 안기환이라는 인물을 전도인으로 파송했는데, 그가 청주군 부용면 오대리에 부강교회(오대리교회)를 세운 것이 역사의 시작이었다. 1921년 6월 21일 서울 승동교회에서 소집된 경충노회 제20회 회의록에는 부강교회의 존재가 엿보이고, 1921년 8월 2일자 조선총독부 관보에는 부강교회 설립에 관한 기록이 게재되어있다.

부강장로교회는 초창기부터 청소년 교육에 힘쓰며 다음세대 사역에 큰 열매를 거두어왔다. 사진은 1953년의 유년주일학교 졸업식 모습.
부강장로교회는 초창기부터 청소년 교육에 힘쓰며 다음세대 사역에 큰 열매를 거두어왔다. 사진은 1953년의 유년주일학교 졸업식 모습.

놀랍게도 설립 당시부터 부강교회는 지역사회로부터 적잖은 성원을 받았다. 직전에 충청도 일대에서 일어난 3·1운동 당시 기독교인들의 역할이 지대했고, 청주선교부를 중심으로 교육과 의료선교를 통한 계몽활동에 앞장서온 모습들이 교회에 대한 호의적 분위기를 형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1922년 7월 15일자 동아일보에는 특이한 미담 기사가 실렸다. 그 주인공은 부강지역의 유지였던 박노태라는 인물이었다. 공익정신이 남달랐던 그는 신생 부강교회의 예배당이 몹시 비좁다는 점에 마음이 쓰였다. 그래서 자신의 땅 200평을 새 예배당을 짓도록 교회에 희사했다. 놀랍게도 이 기사는 당시 박노태가 기독교 신자도 아니었다고 증언한다.

설립 100주년 감사예배와 함께 복음을 위해 굳건히 행진할 것을 다짐하는 부강장로교회 성도들.
설립 100주년 감사예배와 함께 복음을 위해 굳건히 행진할 것을 다짐하는 부강장로교회 성도들.

새 예배당을 건축한 뒤 열린 부강교회의 헌당식 풍경도 대단했다. 훗날 대한민국 정부 부통령을 지내는 함태영 목사(당시 청주읍교회 담임)가 사회를 맡아 진행했고, 청신여학교 학생들이 합창순서를 맡았으며, 교인 수 30명 남짓한 교회의 헌당식에 무려 100여 명이나 되는 인원이 몰려왔다는 <기독신보>의 보도내용이 남아있다.

이러한 신망과 성원 속에 출발한 부강교회는 차츰 그 기대에 부응하는 면모를 보여주었다. 철저한 신앙을 통해 미신을 타파하고, 힘있게 복음을 전파하는 한편으로 남녀평등 사상을 널리 퍼뜨리고 절제와 근면의 생활을 선도했다. 보건정보 등 새로운 지식들을 제공하기도 했다.

당시 청주선교부에서 사역하던 밀러(한국명 민노아) 선교사가 부강교회의 이름을 기입해 대중들에게 배포한 전도지에는 이런 내용들이 나와 있다. ‘아기를 너무 많이 먹이지 마시오.’ ‘매일 끓인 물을 먹이시오.’ ‘젖은 기저귀를 오래 두지 마시오.’ ‘수족을 차게 하면 복통이 나기 쉬우니 항상 할 수 있는대로 수족을 덥게 해주시오’.

특히 한글교육과 야학 등을 통해 문맹을 극복하는 사업에 앞장선 수고가 커다란 결실로 돌아왔다. 1934년 서울 연희전문학교 학생들이 찾아와 한글강습회를 개최한 것이 그 계기였다. 첫날부터 100여 명의 어린이들이 몰려오면서 교회당 안에 다 수용할 수 없을 정도가 되자, 인근의 숲을 교육장으로 삼아 일주일 동안 교육을 실시했다.

한편으로는 학교에 다니지 못한 채 직업전선에 뛰어든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 노동야학을 개설해 운영하기도 했다. 1928년 10월 20일자 <조선일보>에는 부강교회에 개설된 야학에 60여 명의 청소년들이 몸담고 있으며, 무보수로 한글 산술 등을 교육한다는 내용이 보도된 바 있다.

빛나는 순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제강점기가 막바지에 이르던 시절에는 교회를 담임하던 김교인 영수가 만국부인기도회 사건으로 경찰에 끌려가 문초를 당하고, 하마터면 교회 문을 닫을 뻔한 수난을 겪었다.

