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최전선, 치료 힘쓰며 일제에 저항

10월 한 달은 선물처럼 우리 겨레를 찾아와 진정한 ‘내 편’이 되어주었고, 헌신적인 섬김으로 뜨거운 감동을 안겨주었던 선교사들을 다시 생각하는 연속기획으로 꾸민다.

최근 한꺼번에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지정된 3인의 의료선교사들, 한글날에 다시 만나는 호머 헐버트 선교사, 창립 100주년을 맞은 동산의료선교복지회의 기념집 ‘한 알의 밀알 되어’에 등장하는 대구 청라언덕의 선교사들이 그 주인공이다. <편집자 주>

국가보훈처에서 2021년 9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한 캐나다 출신의 의료선교사들을 소개하는 포스터.
국가보훈처에서 2021년 9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한 캐나다 출신의 의료선교사들을 소개하는 포스터.

국가보훈처(처장:황기철)는 2021년 9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미국북장로교 소속 올리버 애비슨, 캐나다장로교 소속 로버트 그리어슨과 스탠리 마틴 등 3명의 외국인 의료선교사들을 선정했다.

1992년 독립기념관에서 ‘이달의 독립운동가’ 발표를 시작한 이래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와 조지 애쉬모어 피치 등 6명의 외국인들이 앞서 선정된 바 있으나, 서양인 의료선교사들이 그것도 동시에 3명이나 나란히 선정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과연 어떤 족적을 남겼기에 100년 전 그들의 삶을 대한민국 그리고 한국교회가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지 살펴보자.

■올리버 애비슨(Oliver R. Avision)
(1860~1956, 건국훈장 독립장)

올리버 애비슨
올리버 애비슨

“일본 관헌을 공격하는 선교사가 있다.”

헌병의 보고서에는 노골적인 적대감이 드러났다.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온 겨레의 만세운동이 일어나면서, 일제는 그 거점으로 의심되는 곳에 대한 전면적 압수수색에 나섰다. 하지만 그 때마다 불법이라 주장하며 가로막는 서양인이 존재했으니 바로 올리버 애비슨이었다.

애비슨은 캐나다 토론토대학교에서 의대과정을 마친 후, 1892년 미국북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찾아왔다. 앞서 토론토대학을 방문한 언더우드 선교사의 감동적인 강연이 한국행의 계기가 됐다.

세브란스병원 원장으로 일본 고위관리들에게 한민족의 3·1독립정신을 대변해 준 올리버 애비슨 선교사의 은퇴소식을 전하는 &lt;매일신보&gt; 1934년 2월 23일자 기사.
세브란스병원 원장으로 일본 고위관리들에게 한민족의 3·1독립정신을 대변해 준 올리버 애비슨 선교사의 은퇴소식을 전하는 &lt;매일신보&gt; 1934년 2월 23일자 기사.

제중원 원장과 고종황제의 시의를 겸하던 그는 1900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세계선교대회에 참석하여, 한국 의료선교를 위한 후원을 호소했다. 그 결과 기독실업인인 루이스 세브란스로부터 1만 달러 기부를 받았고, 이 자금으로 1904년 제중원 건물을 신축하며 병원 이름도 오늘날과 같은 ‘세브란스병원’으로 개명했다. 1916년 연희전문학교가 설립되자 교장직도 맡았다.

한국인들에 대한 사랑이 깊었던 애비슨은 3년 후 만세운동이 벌어지자 대놓고 한국인 편에 섰다. 시위 중 부상을 당해 병원을 찾아온 환자들을 적극적으로 치료하고 보호했으며, 이들을 체포하려는 일제에 손수 맞서 저항했다. 세브란스병원과 연희전문학교 수색이 벌어질 때도, 헌병과 경찰들에게 영장을 내놓으라고 목소리를 높이며 앞을 막아섰다.

뿐만 아니었다. 총독부 고위관리들이 선교사들을 초대해 협조를 당부하는 자리가 있을 때마다 반드시 참석해 한국인들의 불만을 대신 전하는 발언을 했고, 집회와 출판의 자유를 허락하라고 요구했다. 3·1운동의 실상을 알리는 비망록을 작성해, 당시 한국을 방문했다 귀국하는 선교총무 암스트롱을 통해 미국 장로교단과 감리교단에 전달하며 대책을 촉구한 것도 그였다.

한국인들에게는 진정한 친구, 일본인들에게는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던 애비슨은 1935년 은퇴하여 한국을 떠났다. 하지만 미국으로 돌아가서도 기독교인친한회((The Christian Friends of Korea) 총무와 재무를 맡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는 역할을 했다. 195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한 그는 4년 후 피츠버그에서 96세로 별세했다.

■로버트 그리어슨(Robert Grierson)
(1868~1965, 건국훈장 독립장)

로버트 그리어슨
로버트 그리어슨

일제의 어용신문인 <매일신보>는 만세운동이 한창이던 1919년 3월 15일자에 “성진(城津) 소요의 주모자는 야소교 선교사 영국인 ‘크레-손’인데, 백성들은 화근을 없애려고 영국인을 죽인다고 떠들며 분개한다더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허위보도였다. 기사 속 주인공 로버트 그리어슨(한국명 구예선)은 한국인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는 선교사였다.

