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묘지는 퇴락했어도 그 정신 여전히 살아

임금산을 오르는 과정은 순탄치 않다. 잘 닦인 길은커녕 허술한 진입로조차 만들어지지 않은 가파른 풀숲을 일행들 전원이 헉헉거리면서 올라간다.

비탈 여기저기에는 크고 작은 봉분들이 놓여있다. 지금으로부터 백여 년 전, 어쩌면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이 산을 인근에 살던 경북 청도 사람들은 월봉산이라고도 부르며 공동묘지로 사용해왔다. 우리는 그 속에 숨어있는 묘소 하나를 찾아야 한다.

순교자 이창기 집사가 묻혀있는 경북 청도 임금산의 묘소. 비석은커녕 아무도 돌보는 이가 없어 봉분은 무너지고 잡목들이 뿌리를 내린 모습으로 방치된 상태이다.
순교자 이창기 집사가 묻혀있는 경북 청도 임금산의 묘소. 비석은커녕 아무도 돌보는 이가 없어 봉분은 무너지고 잡목들이 뿌리를 내린 모습으로 방치된 상태이다.

앞장서 걷던 향토문화운동가 김진태 장로(부산 다대중앙교회)의 발길이 멈춘다. 그리고 “여기입니다”라며 그가 가리키는 손끝을 따라 시선을 보내던 모두가 스스로의 눈을 의심한다.

그것은 아무리 보아도 도저히 사람의 무덤이라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 장로의 손가락은 봉분의 모양이라고는 진작 사라진 야산의 한 자리, 이미 깊이 뿌리를 내린 나무들이 불쑥불쑥 솟아있는 바로 그 지점을 향하고 있었다. 순교자가 거기 비석조차 없이 묻혀있었다.

온막교회 현 예배당 앞에서 이창기 집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대신대학교 김병희 교수, 온막교회 김덕현 담임목사, 향토문화운동가 김진태 장로.
온막교회 현 예배당 앞에서 이창기 집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대신대학교 김병희 교수, 온막교회 김덕현 담임목사, 향토문화운동가 김진태 장로.

이창기 집사는 경북 청도면 상남면 온막동에서 태어나 장성한 후에도 그곳에서 쭉 살아왔다. 27세 나이에 이웃마을 금천리에 살던 양 씨와 결혼을 해 아들 의생을 얻기도 했다. 그는 개항과 함께 우리 땅에 밀려들어온 서양문물에 대한 소식들을 종종 전해 듣고 관심을 두던 차에, 1905년 어느 날 마을 친구 금석범과 함께 한 서양인을 만나게 됐다.

그 서양인의 이름은 에드윈 프로스트 맥파랜드, 한국이름으로는 맹의와라고 불렸다. 미국북장로교 파송을 받아 1904년 한국에 선교사로 온 그는 경북북부 일대를 순회하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던 중이었고, 그 과정에서 이창기 집사도 마주친 것이었다.

이창기 집사의 가슴은 순식간에 복음으로 사로잡혔다. 깊은 감동 때문이었는지, 타고난 근면함 때문이었는지 맹의와 선교사를 만난 그날로 이창기 집사는 열정적인 전도자가 되었다. 온 가족을 기독교로 개종시킨 것은 물론, 주변 온 마을을 돌아다니며 열심히 전도해 1905년 6월 명대동교회(현 온막교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길지 않았던 자신의 인생 최후 순간마저 그는 전도로 마침표를 찍었다. 1908년 5월 19일의 일이었다.

청도군 매전면 온막리의 골목길. 평화로워 보이는 이곳에서 이창기 집사는 일본 군인들에게 전도하다 목숨을 잃었다.
청도군 매전면 온막리의 골목길. 평화로워 보이는 이곳에서 이창기 집사는 일본 군인들에게 전도하다 목숨을 잃었다.

간밤을 예배당에서 꼬박 새우며 기도하다 새벽이 되어서야 귀가하던 그의 길을 일본군인 여럿이서 둘러싸며 검문을 시작했다. 그 무렵 청도일대에는 의병장 신돌석과 김병희 같은 인물들이 일어나, 을사조약 체결 등으로 국권을 침탈하는 일제에 강력하게 맞서고 있었다. 자연히 지역주민들에게 대한 삼엄한 감시와 경계가 뒤따랐다.

총검을 들이대며 일본군인은 “어디에 다녀오느냐?”고 물었다. “교회에서 기도하고 오는 길”이라고 대답하자, 마침 안면이 있던 통역관이 지금은 위험하니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이 집사에게 일렀다. 하지만 이 집사에게는 그 위태한 상황에서도 일본 군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픈 열정이 치솟았다.

“당신들은 이 땅의 나라를 위하여 새벽이슬을 맞으면서 수고하지만, 진정한 구원을 얻는 길은 오직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천당 가시오!”

흠잡을 데 없는 이야기였지만, 문제는 통역관이 복음을 잘 알지 못하는 데다 전달 능력마저 모자란 사람이라는 데 있었다. 일본 군인들은 이 집사가 자신들을 욕하고, 천황까지 모독한다고 오해했다. 그들은 몹시 분노하며 총검으로 이 집사의 가슴을 마구 찌르기 시작했다. 피가 치솟았다.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32세로 생을 마치는 이 집사의 마지막 음성이었다.

신실한 동역자의 황망한 부고를 전해들은 맹의와 선교사가 급히 달려와 이 집사의 시신을 수습해 교회당에 안치했다가, 교인들과 함께 임금산 중턱에 안장했다. 그리고는 청도군수와 일본군사령부를 향해 강력히 항의했다.

