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획] 사적지 지정 앞둔 총회 신앙유산 ⑤영덕송천교회

대규모 만세운동 주도, 독립유공자 20명 이상 배출하기도 … 애국신앙 계승에 진력

▲ 낡은 예배당 종탑은 송천교회가 지내온 세월이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노인들 중에서는 지금도 ‘영해영덕’이라며 공식적인 행정지명이 된 읍내보다 당신들의 동네 이름을 앞서 부르는 이들이 있다. 고려시대의 명칭을 따라 ‘예주(禮州)’라는 별칭을 즐겨 쓰기도 한다. 영해사람들의 자부심이 얼마나 강한지 이 한 가지만으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던 시절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난 의병장 신돌석을 비롯해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이 일대에서 배출된 사실을 떠올리면 그 자긍심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고을 한 중심에 우뚝 솟은 영해삼일의거탑과 지금은 아예 ‘영해만세시장’으로 이름까지 바꾼 옛 성내시장은 가장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1919년 당시 경북 일대에서 가장 큰 규모의 만세 봉기가 일어났던 역사적인 장소가 바로 여기이다.

그 시작은 기독교인들이었다. 3월 1일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내려온 낙평교회 조사 김세영과 구세군낙평영문 사관 권태원에게 거사를 일으킬 것을 제안한다. 하지만 김세영은 일본 경찰의 검속으로 체포되고 말았고, 대신 짐을 지게 된 권태원이 도움을 청한 인물 중 하나가 송천교회 장로 정규하였다.

정규하는 권태원을 만난 후 교회로 돌아가 봉기의 정당성을 설파했고, 90여 명의 교인들이 이에 호응해 만세운동에 앞장서기로 한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정규하는 창수면의 권상호 등을 찾아가 이웃 부락 사람들까지 봉기에 합류시키며, 의거 장소과 일시를 정하는 데도 주도적 역할을 한다.

마침내 3월 18일 영해와 영덕 일대 기독교인들과 유림이 중심이 된 3000여 명의 군중이 성내장터에 모여 우렁찬 만세함성을 외친다. 시위 분위기는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훼파할 정도로 거셌다. 그 기세에 놀란 일제는 포항과 대구에서 각각 헌병대와 군부대를 출동시키고서야 가까스로 군중을 해산할 수 있었다.

총기까지 사용된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치고,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투옥됐다. 이웃 원전동에서는 기독교인인 주명우 윤악이 부부, 김태을 신분금 부부가 만세운동을 이끌다 나란히 체포되는 일도 있었다.

▲ 110년 역사를 간직한 영덕 송천교회의 예배당 전경.

물론 정규하 장로를 비롯한 송천교회 성도들 상당수 역시 적잖은 고초를 겪었다. 장성열 장로의 경우는 만세운동의 선봉에 섰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2년간의 옥고를 치른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1968년 대통령 표창과,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한다.

장성열 장로의 뒤를 이어 송천교회를 지키고 있는 아들 장중권 장로(90세)는 당시의 사건으로 송천교회에서만 독립유공자가 20명 이상 배출되었다고 밝힌다. 며느리 이일출 권사와 손자 장상순 선교사까지 일가 전체가 자신들이 애국신앙의 후예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그 믿음을 꾸준히 계승하는 중이다.
영덕군기독교연합회 영해3·18독립만세운동기념사업회 영덕군애향동지회 등에서는 만세운동 주역들의 희생과 헌신을 기리며 매년 3월 18일을 즈음해 횃불점화 기념예배를 열고, 예주 3·1문화제라는 이름으로 성대한 행사를 개최한다.

송천교회는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기는 아픔 속에서 1910년 11월 영덕군 병곡면 송천리에 태어난 공동체이다. ‘명사 20리’로 불리는 해안가를 따라 울창한 소나무 숲이 이어지고 깨끗한 냇물이 흐르는 동네 이름을 따, 1914년 3월경 안동에서 파송된 권찬영 선교사와 권수백 조사의 순행  중에 교회 명칭을 정했다고도 전해진다.

교회약사에는 “차재명 전도사의 전도강연으로 송천동 권씨 정자에서 권태동 이동석 장성열 우도학 씨 등이 입신”한 일을 송천교회의 시작으로 기록하고 있다. 당시 경북 일대의 장로교회 상당수가 미국북장로교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점을 상기하면 송천교회의 기원은 꽤 이채롭다.
이후 교세가 계속 확장되자 하양에서 이거해 온 김치운 씨의 집을 새로운 예배처소로 정해 사용했고, 1953년 현재의 예배당을 건축했다. 한때는 유치원을 운영할 만큼 많은 어린이들로 북적였고, 인근 수많은 장로교회들의 모태 역할을 감당하기도 했다.

▲ 영덕 일대 기독교인들의 자부심이자 영해면의 상징이기도 한 삼일의거기념탑.

지금은 국가로부터 문화재로 등록된 예배당, 교회당 마당 한편에 선 낡은 종탑, 교회설립 100주년을 맞아 건립한 기념비 그리고 예배당 책장을 가득 채운 각종 기록물들이 영해만세운동을 비롯해 110여 년간 이어져온 송천교회의 온갖 사연들을 품은 채 남아있다.

현재 송천교회를 담임하는 김영원 목사는 “복음을 위해, 나라를 위해 애쓴 선배들의 유산이 우리 교회의 가장 큰 자산”이라면서 “이를 널리 알리고 한국교회의 귀감으로 삼을 수 있도록 송천교회를 위해 기도해 달라” 당부한다. <끝>

▲ 110년 가까이 대를 이어온 송천교회의 신앙 전통을 잘 보존하는 일에 사명감을 느낀다는 김영원 목사.