캐나다 달하우지 의과대학을 졸업한  그리어슨은 캐나다장로교 해외선교부의 한국개척선교사 모집광고를 보고 지원하여 1898년 한국땅을 밟았다. 함경도지역 선교를 담당한 그는 1901년 5월 함북 성진에 선교부와 진료소를 설치하며 활동했는데, 나중에 이 진료소는 제동병원으로 발전했다.

로버트 그리어슨 선교사는 함경북도 성진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적극 도왔다. 그의 귀국 환영회 소식을 알리는 &lt;동아일보&gt; 1921년 4월 26일자 기사.
로버트 그리어슨 선교사는 함경북도 성진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적극 도왔다. 그의 귀국 환영회 소식을 알리는 &lt;동아일보&gt; 1921년 4월 26일자 기사.

함경도에서 사역하던 캐나다 선교사들은 일본인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특히 1906년 통감부 설치 이후 일본군들이 저지르는 갖가지 만행에, 선교사들은 분개하며 큰 충돌을 벌이곤 했다. 그리어슨 역시 단천으로 심방을 갔다가 자신이 타고 온 말을 훔쳐간 일본 군인을 채찍으로 때려 응징하고, 기어이 헌병소장으로부터 사과까지 받아낸 적이 있다.

국권회복운동을 벌이던 이동휘가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어려움을 겪자, 그를 성경 매서인과 조사로 임명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애국지사들을 돕는 데도 앞장섰다.

1919년 만세운동이 벌어졌을 때 그리어슨은 함남노회 노회장으로 봉직 중이었다. 3월 10일 성진지역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그는 적극 지지했다. 자신의 집을 비밀 회합장소로 제공하고, 봉기 하루 전에는 성진 욱정교회에서 설교를 통해 일제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날 것을 독려 했다.

만세운동은 그가 원장으로 있는 제동병원 앞에서 시작되었고, 얼마 못가 일제의 무차별 구타와 총기 난사로 수많은 부상자들이 병원에 실려 왔다. 그리어슨은 최선을 다해 환자를 치료했고, 주일이면 투옥된 이들을 위해 오랫동안 교회 종을 울려주었다.

그해 7월 안식년을 맞은 그리어슨이 귀국하는 길에는 한국인들이 성대한 송별회를 열어주고 부두까지 나와 배웅하며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1935년 퇴임 후 토론토에서 여생을 보내다, 1965년 98세로 별세한 그에게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스탠리 마틴(Stanley H. Martin)
(1870~1941, 건국훈장 독립장)

스탠리 마틴
스탠리 마틴

“외국인 선교사가 법의(法衣)의 소매로 한국인들을 엄호하면서 불령행동을 지속해 왔다.”

감시자들은 스탠리 마틴(한국명 민산해)의 활동을 이런 식으로 평가했다. 그들이 작성한 보고서에는 마틴이 책임을 맡은 제창병원과 부속가옥들이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의 집회장, 독립운동 연락책들의 숙박소 또는 불온문서 발행소로 쓰이고 있다는 고발로 가득했다.

마틴은 캐나다 온타리오의 퀸즈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한 후, 1916년 캐나다장로교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부임했다. 그가 내한할 당시 캐나다장로교는 함경도에서 선교영역을 더욱 확장해 간도와 연해주까지 진출하고 있었다. 마틴에게는 용정지역 의료선교사 직책이 주어졌다. 부임한 지 2년 후 완공된 제창병원을 중심으로 그는 아내와 함께 한국인들을 열심히 섬겼다.

고국에서의 만세운동 소식이 전해지자 용정에서도 1919년 3월 13일 ‘독립선언 축하회’를 개최하며 호응했다. 하지만 축하회를 마치고 태극기를 흔들며 시내로 향하던 행렬을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군이 막아서며, 무차별 발포로 13명이 목숨을 잃고 30여 명이 크게 다쳤다.

스탠리 마틴 선교사는 만주 용정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의 희생자들을 적극 돌봤다. 그가 결핵퇴치를 위해 &lt;동아일보&gt; 1928년 11월 22일자에 쓴 의학칼럼.
스탠리 마틴 선교사는 만주 용정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의 희생자들을 적극 돌봤다. 그가 결핵퇴치를 위해 &lt;동아일보&gt; 1928년 11월 22일자에 쓴 의학칼럼.

마틴은 부상자들의 치료는 물론 사망자들의 장례까지 전담했다.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에 호의적이었던 그는 제창병원 일대를 독립운동가들의 집회장소와 숙소로 곧잘 내주었다. 독립운동 관련 각종 문서들도 이곳에서 인쇄되고 배포되었다. 이에 간도 대한국민회가 마틴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1920년 2월 표창패를 수여하기도 했다.

1920년에는 일본군의 간도 침공이 일어났다. 그들은 독립군 토벌을 명목으로 한인촌을 대거 초토화하며, 주민들을 몰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마틴은 일제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간호사 한 사람과 함께 참극의 현장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자신이 목격한 일들을 글로 쓰고, 사진으로 찍어 만든 보고서는 ‘노루바위(장암동) 학살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훗날 서울 세브란스병원으로 임지를 옮긴 마틴은 한국인들의 폐결핵 퇴치에 집중하다가, 1940년 태평양전쟁의 전운이 감도는 중에 미국으로 철수한다. 이듬해 미국 리치몬드에서 세상을 떠난 그에게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3월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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