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획] 사적지 지정 앞둔 총회 신앙유산 ⑬ 부귀중앙교회

‘호남의 지붕’에 세운 예배공동체 … 분열 아픔 딛고 합병, 긍지의 역사 회복에 진력

▲ 진안고원 복음화의 물꼬를 트기 시작한 부귀중앙교회 예배당 전경. 이제 설립 120주년을 앞두고 있다.

해발고도 500m에 이르는 전북 동부지역을 통칭해 진안고원이라고 한다. 무주 진안 장수 3개 군의 첫 글자를 따 ‘무진장’이라고도, 전라도 최북단의 고지에 있다 해서 ‘호남의 지붕’이라고도 부른다. 금강과 섬진강 등 한반도 서남부를 가로지르는 강들이 바로 여기서 발원한다.

자연히 외부와의 왕래가 쉽지 않았고, 기독교 복음도 타지역보다는 비교적 늦게 퍼져나간 편이다. 진안고원 일대에 본격적으로 복음이 전파된 것은 루터 맥커친(한국명 마로덕) 선교사의 사역이 시작된 1903년 무렵으로 본다. 하지만 선교사가 찾아오기 전 이미 진안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과 그들이 세운 예배공동체가 존재했으니 바로 부귀중앙교회(전택복 목사)이다.

진안군 부귀면 거석리에 살던 이원일에게는 지병이 있었다. 골칫덩이인 병을 고치기 위해 수소문하던 중 군산에 머물고 있다는 서양인 선교사들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에게는 뭔가 영험한 능력이 있을 것 같았다. 먼 길을 떠나는데 어머니와 동갑내기 이원칠이 따라나섰다.

그들의 삶은 그렇게 군산으로 떠나기 전과 후로 완전히 달라져버렸다. 이원일은 병만 나아서 돌아온 게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의 영혼 깊숙이까지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돌아온 그는 땅과 돈을 내어 거석리 428번지에 예배처소를 마련했다. 거석리교회의 시작이었다. 공식 설립일은 1900년 5월 1일로 명시되어있다.

▲ 교회 설립 100주년을 기념해 건립한 ‘무진장 복음의 요람지’라는 글귀의 돌비.

이후로 마로덕 선교사와 김필수 강운림 목사 등이 찾아와 사역하면서 진안고원 일대에는 영적인 새바람이 더 거세게 불었다. 마로덕 선교사의 조사인 최대진이 1908년 1월 15일자 <예수교신보>에 기고한 글을 보면 이 지역에 얼마나 복음이 빠르게 전파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마로덕 목사와 같이 본도 동북지방 진안 장수 무주 용담 금산 진산 연산 고산 여산 익산으로 다닐 새, 4년 전으로 말하면 십군중에 주의 말씀을 듣고자 알고자 하는 이가 하나도 없어 재미없이 다니옵더니 그 믿지 아니하던 사람들이 지금은 각각 주의 말씀 듣기를 스스로 원하오며, 또 교회가 수십 처요 각 교회도 모이는 수효는 10인으로부터 80~90씩 되옵고….”

그 같은 분위기 속에서 거석리교회도 차츰 성장해나갔다. 성도들의 헌신으로 예배당이 새롭게 건축된 상거석리 양지바른 언덕은 ‘교회골’이라고 불리었고, 이원칠 홍순기 장로가 임직하면서 남부럽지 않은 조직과 지도력을 갖춘 교회로 우뚝 섰다. 1918년 작성된 총계표에는 주일학교 학생 48명, 세례교인 40명, 교인은 도합 65명, 가장 많이 모일 때는 85명이라고 기록돼있다.

1920년대에는 엘머 보이어(한국명 보이열) 선교사의 활약이 컸다. 보이열 선교사는 특히 어린 학생들을 전도하는 데 탁월한 은사가 있었다. 그 덕택에 거석리교회 주일학교에 모이는 숫자는 1931년에 무려 187명에 이를 만큼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 부귀중앙교회는 지역주민들과 함께 ‘예향공동체’를 설립해 장류사업을 벌이며 마을 발전을 도모한다.

