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선교 개척자로 활약하며 생명 바쳐 한국교회 섬겨

“한국만큼 사역자가 필요한 나라가 없고, 한국인만큼 복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민족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교회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문이 활짝 열렸으니 일어나 일하러 가라. 우리 어깨 위에 이 엄청난 책임이 부과되어 있다!”

1891년 10월 미국 테네시주 내슈빌에는 수많은 젊은 신학생들이 모여, 열정적인 강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6년 전 미지의 땅 한국으로 떠났던 장로교 선교사 호레이스 언더우드(한국명 원두우)는 첫 안식년을 맞아 귀국한 후, 전국을 돌며 젊은 복음사역자들에게 한국선교에 동참할 것을 독려하는 메시지를 전했다. 그의 강연에는 한국에서 건너와 유학 중이던 윤치호도 동행했다.

두 사람의 호소는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 중에는 매코믹신학교에 재학 중이던 루이스 테이트와 유니언신학교의 윌리엄 레이놀즈가 있었다.

①호남선교의 개척자들인 미국남장로교선교부 파송 ‘7인의 선발대’의 흉상이 호남기독교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오른쪽부터 윌리엄 레이놀즈. 팻시 볼링, 매티 테이트. 루이스 테이트, 리니 데이비스, 매리 레이번, 윌리엄 전킨 선교사. ②루이스 테이트 선교사와 그의 아내이자 예수병원 설립자인 마티 잉골드 선교사가 말을 타고 전도여행을 다니는 모습. ③전주에서 한국인 성도들과 함께 우리말 성경번역 작업에 한창인 윌리엄 레이놀즈 선교사. ④군산 멜볼딘여학교의 학생들과 학교 설립자인 매리 레이번 선교사. ⑤윌리엄 전킨 선교사의 가족사진. ⑥전염병으로 숨진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의 묘소 앞에 선 전주의 선교사들.
①호남선교의 개척자들인 미국남장로교선교부 파송 ‘7인의 선발대’의 흉상이 호남기독교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오른쪽부터 윌리엄 레이놀즈. 팻시 볼링, 매티 테이트. 루이스 테이트, 리니 데이비스, 매리 레이번, 윌리엄 전킨 선교사. ②루이스 테이트 선교사와 그의 아내이자 예수병원 설립자인 마티 잉골드 선교사가 말을 타고 전도여행을 다니는 모습. ③전주에서 한국인 성도들과 함께 우리말 성경번역 작업에 한창인 윌리엄 레이놀즈 선교사. ④군산 멜볼딘여학교의 학생들과 학교 설립자인 매리 레이번 선교사. ⑤윌리엄 전킨 선교사의 가족사진. ⑥전염병으로 숨진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의 묘소 앞에 선 전주의 선교사들.

이들은 매일 오후 3시, 자신들의 기숙사 방문까지 걸어 잠근 채 깊이 기도하며 한국행을 결심하고 준비를 시작했다. 1892년 발간된 <The Missionary>에는 레이놀즈 그리고 한국선교에 의기투합한 같은 신학교의 윌리엄 전킨의 ‘우리는 왜 한국에 가고 싶은가’라는 글이 실렸다.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한국행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의가 그 글에 담겼다.

여기에 한국선교를 위한 재정후원까지 더해진다. 호레이스 언더우드의 형으로 타자기 사업을 통해 성공을 거두고 있던 존 언더우드가 미국남장로교선교부에 3000달러를 먼저 기부했고, 동생인 언더우드 선교사 또한 500달러를 추가로 헌금한다. 이들 형제는 미국북장로교 소속이었지만, 한국선교를 돕고자 다른 교단 선교부에 기꺼이 거액의 성금을 전달한 것이다.

마침내 미국남장로교선교부는 테이트, 레이놀즈, 전킨의 한국선교사 파송을 결정한다. 이들 3명에다 테이트의 여동생 매티 테이트, 레이놀즈의 아내 팻시 볼링, 전킨의 아내 매리 레이번, 여기에 홀몸으로 동참한 리니 데이비스까지 4명의 여성들이 합류해 일행이 구성된다. 이렇게 한국을 찾아온 일곱 명의 선교사들을 역사는 ‘7인의 선발대’ 혹은 ‘7인의 개척자’라 부른다.

이들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해,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인천 제물포로 상륙한다. 이듬해 각국 선교부의 예양협정에 따라 7인의 선발대에게는 호남선교의 임무가 부여된다. 이들의 첫 목적지는 당시 전라도의 대표도시 전주, 레이놀즈의 어학선생 역할을 하던 한국인 조사 정해원이 1893년 늦은 봄 먼저 출발한다.

정해원이 전주 은송리에 마련한 거점은 전주선교부의 기지가 되었고, 그가 전도한 사람들은 첫 성도들이 되었다. 테이트 레이놀즈 등 차례차례 전주로 합류한 선교사들은 호남의 모태교회인 전주서문교회를 비롯해, 예수병원 신흥학교 기전학교 등 복음전파를 위한 발판들을 성공적으로 마련한다.

한편으로 전킨은 의료선교사인 알레산드로 드류와 함께 군산선교부를 개척해 호남선교의 또 다른 거점을 만든다. 이후로 목포 광주 순천 일대에 차례로 선교부가 개설되고, 성실하고 열의 넘치는 선교사들의 활약 속에 수많은 교회 학교 병원들이 세워진다. 그리고 이들의 사역반경은 호남지역에만 머물지 않았다.

