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획] 다시 보는 총회 역사유산 (1)의성경찰서와 중리교회

의성경찰서 … 신사참배 저항과 주기철 목사 순교 의미 가장 잘 드러나는 공간
중리교회 … 권중하 전도사 순교역사 복원, 교회문화 변천사 확인할 자료 전시

총회 제102회기에도 소중한 역사적·문화적 유산들을 발굴하고 조명하는 작업은 활발히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번 총회는 역사위원회의 부산 초량교회와 구 의성경찰서(주기철 목사 일제강점기 수난지) 및 의성 중리교회에 대한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지정청원과, 6·25 당시 김종한 목사를 비롯한 다수의 순교자가 발생한 김제 만경교회에 대한 한국기독교순교사적지 지정청원을 받았다. 또한 역사위원회가 청원한 역대 총회회의록에 대한 한국기독교역사유물 지정도 가결되어, 제1호 역사유물 지정이 이루어지게 됐다. 역사위원회는 역대 총회회의록의 영인본 제작과 디지털화 작업 추진을 계획 중이다. 2019년 삼일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기념사업 추진 및 포럼 개최 청원도 받아들여져 내년부터는 본격적인 준비 작업이 시작될 전망이다. 순교자기념사업부에서 올린 총회 순직자 등재 및 명부작성 청원 역시 허락되어, 순교자들에 이어 순직자들에 대한 추모사업의 길도 열리게 됐다. 당장 이번 회기부터 선교현장에서 복음을 위해 사역하다 순직한 인물들을 대상으로 순직자 발굴활동이 개시될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경안노회에서 청원한 영덕 송천교회에 대한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지정 청원은 역사위원회로 보내 처리하기로 했다. 송천교회는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제288호로 지정된 목조예배당을 보존 중이다. 위원회를 통과하면 송천교회는 제6호 역사사적지로 지정되는 것이 유력하다. 본 지면에서는 새롭게 지정된 역사사적지, 순교사적지, 역사유물 등에 대해 앞으로 3회에 걸쳐 상세히 소개할 예정이다.<편집자 주>

주기철 목사 수난지 ‘의성경찰서’

▲ 지난 회기 총회역사위원회와 경중노회 관계자들이 옛 의성경찰서를 현장답사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100년도 되지 않았던 시절에 ‘검속’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공공의 안전을 해롭게 하거나 죄를 지을 염려가 있는 사람을 경찰에서 잠시 가둬두는 이 비인권적 행위가 일제 치하에는 당연한 듯 자주 행해졌다.

검속을 당하는 이들이 겪는 고통은 말 그대로 그저 옥에 갇힌 채 감시당하는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밤낮으로 쉬지 않는 고문과 학대가 자행됐다.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심신 곳곳에 남았고, 실제로 목숨을 잃는 사례도 드물지 않았다. 검속은 주로 항일독립운동에 가담한 인사들에 대해서 자행되었으며, 그 중에는 신사참배 반대에 앞장선 기독교인들이 포함됐다.

‘일사각오’의 순교자 주기철 목사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무려 4차례의 검속을 당하며 몸과 마음이 완전히 피폐해져, 마침내 옥중에서 목숨을 잃은 주 목사의 생애에서 1938년 8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계속된 두 번째 검속은 개인적으로나, 교회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기간이다.

1938년은 조선예수교장로회가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한 치욕의 해이다. 한국교회를 일본의 제국주의 정신에 굴복시키고자 한 강압적 움직임이 최고조에 달했던 그 시절, 온 몸으로 이에 항거하던 주기철 목사는 권력자들에게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마침 그 해 6월 경상북도 의성에서는 경찰이 ‘농우회’라는 조직을 통해 기독교 청년운동을 하고 있던 유재기 목사를 비롯해 여러 교회지도자들을 체포하는 일명 ‘의성농우회’ 사건이 벌어진다. 당시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던 주기철 목사는 이와 직접 연관이 없었음에도, 교묘하게 사건과 연루시킨 일제에 의하여 검속대상으로 지목된다. 그리하여 주 목사를 비롯해 믿음의 절개를 지키고자 했던 수많은 신앙인들이 모진 시간을 함께 보낸 장소가 바로 당시 의성경찰서이다.

▲ 순교자 주기철 목사의 수난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국내 유일한 사적지인 옛 의성경찰서.

의성경찰서에서 온갖 험한 고초를 겪으면서 주 목사는 자신에게 순교의 날이 임박했음을 직감했고, 풀려나자마자 산정현교회로 돌아가 첫 주일예배를 통해 성도들과 한국교회 앞에 남긴 설교가 그 유명한 ‘5종목의 나의 기도’이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옵소서.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게 하옵소서. 노모와 처자와 교우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옵소서.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라는 내용의 유언과도 같은 이 설교는 그리스도의 가상칠언과도 닮아있다. 의성경찰서는 주기철 목사가 지상에서 마지막 사역의 불꽃을 태우기 위해 스스로를 다진 수난의 풀무였던 셈이다.

의성 일대를 경계구역으로 하는 경중노회는 앞서 제101회 총회에 추성환 목사(철파교회)의 주도로 주기철 목사와 의성경찰서 관련 기념사업 추진을 요청하는 헌의안을 상정한 바 있고, 이번 총회에는 총회역사위원회와 남부산남노회가 의성경찰서를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로 지정해 줄 것을 청원한 안건이 통과되었다.

