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73번 목사
[목회칼럼] 73번 목사
박영찬 목사(대구동산교회)
  • 정형권 기자
  • 승인 2020.08.31 20: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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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찬 목사(대구동산교회)
박영찬 목사(대구동산교회)

봄 노회 개회를 앞둔 시간이었습니다. 따스한 믹스커피 향기 사이로 낯선 목사가 보였습니다. 큰 키에 진한 곤색 슈트가 잘 어울렸습니다. 검은 뿔테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매가 온순하고 착해보였습니다. 그는 안전지대라고 생각한 구석자리에 섬처럼 홀로 앉아 있었습니다.

인상착의를 볼 때, 73번 목사가 틀림없었습니다. 제가 속한 동대구노회는 위임목사가 73명입니다. 얼마 전, 이웃 교회에서 담임목사 청빙을 위한 공동의회가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설교와 성품, 그리고 목회경력까지 부족함이 없다고 쉼 없이 자랑하던 그 교회 장로님의 행복한 얼굴이 생각났습니다.

신기한 듯 조심스럽게 촬요를 뒤적거리고 있는 그를 보면서, 20년 전 노회에 처음 참석했던 저의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그때도 선배 목사님들은 긴장과 어색함의 동굴에 갇혀 있는 저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같은 동굴에 갇혀 있는 그를 구출해야겠다는 기특한 의도로 다가가서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이미 나를 알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노회에 오면 꼭 인사를 하려고 했었다는 겁니다. 이렇게 많은 노회원들 가운데 나에게 인사하려고 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졌습니다. 혹시 우리 교회에 대한 좋은 소문을 들은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면서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기분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그는 10여 년 전, 우리 교회 교육전도사 초빙광고를 보고 지원을 했습니다. 오랜 시간 저와 면접까지 했는데 다음날 사무 간사를 통해 떨어졌다는 통보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미안함과 어색함의 깊은 동굴에 갇힌 느낌이었습니다. 몸이 경직되면서 머릿속은 하얗게 변하고 말았습니다. 무슨 말을 하면 좋을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동굴 탈출을 위해 나도 모르게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을 듣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는 어릴 적에 제 외갓집이 있는 마을 근처에서 자랐다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좋은 탈출 기회입니까? 그래서 어색한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하여 열심히 외갓집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연한 미소와 함께 한 방에 나를 더 깊은 동굴 속으로 밀어 넣고 말았습니다. “면접 때도 외갓집 이야기를 지금처럼 하셨습니다.”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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