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식 박사(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한국교회사)

1903년 8월 원산 부흥 역사 통해 놀라운 영적 대각성운동 전개

교회 지도자들부터 스스로 죄악을 회개하자 방방곡곡으로 복음이 힘차게 전파
침체의 위기 앞에 놓인 오늘날 한국교회도 부흥의 은총 사모하는 모습 보여야

기독교 역사를 돌이켜 보면, 수많은 도전과 박해가 폭풍처럼 교회에 닥쳐오기도 했다. 그러나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했다. 환난이나 곤고나 총칼의 박해나 불같은 생명의 위협도 성도들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었다. 성도는 무정한 시대, 무자비한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대장부처럼 돌파하며 나아간다. 나라가 망해가고 있고 마음속 깊이 간직한 소망과 입술의 노래마저 잃어버린 그 시대에도,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십자가의 도를 붙잡고 오히려 부흥의 열망으로 신앙의 고도를 높인다.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인 1903년 8월 원산에서 영적 지축을 흔든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다. 성령의 은혜가 둔탁한 심령을 강타함으로 사람들은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가슴을 쳤고, 자신의 죄를 견딜 수 없어 공개적으로 회개했다. 잠들어 있던 영혼이 각성을 하고, 냉랭한 가슴이 뜨거워지며, 침체됐던 신앙공동체가 생기를 찾고 빛의 역사를 이루어 갔다. 그리고 그 지역을 넘어 서울로, 평양으로 그리고 제물포로 그야말로 요원의 불길처럼 확산됐다.

배경, 부흥의 토대

일제는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한국을 향해 침략의 본성을 드러내보였다. 1894년 청일전쟁의 승리이후 침략야욕을 본격화했고, 1895년 조선의 왕비를 무도하게 시해한 ‘을미사변’이 발생했다. 아울러 국제 열강들도 한반도를 중심으로 자국의 이권을 위해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1904년 러일전쟁의 승리로 일제는 한반도에 대한 주도권을 갖게 되었고, 이듬해 ‘을사늑약’으로 우리 겨레는 민족적 좌절을 겪어야 했다.

1903년 원산대부흥을 촉발시킨 장본인인 로버트 하디 선교사.
1903년 원산대부흥을 촉발시킨 장본인인 로버트 하디 선교사.

그런 와중에 한국에 입국한 초기 선교사들은 흔들림 없이 십자가의 도를 선포하고, 말씀 중심의 사역을 전개해 나갔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과 영혼 구원이라는 본질에 충실했다. 성경번역에 다시 착수했으며, 1888년 말에는 언더우드 선교사 집에서 성경을 공부하며 성령의 권능을 사모하고 기도하는 모임을 시작했다. 이것이 사경회의 맹아였고, 이후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통해서 한국교회에 정착되었다. 더 나아가 전국 주요 도시에 성경학원을 설립하면서 성경공부 운동이 불처럼 일어났다. 그야말로 성경은 모든 사역과 부흥의 토대가 되었다. 이처럼 말씀의 반석 위에 젊음을 산화시켰던 선교사들의 복음 열정과 성령님의 은혜를 구하는 기도 위에 한국교회가 정초되었고 발전하였다.

부흥의 불씨, 두 여인의 기도

원산부흥운동은 두 여성 선교사의 기도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은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남감리교 화이트(Mary Culler White) 선교사와 캐나다장로교 맥컬리(Louise Hoard McCully) 선교사였다. 특히 맥컬리 선교사는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중에, 1900년 의화단사건이 발생하자 한국에 입국하여 머물게 되면서, 이후 우리나라에서 사역을 전개했다. 그녀는 소래교회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1895년 젊은 나이에 그곳에 묻힌, 가장 한국적인 선교사 맥켄지(William John Mckenzie)의 약혼녀이기도 했다. 맥컬리는 이후 원산에서 마르다윌슨 여자성경학원을 세웠다.

특히 화이트와 맥컬리는 선교사들에게 주님의 성령이 충만히 임하도록, 소나기와 같은 은혜를 부어주시도록 기도하기 시작했다. 두 여성 선교사가 매일 드렸던 간절한 기도는 하늘 보좌를 움직였고, 그 응답은 1903년 여름에 선교사들의 성경공부와 기도회 모임이 개최됨으로 실현되었다. 이것이 원산부흥운동의 불씨였다. 하디(Robert Alexander Hardie) 선교사도 “1903년 조선교회 부흥의 불길은 감리교와 장로교의 두 선교사가 연합해 기도하는 중 시작되었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

원산부흥운동의 발흥

화이트와 맥컬리 그리고 남감리교 여선교사들은 1903년 8월 24일부터 30일까지 한 주간 연합성경공부 및 기도회를 가졌다. 이때 누가복음 11장 13절의 말씀으로 이 모임을 인도하던 하디 선교사 자신이 강력한 성령의 은혜를 경험하였다.