하지만 이후 한국교회에 닥친 시련들을 거석리교회도 피해갈 수 없었다. 교회의 기둥 같은 존재이던 이원칠 장로가 1935년 숨지면서 폐당회 된 상태에서,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제의 탄압이 교회를 괴롭혔다. 가미나다를 교회당 안에 설치하고, 예배 중 동방요배를 강요하는 순사들에게 장대준 집사와 강성락 영수 등 교인들은 수시로 주재소에 끌려가고 폭행당했다.

예배당 종각이 헐리고, 종은 빼앗겼다. 게다가 기독교인들을 미국의 앞잡이로 몰아대는 핍박에 견디다 못해 결국 1942년 교회를 폐쇄해야 했다. 교회의 온갖 기록이 담긴 문서들조차 스스로 불태울 수밖에 없었고, 문 닫은 교회당은 2년 후 무너져 내렸다.

해방을 맞은 후 거석리교회는 일제 주재소 터에서 다시 예배를 시작했으나, 이번에는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전쟁 중이던 자유주의 신학과의 대립으로 총회가 분열하는 일까지 생겼다. 특히 총회의 분열은 거석리교회에 직격탄이 됐다.

소속된 전북노회 역시 우왕좌왕하던 와중에 1952년 늦가을 거석리교회는 두 개의 교회로 양분되고 만다. 부귀교회는 예장, 거석교회는 기장으로 각각 나뉘어 남이 되어버렸다. 심지어 한 집안 형제 중에서도 맏형은 거석교회로, 막내는 부귀교회로 출석하는 비극도 벌어졌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본디 한 가족이었다는, 언젠가 한 가족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공동체 의식이 있었다. 서로 결코 떨치지 못했던 이 염원은 마침내 20년 만에 성취된다. 부귀교회 대표 이영태 집사가 거석교회로, 거석교회 대표 구한규 집사가 부귀교회로 각각 찾아가 설교한 것을 계기로 1973년 두 교회는 다시 합병의 감격을 맛본다.

두 교회는 새로운 예배처소를 위해 다시 건축을 시작했다. 어린 주일학교 학생부터 노년 성도들에 이르기까지 함께 모래와 자갈을 짊어 나르며, 번듯한 예배당을 지어냈다. 예배당의 위치는 부귀교회와 거석교회의 딱 중간쯤이었다. 새로운 교회이름도 ‘부귀중앙교회’로 지었다.

이후 부귀중앙교회는 박순태 전도사에 이어 박찬억 김금동 김문갑 김현부 한성덕 목사가 강단을 이어받으며 순탄히 성장했다. 월평교회에 이어 궁항교회를 개척해 분립했고, 1992년에는 현재의 예배당을 완공했다.

제6대 담임목사로 1993년 부임한 전택복 목사는 사상 최장 기간인 25년 동안 부귀중앙교회를 섬기며 중흥기와 안정기를 가져왔다. 특히 잊혀져있던 세월의 퍼즐을 다시 꿰맞추면서, 2000년에는 100주년 기념예배와 백년사 제작 등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예배당 앞마당에는 설립 100주년 기념비가 ‘무진장 복음의 요람지’라는 자랑스러운 글귀와 함께 세워졌다.

이제 설립 120주년을 앞두고 부귀중앙교회는 소속된 동전주노회를 통해 총회에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지정을 청원하는 한편, 옛 예배당 복원과 함께 역사기념관 건립을 추진하는 중이다. 단지 지나간 역사를 회상하거나 과시하자는 의미가 아니다. 아직 완수하지 못한 진안고원 복음화의 사명을 이어가는 동력을 얻자는 뜻이다.

▲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잘 연결하여 부귀중앙교회의 아름다운 신앙유산을 잘 보존하겠다고 다짐하는 전택복 목사.

“진안에 와서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사역하다보니 어느새 은퇴를 앞두게 됐네요. 저도 나이를 먹고, 교회는 더 나이를 먹고. 이제는 설립 120주년을 잘 마무리하고, 믿음의 유산들을 다음 세대에 잘 물려주는 일만 남은 것 같습니다.”

