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일대를 복음의 옥토로 개간한 신실한 일꾼

청주제일교회 등 여러 교회 세우고 근대교육과 의료선교사역 통해 맹활약
수많은 한국말 찬송가와 전도지 제작하며 한국교회 부흥성장에 크게 공헌

충북선교 개척자로 활약한 프레드릭 밀러(한국명 민노아) 선교사 부부.
충북선교 개척자로 활약한 프레드릭 밀러(한국명 민노아) 선교사 부부.

2022년은 충북선교의 개척자인 프레드릭 S. 밀러(한국명 민노아)의 내한 130주년을 맞은 해이다. 이를 기념해 11월 15일 청주 상당교회에서 '청주성서신학원'과 '민노아선교유산보존계승위원회' 주최로 민노아 학술세미나가 열렸다. 다음은 이날 소개된 세 편의 주제발표의 요지이다.

■충청지역 선교의 대부:밀러의 선교활동(최재건 박사·성결대학교 석좌교수)

1892년 미국북장로회 해외선교부의 17번째 파송선교사로 내한한 밀러 선교사는 서울 황해도 순회 선교사역을 하다가, 1900년부터 경기도 동남부와 충청도 사역에 나셨다. 김흥경 조사와 함께 청주시장에서 노방전도를 하고, 조치원에서도 전도했다.

민노아 선교사가 설립한 청주제일교회 전경.
민노아 선교사가 설립한 청주제일교회 전경.

1902년부터 청주선교부 설립을 모색하고, 1904년에는 가족과 함께 청주로 이거해 본격적인 준비 작업을 펼쳤다. 사비를 들이면서까지 5만평 규모의 선교부지를 매입하고, 오늘날 양관(洋館)이라고 불리는 6동의 선교관과 병원, 사택 등을 건립했다. 1906년에 충북 최초의 양관을 지었으며, 1911~12년에 소민병원을 지었다.  1925년에 지은 밀러의 집은 현재 민노아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충청북도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런 노력을 통해 1908년 청주선교부가 개설됐다. 청주선교부를 통해 청주와 조치원지역은 초기 조선예수교장로회 경충노회 형성의 기반이 됐다. 밀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청주선교부를 중심으로 32년 동안 섬기며 복음을 전파했고, 초대 경충노회장을 맡기도 했다.한편 청주에는 이미 1901년 가장 먼저 설립된 신대교회를 중심으로 기독교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다. 밀러는 이 소식을 접하고 신대리에 이찬규 조사를 파송해 교인들을 지도하게 했다.

청주제일교회당에 건립된 충북지역 기독청년운동 기독여성운동 민주화운동의 요람 기념비.
청주제일교회당에 건립된 충북지역 기독청년운동 기독여성운동 민주화운동의 요람 기념비.

1904년 3월 12일에는 남문 밖 초가집에서 김원배 방흥근 이영균 김재호 이범준 등의 청년들을 중심으로 청주읍교회, 지금의 청주제일교회를 세웠다. 청주읍교회는 설립 1년 만에 예배 장소인 한옥을 3차례 증축할 정도로 빠르게 부흥했다. 또한 청주지역의 복음운동만이 아니라 근대화운동, 민족운동, 교육계몽운동, 사회문화운동, 여성운동에 앞장섰다.

청주읍교회 외에도 묵방리교회 화죽리교회 송파교회 홍성제일교회 등을 세우고 돌보면서 밀러는 중부권 선교의 개척자로서 맹활약을 했다. 이와 함께 청주 광남학교(청남학교)와 청신여학교를 통해 교육선교를, 청주 최초의 서구식병원인 소민병원을 통해 의료선교를 전개했다.

청주 최초의 양관 중 하나인 민노아기념관. 충청북도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청주 최초의 양관 중 하나인 민노아기념관. 충청북도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밀러는 수많은 찬송가에 우리말 가사를 입혔는데 ‘예수님은 누구신가’ ‘주의 말씀 듣고서’ ‘맘 가난한 사람 ’공중 나는 새를 보라‘ 등이 대표적이다. <The Korea Mission Field>에 95편의 글을, <신학지남>에 25편의 글을 발표하며 한국선교역사에 문서활동 선두주자로 나선 인물로도 기억된다.

밀러는 총 44년의 선교사직을 정년퇴임한 후에도 귀국하지 않고, 선교사역을 지원하기 위해 남아 있다가 1937년 10월 6일 별세해 청주에 묻혔다. 아내와 두 자녀도 이 땅에 묻었다. 1984년에는 예장통합 충북노회가 선교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밀러가 평생 살았던 기념관 앞뜰에 선교기념비를 세웠다. 그의 내한 130주년을 맞는 오늘,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되새기고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선교사 민노아의 마음(이용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언셜쵸집(The Scrap Book)>은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하여 밀러 선교사가 집필한 것으로 하나님과 자연과 인간에 대한 다양한 주제를 다루며 자신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표명하고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민노아 선교사 입국 130주년 기념행사에 전시된 관련 문서들.
민노아 선교사 입국 130주년 기념행사에 전시된 관련 문서들.

밀러는 이 책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부유한 것과 부족한 것이 중요하지 않고, 각자의 인생 그 자체가 중요한 것임을 잘 보여준다. 또한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각종 생물들을 자세히 관찰하는 가운데 그 속에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점을 통해 우리 모두는 각자 하나님께로부터 큰 은혜를 받아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우리는 그렇게 받은 은혜를 반드시 남을 위해 베풀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각자에게 주어진 고유의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하면서, 남을 의지하기보다는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특히 한국인들에 대해 가지고 있었다.

민노아 선교사가 한글 교육과 기독교교리 교육을 동시에 할 수 있도록 제작한 전도지.
민노아 선교사가 한글 교육과 기독교교리 교육을 동시에 할 수 있도록 제작한 전도지.

■민노아 선교사의 전도지 사역과 그의 일화(최승 원로목사·대청교회)

밀러는 전도지를 가장 많이 만든 선교사로 알려지고 있다. 요즘 교회들은 영상문화의 영향으로 전도지를 많이 사용하지 않지만, 전도지는 초창기 교회부터 100여 년간 복음을 전하는데 꼭 필요한 무기가 되었다.

전도지를 사용하여 씨를 뿌리는 일은 다른 어느 선교부들보다 청주에서 더 한층 광범위하게 계속하여 행하였다. 밀러는 ‘전도지의 사도’라고 불려왔다. 1908년에는 장날에 16명의 사역자들에 의해 8000장이 배포되었으며, 그 해에 모두 6만장이 사용되었다. 1910년에는 어느 장날 하루에 1만장이 배포되었고, 겨울사경회 기간에도 1만 3000장이 배포되었다.

밀러는 20여 종의 전도지를 집필했다고 하며 1916년 이전에 배포한 전도지도 확인할 수 있다. 혼자서 한글을 배우며 기독교 교리를 읽을 수 있도록 제작한 ‘언문초학’과 ‘예수께서 구원하심’ ‘술의 결과’ ‘무거운 짐진 자’ 등의 전도지가 현재까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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