하디 선교사의 두 딸이 묻힌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 건립된 원산대부흥운동 기념비.
하디 선교사의 두 딸이 묻힌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 건립된 원산대부흥운동 기념비.

그는 동료 선교사들 앞에서, 그리고 이어지는 주일 오후예배 때 한국인 성도들 앞에서 지금까지 자신이 얼마나 교만했으며, 자신의 심령은 얼마나 강퍅했는지, 그리고 자신의 믿음이 얼마나 부족했는지를 공개적으로 솔직하게 고백하며 눈물로 참회하였다. 인간적인 면에서는 고통스럽고 굴욕적인 경험이었지만, 성령이 그에게 오셔서 심령을 강타함으로 하디는 자신의 실패를 진솔하게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 내면에 존재한 민족적 우월감, 자신의 학력과 실력을 의지했던 자만심을 토로할 수밖에 없었다.

하디 선교사는 토론토대학교 의대 출신으로서, YMCA의 지원을 받아 1890년 독립선교사로 내한했다. 그는 부산을 거쳐 원산으로 이거하였고, 1898년부터는 남감리교 선교회 소속 선교사로 의료활동을 했다. 1901년부터는 원산과 강원도 통천 지방에서 개척선교사로 활동을 했지만, 선교의 결실이 거의 없었다. 강원도 지역에서는 사역의 쓰라린 실패를 맛보기도 했다.

그러나 하디에게서 시작된 회개 및 영적각성은 한국인 성도들과 동료 선교사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그 영적인 격류가 원산에서 타지역으로 거침없이 흘러갔다. 하디의 고백을 듣고 있던 젊은 진천수는 자신의 위선과 죄악을 뉘우쳤다. 그리고 영적으로 잠자던 성도들이 공개적으로 회개하며 참회의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영적각성은 스웨덴 출신 프란손(F. Franson) 선교사가 입국하며 더욱 촉발되었다. 프란손은 하디의 집에 머물면서 1904년 1월 25일 원산에 있는 창천예배당에서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3교파가 모인 집회를 이끌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권에 의하면, 이때 참석한 캐나다장로교 선교부 럽(A. F. Robb·한국명 업아력) 선교사는 놀라운 성령의 은혜를 체험했다. 그는 “난생 처음으로”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했으며, “선교사들, 한국 사람들, 남녀노소가 다수 모여 울면서 죄를 통회하고 죄를 사하여 주실 것을 호소했다.” 그리고 럽 선교사는 “특은을 받아 수일간 금식통회하며 도로상에서도 간구하는 것을 중단하지 못했고, 신자는 그를 향해 비웃었고 불신자는 술에 취한자라고 했다. 2년 후 여름 제직사경회 중에 특별한 부흥이 일어나고 어떤 이는 40일간을 정하여 기도하는 중에 이상을 보기도 하였으며, 업아력 사저에서 삼사인이 기도하는 중 통회하는 곡성이 상가와 동일했다.”

120년 전 한국교회 부흥의 진원지 역할을 한 교회들 중 하나인 원산 남동감리교회의 모습.
120년 전 한국교회 부흥의 진원지 역할을 한 교회들 중 하나인 원산 남동감리교회의 모습.

성령의 불길, 원산을 넘어 타지역으로

1904년 2월 하디는 자신의 사역에 패배를 안겨주었던 강원도 지역으로 다시 향했다. 이번에는 자신의 힘과 능력이 아닌, 오직 성령님을 의지하며 사경회를 이끌었다. “사경회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결코 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놀라운 감동을 받았고”, 새로운 사람들의 회심이 일어났다. 그 자리에 참석한 동료 선교사들도 집회를 압도하는 성령의 은혜를 경험하고는 큰 감동을 받았다. 하디는 그 “집회에 대한 기억은 우리가 살아있는 한 일생 동안 우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술회했다. 실패했던 그 사역의 현장에서 하디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신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디를 통한 부흥의 역사는 개성, 서울, 평양, 제물포 등지로 확산되었다. 성령의 능력이 놀랍게 나타나며 많은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죄를 고백했다. 사역을 하면서 냉랭해졌던 한국인 설교자, 전도부인, 성경반 지도자들, 주일학교 교사들, 미션스쿨 학생들이 각성을 하고 삶의 변화가 일어났다. 이러한 열기는 1906년 신년부흥회로 이어졌다. 장로교 승동교회, 새문안교회, 장대현교회, 선천읍교회에서 각각 수백 명의 성도들이 모여 성령의 은혜를 경험했다. 그리고 교회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찾아와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하였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말대로,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이며 그래서 예기치 않게 불어 닥친다. 그러나 사모하는 곳에서 부흥은 일어난다.

오늘날 코로나19가 지속되고 있고, 인구절벽이라는 현상도 우리를 압박한다. 그러나 선진들이 환경 앞에서 매몰되지 않고 부흥을 열망한 것처럼, 이 시대 우리도 십자가 복음 앞에 다시 서서 주님의 성령을 사모하며 나아가길 원한다. 2023년, 우리는 다시 부흥을 열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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