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노회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부여 옥곡교회의 예배당 전경.
충청노회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부여 옥곡교회의 예배당 전경.

1세기 넘게 마을 지킨 섬김 공동체

■옥곡교회

충남 서남부는 선교 초창기 다양한 교파들이 유입되어 활동하는 지역이었다. 감리교는 예양협정에 따라 충청권 전역을 관할하고 있었고, 침례교는 한국에서 최초의 교회를 이 지역에 세웠다. 장로교의 기세도 만만치 않았다. 가까운 전북 군산의 장로교 선교부가 그 중심에 있었다.

총회에 소속된 충남지역 교회들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부여 옥곡교회(현성귀 목사)는 이런 배경 속에서 설립됐다.

현성귀 목사는 마을복음화라는 사명이 여전히 옥곡교회에 남아있다고 강조한다.
현성귀 목사는 마을복음화라는 사명이 여전히 옥곡교회에 남아있다고 강조한다.

군산 궁멀에 선교센터를 세운 미국남장로교 소속 선교사들은 배편을 이용해 서해안 일대를 오르내리며 복음을 전하는가하면, 말을 타고 내륙을 누비다가 교회를 세웠다. 부여와 서천의 경계에 위치한 임천면 일대에도 1890년대부터 선교사들의 발길이 닿았다. 포교에 감화된 사람들이 옥곡리 196번지 다섯 칸짜리 기와집에서 모여 예배한 것이 옥곡교회의 시작이었다.

1903년 드디어 정식으로 교회 설립이 이루어졌고, 초대 당회장은 윌리엄 불(한국명 부위렴) 선교사가 맡았다. 훗날 초대장로로 임직한 김경조를 비롯한 헌신적인 성도들이 있어 옥곡교회는 꾸준히 성장해 갈 수 있었다.

1930년대에 작성된 당회록과 교인명부 등의 문서들. 철저한 권징으로 교회의 순결을 지켰던 기록들이 남아있다.
1930년대에 작성된 당회록과 교인명부 등의 문서들. 철저한 권징으로 교회의 순결을 지켰던 기록들이 남아있다.

군산선교부와 옥곡교회와의 관계는 꾸준했다. 불 선교사 뒤이어 해리슨(한국명 하위렴) 선교사는 옥곡교회를 비롯해 초왕 지석 오덕 청포교회 등 부여군 일대 여러 교회들을 돌보았다는 기록이 정규태 저 <충남노회사>에 남아있다.

옥곡교회가 두 번째 예배당을 얻어 이전할 때는 군산에서 선교사 한 사람이 찾아와 교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당시 교회의 일꾼이던 김봉갑 장로와 김명규 집사에게 각각 요한과 바울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는 구전이 지금까지 내려온다. 6·25 전쟁기에 순교한 염산교회 김방호 목사와 그 가족들이 옥곡리에 머물러 지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옥곡교회의 과거 상세한 역사는 더 이상 알 길이 없다. 일제강점기와 6·25라는 두 차례의 수난기를 거치며 대부분의 역사자료들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폐쇄 위기에 처한 교회의 중요문서들을 동네 산에 묻어두었다가 회수하려했으나, 훗날 일대를 샅샅이 뒤졌어도 끝내 되찾지 못했다는 일화가 안타까울 따름이다.

옥곡교회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자료들은 1930년대에 작성된 당회록 일부와 세례문답 관련 기록들 그리고 교인명부 등이다.

1980년대 옥곡리 마을과 성도들의 모습.
1980년대 옥곡리 마을과 성도들의 모습.

이 문서들에는 교인들에 대한 책벌에 대한 내용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불신자와 결혼한 교인, 시댁 식구들과의 불화로 가출한 교인 등에 대해 어떤 징계가 내려졌고 또 어떤 식으로 해벌이 이루어졌는지가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당시 엄격한 권징으로 성도들 행실을 세상에 본이 될 수 있도록 관리했던 교회의 분위기가 엿보인다.

옥곡교회와 오랜 세월 애환을 함께 한 종 하나가 예배당 앞을 지키고 있다.
옥곡교회와 오랜 세월 애환을 함께 한 종 하나가 예배당 앞을 지키고 있다.

이들 문서는 옛 강대상 그리고 예배용으로 사용하던 찬송가 궤도 등과 함께 2010년 총신대 박물관에 기증된 상태이다. 대신해서 1991년 총회80주년 기념대회와 2014년 제100회 총회를 맞아 각각 수여된 기념패들과, 오랜 세월 교회 곁을 지킨 옛 종 하나가 보물처럼 남아있다.

현재 옥곡교회의 예배당은 1982년 산 위에서 마을 가까이로 옮겨 지은 건물이다. 한 때 200명이 넘는 교세를 자랑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30여 명의 성도들이 출석하는 작은 공동체로 변했다. 그럼에도 온갖 풍파 속에서 100년도 훨씬 넘게 교회를 지켜왔다는 자긍심과 사명감이 성도들 가슴에 가득하다고 현성귀 목사는 말한다.