선교사로 나갈 준비를 하다 진안 부귀중앙교회에 첫 부임할 때만 해도 전택복 목사는 농촌에서 장기목회를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타고난 성실함과, 상황을 슬기롭게 헤쳐 나갈 줄 아는 감각으로 25년의 시간을 채워나갔다. 특히 거의 소실되다시피 했던 역사를 오랜 노력 끝에 되찾아낸 것은 교회는 물론이고 개인적으로도 큰 기쁨이었다.

“교우들 스스로도 몰랐던 교회의 기원, 초기 교회를 세워나간 선배들의 행적 등을 발굴하면서 배우는 것도 많았고 점점 교회에 대한 큰 자부심을 갖게 됐지요. 부귀중앙교회 출신 목회자들의 큰 도움도 받으며, 목회에 더욱 책임감을 갖고 임해야 한다는 부담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지난 역사를 발굴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공동체가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한다면 결국 모든 게 허사가 될 수도 있었다. 때문에 한편으로는 제자훈련 아버지학교 등의 목회프로그램을 도입하고, 다른 한 편으로 지속가능한 자립방안을 모색했다.

“오랜 궁리 끝에 ‘예향공동체’를 설립했습니다. 이 지역의 특산물 중 하나인 콩을 가지고 각종 장류를 생산해 판매하는 사업을 벌인 것이죠. 이 사업에는 교우들 뿐 아니라 이웃 여러 농가들도 참여해 일종의 마을기업이 되었습니다. 군에서 지원을 받아 메주를 만들고 가공하는 공장도 만들며 지금까지 잘 운영하는 중입니다.”

전택복 목사는 부귀중앙교회 첫 예배당을 복원하고, 역사전시관을 건립하는 일을 남은 목회기간에 가장 큰 과제로 여긴다. 다행히 한 교우가 건물을 지을 토지를 기증하며 토대가 마련됐고, 기본적인 공사계획까지 마련된 상태이다.

“농촌목회를 하다 보니 ‘뿌린 대로 거둔다’는 진리를 깊이 실감합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보여드릴 게 있도록, 신앙의 후배들에게도 좋은 자취를 남길 수 있도록 더 열심히 목회에 임하겠습니다.”

고향 교회 아끼는 산태미목양회

▲ 부귀중앙교회를 축복하는 산태미목양회의 비문

“복음의 빛 따라 부귀 진안에 뿌린 일백년 세월, 일본군 신사참배 모진 세월에 굳게 닫힌 구원의 문 바라보며 기도와 눈물로 보낸 인고의 시간…재림의 주님 그 때까지 통일조국 세계선교 웅지를 모아 부귀중앙교회 복음의 빛 영원하길 바라노라.”

부귀중앙교회 앞마당의 백주년 기념비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있다. 비석을 세우고, 간절한 기원을 거기에 담은 주인공들은 산태미목양회 회원들이다. 산태미목양회는 부귀중앙교회 출신 목회자들이 고향 동네의 별칭을 따 1985년 조직한 모임이다.

부귀중앙교회에서는 유난히 수많은 목사 장로들이 배출되었다. 설립자 이원칠 장로의 차남 이정상 목사(은평교회 원로)를 필두로 홍사석 장로의 증손 홍양수 목사(연평교회) 등이 믿음의 가문을 이어가고 있다.

이리노회장을 지낸 주우경 목사(익산 청안교회), 군산노회장을 지낸 주경민 목사(군산 주는교회), 현 전서노회장 김기철 목사(정읍성광교회) 등도 부귀중앙교회 출신이며, 박귀득 목사(삼평교회) 김명상 목사(삼기제일교회) 정혜성 목사(성도교회) 등도 현역으로 활동 중이다.

부귀중앙교회가 산태미목양회의 긍지인 것처럼, 산태미목양회의 존재도 부귀중앙교회 가족들에게는 자랑스럽기 그지없다. 이들 각자가 써나가는 목회의 시간들도 넓게는 부귀중앙교회에서 비롯된 역사로 함께 천국에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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