“전라도 고흥 출신으로 도시목회를 하던 제가 어쩌다 경상도 영덕에까지 와서 농촌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적응하기 어렵지 않았느냐 묻는 분들도 있는데, 보수적인 신앙 기조를 지키며 살아온 제게는 송천교회의 환경들이 오히려 참 잘 맞았습니다.”

김영원 목사는 송천교회 제35대 교역자이다. 교회 역사가 110년에 이른다는 것을 감안해도 강단이 꽤 자주 바뀐 셈이다. 그 만큼 이곳의 목회환경이 쉽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부임한지 올해로 7년째이지만 여기서는 김 목사가 ‘장기 목회’를 한 사례로 꼽힌다.

“전체 교인수가 10명에 불과하고, 그 중 80대 이상이 대다수인 교회이니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어떻게 유지될 수 있을까요. 주님의 돌보심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작은 시골교회라고 함부로 얕볼 수 없는 저력을 갖고 있다는 게 김영원 목사의 설명이다. 그 저력이란 단지 오랜 역사나 문화재로 등록된 예배당 정도로 한정되지 않는다. 고령의 성도들이 단 하루도 빠뜨리지 않는 오전 4시의 새벽예배와, 매주 꾸준히 써내려가는 예배일지 같은 것들을 말한다. 대대로 이어온 믿음 그리고 그 신앙의 울타리를 지켜나가려는 열심이다.

“이미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생활하는 교우들도 교회를 위해 잊지 않고 기도하며 헌금을 보내옵니다. 송천교회가 지탱될 수 있는 큰 힘이 되고 있죠.”

지난 2년 동안 김영원 목사는 예배당 복원공사에 집중해왔다. 연로한 교우들을 돌보고 텃밭 가꾸는 일 외에도 할 일이 생겨 나름 바쁜 시간을 보냈다. 길었던 공사를 성공적으로 끝낸 후 흐뭇한 마음도 크지만 나름 부담스럽고 아쉬운 부분이 없지 않다.

“문화재로서 예배당 복원이 제대로 이루어지다보니 더 주의해서 관리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듭니다. 이왕이면 이 역사적인 교회를 많은 사람들이 더 가까이서 이해하고 경험할 수 있도록 역사전시관과 탐방객들을 위한 숙소 같은 시설도 앞으로 만들어졌으면 합니다.”

또한 김 목사는 노인복지사역에도 깊은 관심을 두고 이 분야에 자신의 힘과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를 기도하고 있다. 은퇴까지 남은 5년 동안 연로한 성도들을 더 잘 모시고 천국 소망으로 안내하는 역할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한다.

 

십자 형태 ‘포치’ 멋을 더하다
목조예배당,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

▲ 등록문화재 제288호로 지정된 영덕 송천교회 예배당 정면의 포치 모습.

언뜻 보면 개화기 시절로 거슬러간 게 아닌가 하는 착각도 든다. 남녀의 출입구를 별도로 구분해놓고, 내부에는 서로를 볼 수 없도록 커튼까지 쳐놓았다니 유교사상이 엄존하던 구한말의 ‘ㄱ’자 모양 예배당 분위기를 고스란히 입혀놓은 게 틀림없다.

그러한데도 기와지붕 아래 온통 목재를 사용해 완성한 이 예배당이 해방과 전쟁 그리고 휴전까지 지나간 1953년도에 건축된 것이라니 그 사실이 더욱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예나 지금이나 전통 고수에 많은 가치를 두는 송천교회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여기에서도 읽게 된다.

마을 정자에서 시작해 오랜 세월 초가집 가옥시절을 거친 송천교회가 제대로 마음먹고 지은 예배당이기에 많은 공을 들였을 것이 당연하다. 특히 예배당 안으로 들어서는 현관 부분을 돌출시키고 지붕을 따로 씌운 대목이 눈에 띈다. 장방형의 33평짜리 크기 예배당에 ‘포치(porch)’라고 불리는 이 부분이 없었다면 건물 외관이 좀 심심할 뻔 했다.

지붕 바로 아래쪽에 목구조를 이용해 십자 형태를 표현한 것도 이채롭다. 굳이 건물 꼭대기에 십자가를 세우지 않더라도 누가 보아도 교회당인 것을 알아챌 수 있게 표시한 것이다. 이 근사한 예배당을 짓는데 당시 미국장로교선교부가 많은 재정지원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기와지붕이 심하게 파손되고 여기저기 보수가 필요해지자, 박정희 정부의 새마을운동 영향으로 지붕은 슬레이트로 교체됐고 외관에도 적잖은 변화가 생겼다. 그렇다고 예배당의 가치까지 평가절하 되지는 않았다. 문화재청은 이 예배당을 2006년 12월 4일 등록문화재 제288호로 지정한다.

그리고 정부의 지원으로 지난 2년 동안 약 3억5000만원을 들여 복원공사가 이루어지며, ‘송천예배당’이라는 간판을 건 이 건물은 옛 모습을 고스란히 재현하게 됐다. 예배당 곁에는 잘 어울리는 부속건물도 하나 생겼다.

내부에는 이 예배당에서 신앙과 인생이 자라난 수많은 사람들이 건물 안팎을 배경으로 촬영한 사진들이 전시되어있고, 당시의 것으로 짐작되는 오래된 거울 하나가 벽에 부착된 채 방문객들을 맞는다. 세월 속에 쌓인 무게와 함께 정겨움도 묻어나는 이 교회는 총회역사위원회로부터 한국교회역사사적지 지정 심사를 받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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