“아직 옥곡교회에는 마을복음화라는 과제가 있습니다. 연로한 이웃들에게 반찬을 나누고 집 안 청소를 도와 섬기며, 최근 늘어나는 귀촌가정들에 열심히 복음을 전하면서 예수 마을을 만들어가는 일에 앞으로도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오량교회는 충남 부여와 서천 일대에 복음을 전파하고 수많은 교회들을 세우는 모태역할을 감당해왔다. 사진은 예배당 전경.
오량교회는 충남 부여와 서천 일대에 복음을 전파하고 수많은 교회들을 세우는 모태역할을 감당해왔다. 사진은 예배당 전경.

대표적 장로교회 위상 굳건히 지켜

■오량교회

옥곡교회로부터 불과 십오리 떨어진 곳에 또 하나의 유서 깊은 신앙공동체가 있다. 바로 부여군 양화면 오량리에 소재한 오량교회(김대순 목사)이다.

오량교회는 옥곡교회와 비슷한 연륜과 지역적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서로가 걸어온 길, 특히 그 출발점은 크게 달랐다.

김대순 목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공동체로 오량교회를 이끌어갈 것을 다짐한다.
김대순 목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공동체로 오량교회를 이끌어갈 것을 다짐한다.

이 일대에서 가장 먼저 생긴 개신교회는 캐나다침례교의 말콤 펜윅 선교사를 통해 세워진 임천면의 칠산리교회이다. 양화면 초왕리에서도 상당수의 교인들이 칠산리까지 왕래하며 신앙생활을 하다 초왕리교회, 곧 현재의 오량교회를 설립했다.

하지만 침례교 영향력 아래 있던 초왕리교회는 선교지원이 끊어지면서 자생할 방법을 찾아야 했고, 결국 지척에 있던 미국남장로교 군산선교부에 도움을 청했다. 1898년 3월 10일은 초왕리교회가 장로교회로 새 출발한 날이자, 오늘날까지 정식 설립일로 지키는 날이다.

선교사들을 도와 교회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은 초왕리 출신의 고내수 씨였다. 교회가 세워지기 훨씬 이전인 1891년 예수님을 영접한 것으로 전해지는 고내수 씨는 교회 영수로서 자신의 고향마을 뿐 아니라 부여와 서천 일대를 교우들과 함께 종횡무진하며 복음을 전했다.

이 같은 활약에 힘입어 1905년에 이르면 초왕리교회는 300여 명의 성도들이 출석하는 커다란 공동체로 성장했고, 1907년에는 옥산교회 청포교회 지석교회 성산교회 마명교회 오덕교회 등 여러 교회를 분립하며 지역의 모태교회로서 역할을 충실히 했다. 또한 전라노회를 비롯해 이후 전북노회 군산노회 충남노회 충청노회가 출범하는 긴 세월동안 늘 주축으로 활약했다.

크고 작은 시련들도 있었다. 1918년에는 인근 종지동교회의 파동 속에서 낙심하거나 배교하는 이들이 적잖게 발생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신사참배 강요로 인한 수난 그리고 6·25 당시에는 고내수 영수의 자손들 여럿이 인민군들에게 목숨을 잃는 희생을 겪어야 했다.

1998년 3월 10일 건립한 오량교회 설립 100주년 기념비.
1998년 3월 10일 건립한 오량교회 설립 100주년 기념비.

하지만 부여와 서천 일대는 물론 충남을 대표하는 장로교회로서 위상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1919년 3·1운동에는 초왕리교회 출신의 오기선 성도가 지도자로 앞장섰고, 일제의 온갖 핍박 속에서도 1939년 기독청년면려회(CE)를 조직하고 음악대를 앞세운 순회전도 활동을 전개하는 영적 집념을 과시했다. 그 사이 예배당을 오량리에 신축해 이전하며 오량교회로 개명도 했다.

설립 이후 124년의 세월이 흘러온 지금까지도 오량교회의 품격은 건재하다. 인근 교회나 이웃들에 어려움이 닥치면 가장 먼저 발 벗고 나서는 것은 역시 오량교회이다.

근간에도 화재를 당하거나 어려운 재정형편에서 건축을 준비하는 교회들에 아낌없이 거액을 희사하고, 지역 미자립교회 목회자들을 매년 한 사람씩 선정해 해외여행을 보내주는 사업을 지속했다.

코로나19 사태가 확산되는 속에서 어려운 교회들을 선정해 100만원씩의 재난지원금을 전달하고, 은퇴목사 부부들을 위로하는 행사를 준비하는 등 오량교회의 선행은 끝없이 이어진다.

한편으로는 매주 화요일 전도특공대를 통한 복음전도와 구제사역이 활발하게 전개돼 농촌교회로서는 드물게 꾸준히 새 가족이 유입되고, 주일학교 사역 또한 탄탄히 이루어지는 중이다. 이농현상 등 시대환경이 가져다 준 한계는 뚜렷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 전성기 때처럼 300명의 성도들이 모여 예배하는 공동체로 다시 발돋움하는 것이 현재 오량교회의 목표다.

1990년대 오량교회 성도들의 모습.
1990년대 오량교회 성도들의 모습.

제29대 담임목사로 오량교회를 이끌고 있는 김대순 목사는 “나눔과 섬김으로 긍지의 역사를 계승하는 것 못지않게 신앙적 정체성을 지키는 것도 우리의 중요한 과제로 생각한다”면서 “교리교육에 힘써 이단과 반기독교 사상에 대처하며, 바르고 건강한 신앙공동체로 나아가는 모습을 앞으로도 보여줄 것”이라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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