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기독인의 애국신앙 확인하는 두 역사관

익산근대역사관, 기독의사 김병수의 삼산의원 건물에 독립유공자 활약상 담아
익산항일독립운동기념관, 일제강점기 지역교회 주도 불굴의 항일 투쟁사 증언

일제강점기 익산의 교회들은 항일운동의 주역이었다. 수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수난을 당하는 아픔 속에서도 겨레를 향한 사랑과 자주독립의 의지로 제국의 압제에 끝까지 맞서며. 기꺼이 희생을 감수했다.

이 위대한 사적들을 소개하는 역사관들이 최근 익산 구도심에서 잇달아 개관하며, 민족사와 함께한 교회의 위상을 많은 이들의 뇌리에 새롭게 각인시키고 있다. 익산을 여행하는 기독인들이라면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 할 두 곳의 역사창고를 소개한다.

기독의사이자 독립운동가였던 김병수의 삼산의원 건물을 개조한 익산근대역사관.
기독의사이자 독립운동가였던 김병수의 삼산의원 건물을 개조한 익산근대역사관.

■수탈과 극복의 역사 익산근대역사관

2018년 익산역 맞은편 중앙로 골목길에 문을 연 익산근대역사관은 일단 그 건물 자체가 상징적이다. 근대기 익산의 대표적 서구식 건물로서 문화재청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구 삼산의원 건물을 그대로 옮겨와 역사관으로 개조했다는 사실이 일단 의미가 깊다.

익산근대역사관 내부에 보존된 옛 삼산의원의 금고와 시설물들.
익산근대역사관 내부에 보존된 옛 삼산의원의 금고와 시설물들.

기독교인들이 더 긍지를 가질 대목은 삼산의원의 주인이었던 김병수가 일제강점기에 활약한 기독의료인이자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이다. 1919년 한강 이남 최초의 만세운동이었던 군산 3·5만세운동에서 민족대표 33인과 군산의 기독인들을 연결하는 밀사역할을 했던 인물이 바로 군산 영명학교 출신으로 당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재학 중이던 김병수였던 것이다.

근대역사관에는 옛 삼산의원의 여러 자취들과 옛 물품 등이 남아 있고, 전시자료들을 통해 김병수의 행적에 대한 자세한 정보들도 확인할 수 있다.

삼산 김병수의 흉상.
삼산 김병수의 흉상.

전시물 탐색에 들어가면 이리역(현 익산역) 개설과 함께 본격화된 일제의 수탈과 이와 관련해 익산에 자리 잡은 일본인들의 농장 및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이에 맞서 익산의 지식인과 종교인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항일운동에 대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특히 1919년 3월 10일과 4월 4일에 대대적으로 전개된 익산 일대의 만세운과 이에 앞장선 교회와 기독인들의 활약상들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문용기 장경춘 김치옥 등 자랑스러운 기독인들의 이름은 바로 다음 공간에서 이어지는 ‘이리·익산의 71인 독립유공자’를 통해 상세하게 소개한다.

익산역 동쪽광장에 세워져있는 3·1운동기념비.
익산역 동쪽광장에 세워져있는 3·1운동기념비.

이밖에도 근대역사관에는 6·25전쟁 당시 미군의 이리역 오폭사건과 1977년 이리역 폭발사건 등 이곳을 방문하지 않으면 알 수 없었을 여러 기록과 사건들을 담아 놓았다. 현재 전국에 단 두 곳만 존재하는 익산 두동교회의 ‘ㄱ’자 예배당에 대한 정보도 놓치지 말 일이다.

역사관을 나와 지척에 있는 익산 근현대사의 상징적 공간 익산역과, 역 동쪽 광장에 세워진 3·1운동 기념비를 둘러보는 것도 의미 있겠다.

일제의 수탈 통로였던 구 대교농장 사무실에 들어선 익산항일독립운동기념관.
일제의 수탈 통로였던 구 대교농장 사무실에 들어선 익산항일독립운동기념관.

■핏빛 투쟁의 증언 익산항일독립운동기념관

익산 사람들에게 만세운동하면 떠오르는 가장 대표적인 공간은 솜리장터 혹은 구시장이라 불리는 곳이다. 익산 4·4만세운동이 전개된 장소이며, 봉기의 선봉에 서 있던 남전교회 문용기 장로가 일제의 칼날에 목숨을 잃은 현장이기도 한다.

해마다 4월 4일이 되면 바로 이곳에서 만세운동 재현행사가 지역 기독교계 주도로 개최된다. 이 상징적인 자리에 해방 직후인 1949년 순국열사비가 건립되고, 이후 문용기 열사 기념상 등이 세워지며 4·4만세기념공원이 조성됐다. 특히 올해 3월에는 4·4만세운동을 비롯한 일제강점기의 항쟁역사를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익산항일독립운동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익산 4·4만세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문용기 장로 기념상.
익산 4·4만세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문용기 장로 기념상.