어찌 보면 기억하기조차 싫은 현장을 기념하는 이유는 의성경찰서가 남한 땅에 사실상 유일하게 남은 주기철 목사의 유적지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주 목사 외에도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희생과 고행의 길을 걸어간 증언대이기 때문이기도 한다.

현재 의성읍 후죽리에는 당시 의성경찰서 본관으로 사용되었던 한옥건물이 ‘의성상설전시관’이라는 간판을 단 채 보존되어있고, 유치장 겸 취조실로 사용되었을 것이라 추정되는 부속건물도 자원재활용센터로 여전히 남아있다.

교회사가인 박창식 목사는 “의성경찰서는 민족사적 의미와 더불어 주기철 목사 순교의 교회사사적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장소”라면서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지정 이후에도 총회와 한국교회 차원에서 더욱 깊은 연구와 보존 관리에 나설 필요성이 있다”고 강조한다.

권중하 전도사 최후 사역지 ‘중리교회’

의성경찰서와 관련된 또 하나의 중요한 인물이 있다. 주기철 목사와 동시대를 살았고, 같은 길을 걷다가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 권중하 전도사이다. 그 역시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앞장서다 1938년 의성농우회 사건에 연루돼 의성경찰서에 갇힌 후 참담한 나날을 보냈다.

▲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앞장서다 목숨을 잃은 권중하 전도사의 자취를 간직한 의성 중리교회 옛 예배당.

“고춧가루 물을 코에 붓고, 인두로 지지고, 무릎으로 시멘트바닥을 기게 하니 무릎이 벗어져서 피가 흐르고, 몽둥이로 때려서 온 몸이 멍이 든 채로 석방되고, 그런 고문을 며칠 만에 한 번씩 소환하여 다시 가하고, 일시 출감시켰다가 또 소환해서 고문하기를 1년간 계속했다.”

고인을 기억하는 대구 효목교회 윤두환 원로목사의 회고담과 경북노회록에 남아있는 몇몇 기록들은 사실상 고인의 이 땅에서 행적을 보여주는 증거들의 대부분이다. 해방 후인 1945년 11월 6일 대구제일교회에서 열린 경북노회 제42회에서는 권 전도사의 추도식을 의성시찰회가 주관해 시행하도록 결의한 바 있다. 최근에는 고인이 대구동산병원전도회를 통해 경북지역 권서인으로 활동했다는 기록을 박창식 목사가 발견해 널리 알리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그의 사진 한 장, 사망기록, 묘소의 위치, 유족이나 후손 등 어느 것 하나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고인의 정확한 실명을 두고서 조차 혼선을 빚는다.

하지만 권중하 전도사가 이 땅에 남긴 복음을 위한 헌신, 그리고 십자가의 길을 마다하지 않은 충성심은 그가 마지막으로 시무했던 빙계교회(현 중리교회), 효선교회, 금천교회, 옥정교회(현 춘산교회), 현리교회, 산운교회 등 의성 일대 여섯 교회에 지금도 면면히 흐른다.

특히 중리교회의 경우는 자칫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스러져버릴 수도 있었던 권 전도사의 존재를 현재로 소환해내는데 큰 디딤돌이 됐다. 고인이 시무하던 당시의 한옥 예배당을 지금까지 잘 보존해 역사자료로 활용하고 있으며, 소속된 경신노회와 총회순교자기념사업부를 통해 제101회 총회에서 권중하 전도사의 총회순교자명부 등재를 성사시키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1928년에 건립된 한옥예배당은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당시의 도덕률에 따라 남자와 여자의 출입문을 따로 두는가 하면, 예배당 한 가운데 기둥 세 개를 세우고 여기에 가림막을 쳐서 남녀가 서로 볼 수 없도록 만든 구조를 갖고 있다.

중리교회 고관규 목사는 “권 전도사님이 순교한 후, 일제는 이 예배당 안에서 보리와 콩을 타작하게 하여 예배를 방해하고, 천정을 훼손하는 등 만행을 일삼았다”면서 “하지만 성도들이 일제치하와 한국전쟁기에도 끝내 예배당을 지켜내 지금까지 보존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현재 교육관 겸 역사전시실로 활용되는 이 예배당 안에는 한 세기 가까운 세월 동안의 교회문화 변천사를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는 각종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현재 의성군문화유산 제35호로 지정된 상태이다.

또한 총회순교자기념사업부는 지난해 권중하 전도사의 순교자 등재를 기념하여 옛 예배당 곁에 순교기념비를 세운 데 이어, 올해 7월에는 등재 감사예배를 열었다. 총회역사위원회에서도 중리교회와 권중하 전도사의 사적에 주목해 제102회 총회에 한국교회역사사적지 지정을 청원했다.

중리교회 옛 예배당과 순교자기념비 곁에는 낡은 종탑 하나가 세웠다. 당초 나무로 세운 종탑에 달려있던 종은 일제가 강탈해갔고, 해방 후 돌과 시멘트로 마치 첨성대처럼 다시 쌓은 종탑 역시 1984년 철거된 후 현재의 철탑 모양으로 바뀌었다.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바뀌었다. 그 속에서도 끝내 변하지 않고 남은 것들은 우리를 각성시키고, 감동하게 만든다. 한국교회역사사적지라는 자랑스러운 이름이 중리교회에 과분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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