레이놀즈(한국명 이눌서)의 경우는 높은 수준의 언어학 재능을 활용해 한국어 성경번역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1920년 신구약 성경 완역을 이루어냈으며, 1917년에는 평양신학교 교수로 부임해 1937년 일제의 강압으로 학교가 문을 닫을 때까지 <신학지남> 편집인으로 활약한다.

그의 아내 팻시 볼링은 선교사였던 어머니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당초 교사로 활동하다가 결혼 후 한국선교사로 자원하면서, 남편과 함께 서울 전주 목포 평양 등지에서 활동했다. 레이놀즈와 팻시 볼링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 존과 막내 엘라 역시 순천 등지에서 사역하며 3대째 선교사 가문의 맥을 이었다.

루이스 테이트(한국명 최의덕)에게는 복음 전도와 교회 개척에 큰 은사가 있었다, 전주서문교회의 초대 담임목사직을 시작으로, 전북 내륙 곳곳을 오가며 무려 78개 처의 교회를 개척했다. 그를 통해 목사 5명, 장로 21명 등 장차 한국교회를 이끌어갈 지도자들도 세워졌다. 그는 지병이었던 심장병이 악화되어 더 이상 선교사직을 수행할 수 없자 1925년 귀국했다.

루이스의 여동생 매티 테이트(한국명 최마태)는 일생 동안 독신으로 지내며 능통한 한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어린이전도와 여성전도를 통해 수많은 열매를 거두었다. 루이스가 한국에서 만나 결혼한 마티 잉골드 또한 예수병원을 설립하여 의료선교의 초석을 놓으며 대한민국 근대의학 발전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이 땅에서 생을 마친 이들도 있었다. 리니 데이비스는 당초 사역지로 아프리카를 희망했다가 한국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7인의 선발대 중 가장 먼저 한국 땅을 밟은 그녀는 쉬지 않고 복음을 전하며, 1년 동안 무려 1885명을 전도하는 기록을 남긴다. 1898년 윌리엄 해리슨(한국명 하위렴) 선교사와 결혼한 후에도 열정적인 전도자로 활동하다가, 1903년 전주에서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는다.

군산선교의 개척자인 윌리엄 전킨(한국명 전위렴)은 스스로 과중한 업무를 수행하다 한국 땅에서 여러 번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하지만 어떤 두려움과 시련도 그의 타고난 성실함을 막아내지 못했다. 오죽하면 선교부에서 전킨에게 반경 5km 이상을 벗어나 사역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을 정도였다. 결국 그는 1907년 성탄절에 발병한 폐렴으로 이듬해 1월 별세한다.

아내 매리 레이번(한국명 전부인) 남편과 사별 전, 먼저 어린 세 아들을 이 땅에서 풍토병으로 잃었다. 하지만 그는 실의에 빠지지 않고 군산 멜볼딘여학교(현 영광여고)를 설립하는 등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1908년 귀국한 후에도 남편을 추모하는 뜻으로 미국에서 모금활동을 벌여서, 전주서문교회에 커다란 종을 선물한다. 당시 건립된 종탑은 지금까지 남아있다.

오늘날 전라도 일대가 대한민국 최고의 복음화율을 자랑하는 지역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데는 7인의 선발대를 비롯한 미국남장로교 선교사들의 헌신이 자리하고 있다. 호남 기독교인들의 영적 족보에 서두를 차지한 이들의 행적을 그 영적 후예들은 마땅히 기억하고 계승해야 할 것이다.

전주대학교 호남기독교박물관에서 특별전시 중인 최미정 화가의 작품 ‘7인의 선교사 전주 입성’.
전주대학교 호남기독교박물관에서 특별전시 중인 최미정 화가의 작품 ‘7인의 선교사 전주 입성’.

7인의 선발대 발자취 찾아서

전주대학교 스타센터 입구에 자리잡은 호남기독교박물관은 ‘7인의 선발대’에 대한 개략적 소개로 전시실 첫 머리를 장식하고 있다. 호남선교의 연원이 이들에게서 비롯되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이들의 헌신을 통해 복음이 어떻게 호남 전역으로 번져나가고 꽃피웠는지를 한 눈에 살필 수 있게 전시물들을 구성해놓았다.

특히 호남기독교박물관은 ‘미스터 션샤인’이라는 부제로 5월 31일까지 기획전시실에서 ‘7인의 선발대’ 특별전시회를 마련한다. 일곱 선교사들의 면면과 이들의 구체적인 활약상들을 확인할 수 있다.

예수병원 맞은편 언덕의 전주 선교사묘역에는 윌리엄 전킨 선교사와 세 아들 그리고 리니 데이비스 선교사의 묘소가 조성되어 있다. 여기서 지척인 전주서문교회를 방문하면, 전킨 선교사를 추모하기 위해 아내 매리 레이번이 모금해 건립한 종탑이 옛 모습 그대로 서있다. 김제 금산교회, 군산 구암교회와 개복교회 등의 역사관에서도 이 땅을 위해 헌신한 테이트와 전킨에 관한 자료들을 전시 중이다.

‘7인의 선발대’ 멤버들의 실제 유품과 사료들은 뜻밖에도 대전 한남대학교에서 찾을 수 있다. 호남선교의 주역들이 훗날 충남선교에 착수하면서 상당수 자료들을 대전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한남대박물관은 레이놀즈 선교사가 사용했던 물건과 각종 수집품 등을 소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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