기념관이 들어선 세 채의 건물은 당초 일제의 미곡 수탈통로 중 하나였던 대교농장의 사무실로 사용되다가, 이후 오랫동안 화교소학교로 사용되기도 한 사연 많은 곳이다. 제1관에서는 익산에서 일어난 주요 항일운동, 제2관에서는 일제수탈의 현장들, 제3관에서는 4·4만세운동에 대해 집중적으로 소개한다. 이중 제2관은 현재 건물 보수작업이 진행 중이다.

기독교인 관람객들이 집중해서 살필 곳은 제3관이다. 제1관에서 익산의 근대사와 지역교회의 주요 항쟁역사들을 살짝 일별한 후에, 3관에서 그 상세한 사적들을 확인할 수 있다.

순국 당시의 착용한 의복과 태극기 등 문용기 장로 관련 전시물들.
순국 당시의 착용한 의복과 태극기 등 문용기 장로 관련 전시물들.

특히 이 공간의 중심인 ‘정의실현의 교두보’ 코너는 고현교회 남전교회 서두교회 제석교회 등 오랜 역사를 가졌으며, 항일전선에도 앞장섰던 대표적인 기독공동체 네 곳의 관련 전시물들이 차지하고 있다.

이들 교회에 대한 기록과 옛 예배당들의 모형 등을 관람한 후에는 익산4·4만세운동의 주역 문용기 열사 관련 전시물들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고인의 영정 및 왓킨스중학교 졸업장 등과 함께 순국 당시 입고 있었던 피 묻은 의복과 태극기 등이 재현되어 있다.

항일운동에 앞장선 고현교회 남전교회 서두교회 제석교회의 옛 예배당 모형.
항일운동에 앞장선 고현교회 남전교회 서두교회 제석교회의 옛 예배당 모형.

관람을 마친 후 문용기 장로의 생가가 있는 오산면으로 향하거나, 앞서 소개한 네 교회를 방문해 순례를 이어간다면 더욱 뜻깊은 역사여행이 될 것이다.

일제강점기 항일투쟁 선봉선 익산의 교회들

고현교회

익산의 도심을 이루는 구 이리시 경내에서 1906년 처음으로 설립된 교회이다.

1919년 서울부터 만세운동이 시작되자 고현교회의 오덕근은 교인들에게 독립운동을 함께 하자고 권유하고, 4월 1일 이리역에서 봉기할 만세운동에 사용하기 위한 태극기를 제작해 배포했다. 또한 김내문 최대전 문용기 등과 함께 기독교 측 지도부를 결성하여 4·4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이후 오덕근은 태극기를 제작·배포한 일이 탄로가 나면서 일제에 의해 옥고를 치렀다.

하지만 출옥 후에도 오덕근은 민족교육의 절심함을 느껴 김한규와 함께 백동학교를, 박연세와 함께 경신학교를 각각 설립했다. 이후 고현교회는 일본의 천황숭배와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다 옥고를 치르던 이상태 집사가 고문 후유증으로 순교했으며, 권우진 목사 또한 옥중에서 심한 고초를 당했다.

남전교회

1897년 설립된 익산지역 최초의 교회이다. 교회에서 설립한 남학교인 도남학교와 여학교인 미성학교는 일제에 의해 폐교되기 전까지 민족교육과 신앙교육의 산실 역할을 했다.

특히 솜리장터에서 벌어진 1919년 익산 4·4만세운동에는 남전교회와 이들 학교에서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당시 남전교회 장로이자 군산 영명학교 등에서 교사생활을 했던 문용기가 행렬을 선도하다 일제의 칼에 맞아 순국했다.
이날 함께 숨진 6명의 열사들 중 장경춘 박영문까지 포함해 총 3명이 남전교회 교인이었다. 남전교회는 이들의 희생을 기리며 2019년 익산4·4만세운동 제100주년을 기념해 순국열사비를 건립했다.

서두교회

1898년 설립된 서두교회는 익산에서는 두 번째로 오랜 역사를 가진 교회이다. 서두교회는 가난한 농민들의 자녀를 위해 삼신학교를 설립하고, 젊은 세대의 애국신앙을 일깨웠다.

또한 많은 교인들이 신사참배 반대를 통해 항일투쟁에 나서기도 했다. 특히 박병열 장로는 1919년 만세운동 당시 첫 옥고를 치른 후, 신사참배 반대로 두 번째 투옥된 후 일제가 가한 혹독한 고문으로 결국 1940년 9월 22일 순교의 길을 걸었다. 1986년 서두교회 앞마당에는 박 장로의 순교기념비가 세워졌다.

제석교회

1906년 설립된 익산의 초기 교회들 중 하나이다. 하위렴 선교사와 성도들이 민족교육과 신앙교육을 위해 부용학교를 세워 운영하기도 했다.

1919년 3월 10일에는 익산 일대에서는 가장 먼저 웅포 함라 함열 용안지역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졌는데, 제석교회 성도들이 이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이형우는 독립선언서를 기독인들에게 배포하는 임무를 맡고, 한길용 허진엽 엄연길 등이 만세봉기를 준비하는 데 앞장섰다.

봉기가 일어난 뒤 제석교회가 독립운동 준비장소로 알려지면서, 일제는 교회 종탑을 부수고 성경을 불태우는 등 악행을 저질렀다. 결국 교회와 부용학교는 한동안 폐쇄되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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