그러나 일제는 이 집사를 오히려 폭도로 몰고 가면서, 남은 가족들에 대한 감시와 핍박까지 가했다. 견디다 못한 이 집사의 아내는 여섯 살 난 아들을 데리고 멀리 서간도로 떠났다. 이 집안의 비극은 서간도로 이주한 겨울에 아들 의생마저 추위에 목숨을 잃고, 아내의 행방은 알 수 없게 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창기 집사가 맹의와 선교사와 함께 세운 청도 온막교회의 첫 예배당 터.
이창기 집사가 맹의와 선교사와 함께 세운 청도 온막교회의 첫 예배당 터.

그렇게 아무도 돌봐주는 이 없던 이 집사의 무덤은 오랫동안 방치되고 훼손되는 지경에 이르렀고, 세월 속에서 그 존재감 또한 잃어갔다. 다만 경북노회사에 그 과거사적이 기록되었던 사실을 기억한 김진태 장로와 대신대학교 김병희 교수 등이 관련 자료들을 발굴하고, 현장을 꼼꼼히 답사해 결국 남은 자취를 찾아낸 것이다.
이 집사가 세운 온막교회(김덕현 목사)는 처음의 위치에서 자리를 옮겨 마을 중심지에 자리잡으며 지금까지 탄탄한 교세를 유지하는 중이다. 교회당 부근에는 이 집사가 순교한 터가 넒은 골목길의 모습으로 여전히 남아있다.

이날 일정에 동행해 현장들을 함께 돌아본 김병희 교수는 2018년 발간된 <대경노회 은혜의 백년사>를 집필하며 이창기 집사를 의성의 권중하 전도사, 엄주선 강도사와 함께 대구 경북을 대표하는 순교자로 언급한 바 있다.

김 교수는 “이창기 집사의 사례는 일제강점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이전에 발생한 흔치 않은 순교사적”이라면서 “그럼에도 아직까지 어느 장로교단에서도 이 집사에 대한 공식적인 순교자 지정이나 사적지 지정 등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라며 안타까워 한다.

하마터면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질 뻔 했던 이창기 집사의 사적을 기리는 움직임이 조만간 본격화 될 것이다. 순교자의 피가 이 땅의 교회를 살아남게 하는 힘이라는 사실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그가 바친 목숨에 빚을 진 믿음의 후예들인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지는 분명하다.

[김병희 교수가 이야기하는 대구경북의 순교자들]

다른 시대 같은 신앙으로 지탱하다

경북 청도의 이창기 집사는 개항 이후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현실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서양종교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1905년 맹의와 선교사를 만나 복음을 듣고 기독교인이 되었고, 그의 도움으로 청도 산동지역 최초의 교회인 명대동교회(현 온막교회)를 설립했다.

그로부터 3년 후 자신의 집 앞에서 검문하는 일본 군인들을 만나, 복음을 전하고 싶은 뜨거운 마음으로 전도하다가 오해를 받아 그들의 총검 앞에 목숨을 잃었다. 그는 일제의 식민지지배 시기에 한국교회의 첫 순교자였으나 후손이 없어서인지, 우리들의 기억에서 잊혔는지 그의 무덤을 돌보는 사람이 없어 잡목만 무성하다.

의성 중리교회에 건립된 순교자 권중하 전도사의 순교기념비.
의성 중리교회에 건립된 순교자 권중하 전도사의 순교기념비.

경북 의성의 권중하 전도사는 대구동산병원 제2대 원장이던 플래처 선교사의 감독 아래 권서인으로 활동했다. 1938년 경북노회 제36회 2차 임시회에서 의성 춘산지방 효선교회 빙계교회(현 중리교회) 금천교회 옥정교회(현 춘산교회) 현리교회 산운교회의 전도사로 시무하도록 허락받았다.

부임 당시 경북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했음에도 이에 가담하지 않아, 약 1년간 의성경찰서에 수감과 출감을 반복하면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가까스로 출감했지만 잠시 옥정교회에서 요양하던 중에 소천됐다. 그로부터 72년이 지난 2017년 7월 17일 총회 순교자 등재 감사예배가 거행됐다.

경북 의성의 엄주선 강도사는 1935년 복음을 받고 예천 상락교회에서 믿음생활을 시작했다. 부친을 따라 만주로 이주했다가 해방 후 귀국해 장로회신학교에서 수학했으며, 1950년 5월 청송 화목교회에 부임해 시무하던 중 경북노회 제47회 정기회에서 강도사 인허를 받았다.

청송 화목리에 조성된 순교자 엄주선 강도사의 묘역(사진 아래).
청송 화목리에 조성된 순교자 엄주선 강도사의 묘역.

1951년 2월 14일경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홀로 기도하던 엄 강도사를 인민군 패잔병들이 납치해 춘산면 옥정동 바랑골로 끌고 갔다. 사흘 후 엄 강도사는 예수를 부인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인민군의 위협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복음을 전하다가 그들의 총검에 19군데를 찔려 순교했다. 시신은 10여일 후에 발견됐고, 경북노회는 3월 14일 시찰장으로 장례식을 거행한 후, 그를 기리기 위해 청송군 현서면 화목리의 묘역에 순교비를 건립했다.

한국교회의 성장은 순교자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들을 기억하고 그들이 남긴 믿음의 유산을 계승하는 것이 우리들의 몫일 것이다.

김병희 교수(대신대학교 역사신학)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