또한 총회가 WCC문제로 분열하던 1960년에는 교인 일부가 이탈하여 부강중앙교회를 세우는 등 몇 차례 뼈아픈 갈등의 터널을 지나기도 했다. 하지만 시련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흔들리는 일은 없었고, 신학적 정체성을 끝까지 견지하며 우리 총회의 일원으로 본분을 잘 감당해왔다. 1995년에는 부강장로교회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⑤1922년 동아일보에 게재된 부강장로교회의 예배당 건축과 박노태씨의 기부에 관한 기사.
⑤1922년 동아일보에 게재된 부강장로교회의 예배당 건축과 박노태씨의 기부에 관한 기사.

설립 100주년을 앞두고는 ‘선교의 발자취를 따라서’라는 주제로 이 땅에 복음이 전래된 사적지들을 탐방하는 역사순례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예배당 리모델링을 통해 면모를 일신하기도 했다.

특히 지난해 11월 27일에는 총회장 배광식 목사와 증경총회장 김준규 목사 그리고 충북노회 동역자 등 하객들이 함께 한 가운데 100주년 기념예배를 열었다. 이날 교회 앞마당에 세워진 100주년 기념비와 충북노회에서 축하의 마음을 담아 식수한 기념목은 두고두고 교회의 자랑으로 남을 것이다.

조용준 목사는 “위기의 순간에도 언제나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과 신앙적 정체성을 지키는 데 충실했던 선배들을 본받아, 어떤 난관에도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믿음으로 나아가는 교회가 될 것”이라고 다짐했다.

[부강장로교회 조용준 목사]

“아낌없이 섬긴 정신 이어갑니다”

“교회보다 더 소중한 게 없으신 분들입니다. 어릴 적부터 예배당에서 자라왔고, 대를 이어 평생 꾸준히 신앙생활을 해온 분들이시니 본인들의 삶에 뿌리가 되는 교회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깊으실까요? 부강장로교회는 바로 그런 분들이 지키고 계십니다.”

4년째 부강장로교회에서 사역 중인 조용준 목사는 어떤 풍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교우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100년 역사에 배어있는 강력한 힘을 느낀다. 총회 산하 교회들 중 충북에서 가장 유서 깊은 공동체라는 자부심도 크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부강장로교회를 섬기는 조용준 목사에게 교회의 100년 역사는 부담이 아니라 크게 의지되는 힘으로 작용한다.
부강장로교회를 섬기는 조용준 목사에게 교회의 100년 역사는 부담이 아니라 크게 의지되는 힘으로 작용한다.

“부강장로교회를 이끌어온 믿음의 선조들은 야학을 운영하고 공민학교를 세워 사람들을 계몽하고 사회를 변화시킨 분들이었습니다. 강단을 지킨 교역자들 중에서는 일제강점기에 고초를 당한 이력을 가졌거나, 순교자 집안 출신인 분들도 계십니다. 또한 이웃교회들이 WCC라는 거대한 흐름을 좇아갈 때 홀로 남아 신학적 정체성을 지킨 역사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100주년을 맞이한 올해 부강장로교회는 감사예배, 기념비 건립, 교회사 발간 등 여러 기념행사들을 추진하는 한편으로 면사무소와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한 불우이웃돕기 기부, 관내 초중등학교들을 위한 장학금 전달식, 미래자립교회들을 위한 지원 등 가까운 이웃들을 섬기는 사업에 집중했다. 또한 앞으로도 매년 이 같은 사업들을 지속해나갈 계획이다.

하지만 만만치 않은 도전들도 기다린다. 대전 청주 세종 등 인근의 도회지들로 인구가 계속 유출되는 현상, 더불어 인구는 줄어드는데 독거노인 외국인노동자 등 1인 가구들의 증가로 가구 수는 오히려 늘어나는 현상 등은 교회에 새로운 역할들을 요구하고 있다.

“급격하게 변화하는 목회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사실 목회자 입장에서 가장 큰 과제입니다. 그러나 목회자 입장에서 어떤 가시적인 결과를 얻겠다고 교우들을 탈진에 이르도록 몰아붙이는 방식은 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 기뻐하시는 뜻을 먼저 헤아리고 순종한다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섬기는 중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100년을 시작하는 원년의 표어를 조용준 목사는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로 정하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교회, 지역사회에 복의 근원이 되는 교회, 힘들어 지친 영혼들이 쉼을 얻는 교회를 지향해나간다. 그 길 끝에는 또 어떤 소중한 역사들이 기록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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