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성군 ‘주기철 목사 수난기념관’ 건립 추진 … 긍지의 순교사 계승 순례코스 기대

일제강점기 강압적인 신사참배 정책에 반대하고 겨레의 자주독립을 위해 헌신한 기독인들을 핍박한 장소로 악명 높던 구 의성경찰서가 마침내 한국교회 수난의 상징으로 대변신을 앞두게 됐다.

▲ 일제강점기 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기독인들의 수난지로 알려진 구 의성경찰서가 의성군에 의해 주기철목사수난기념관으로 변신을 앞두고 있다.

의성군(군수:김주수)이 11월 16일 개최한 의성항일운동기념관 권리 타당성 및 기본계획 수립용역 최종보고회에서 향후 사업방향을 ‘일제강점기 의성경찰서 주기철목사수난기념관’ 건립으로 결론 내렸다.

그동안 의성군은 구 의성경찰서 건물을 새롭게 활용하는 방안으로 다양한 대안들을 연구해왔다. 구 의성경찰서는 현재의 경찰서 건물이 완공되면서 기존 건물 중 한옥구조의 건물은 의성상설전시관으로, 서양식 구조의 건물은 자원재활용센터로 활동되어왔다.

하지만 이 건물이 과거 일제강점기에 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수많은 기독인과 애국지사들이 고문당하고 투옥된 수난의 현장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됐다.

▲ 의성군과 주기철목사의성수난기념관사업추진위원회 관계자들이 구 의성경찰서 활용방안을 논의하는 중이다.

특히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총회장:이승희 목사)에서 역사위원회(위원장:박창식 목사)의 청원으로 이 건물을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제4호로 지정하고, 경중노회(노회장:김병준 목사)와 의성군기독교연합회를 비롯한 지역 교계에서 이 건물에 ‘순교자 주기철 목사 의성수난기념관’을 건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면서 의성군에서도 건물의 활용방안을 고민하게 된 것이다.

연구조사가 개시된 후 구 의성경찰서 건물 및 그 주변에 관한 관련된 새로운 역사적 사실들이 밝혀지면서 한 때 옛 기록 중심의 종합적인 역사전시관을 건립하는 방안이 유력하게 검토되기도 했다.

그러나 여러 차례에 걸친 논의 끝에 평범한 역사전시관보다는 차별화된 테마를 표방한 기념관을 건립하는 것이 지역홍보에 있어서나, 기독교인 순례자들을 비롯한 관광객 유치에 훨씬 더 큰 효과가 있다는 판단이 내려져, 결국 ‘주기철목사수난기념관’ 안이 채택될 수 있었다.

지역교계가 힘을 모아 결성한 순교자소양주기철목사의성수난기념관사업추진위원회(회장:신칠성·이하 추진위원회)는 대대적인 환영 분위기이다. 기념관 건립을 통해 의성군 일대 교회들의 자랑스러운 항일투쟁 역사와 순교역사가 크게 조명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실례로 의성군 일대에는 수난의 발단이 된 ‘의성농우회’ 사건의 근거지 중 하나인 110년 역사의 의성교회(남세환 목사)를 비롯해, 구 의성경찰서와 함께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로 지정된 중리교회(고관규 목사), 순교자 엄주선 강도사 묘역, 3·1운동의 발상지인 쌍계교회 등 겨레의 역사와 고락을 함께한 한국교회의 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유적들이 즐비하다.

▲ 구 의성경찰서를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제4호로 지정하는 감사예배가 진행되는 모습.

이를 기반으로 의성지역은 물론 대구 안동 영천 영덕까지 잇는 경북지역 기독교 순례코스를 개발하는 것도 가능하다. 실제로 대구광역시와 광주광역시, 전북 전주, 충남 강경, 제주 일대에는 기독교 유적들을 중심으로 한 순례코스가 활발하게 가동되는 중이다.

의성군에서도 이를 의식해 담당 공무원과 추진위원회 임원들이 함께 창원시 진해구 소재 ‘항일독립운동가 주기철목사 기념관’, 전남 여수시 소재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관’ 등 비슷한 사례들을 찾아 답사하며 사업추진에 참고자료로 삼을 계획이다.

특히 경남 창원 일대에는 순교자 주기철 목사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순례코스가 개발돼 각광을 받고 있다. 이 코스에는 총 62.5km에 걸쳐 주기철목사기념관, 생전에 주기철 목사가 섬긴 진해 웅천교회와 마산 문창교회, 기도 처소였던 무학산 십자바위, 경남선교120주년기념관, 함안의 손양원 목사 생가 등이 포함되어있어 영남을 대표하는 기독교 순례지로 손꼽힌다.

또한 의성군과 추진위원회는 앞으로 설계구조나 전시 배치물 선정 등 기념관 건립과 운영의 제반 과정에서 적극 의견을 조율한다는 방침이어서, 사실상 기념관 운영자로 내정된 추진위원회의 역할이 크게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 구 의성경찰서를 견학하며 추성환 목사의 해설을 경청하는 대구산격교회 성도들.

추진위원회는 현재 교회와 성도들을 대상으로 1구좌 10만원 단위의 참여를 호소하는 모금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기념관에 전시될 주기철 목사 혹은 의성지역 교회 관련 역사자료들의 기증을 받는 데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경중노회에서도 기념관사업 관련 특별위원회(위원장:유광수 목사)를 조직하고, 올해 9월 3일 노회회관에서 총회총무 최우식 목사를 강사로 초청한 가운데 기념관 관련 사업추진 활성화를 위한 특별집회를 개최하는 등 열성적으로 동참하는 중이다.

특별히 총회와 지역노회 차원에서 최근 들어 주기철 목사의 복권 및 복직 추진, 신사참배 결의 회개운동 등을 벌이며 주기철 목사의 ‘일사각오’로 대표되는 신앙행적과 순교사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상태여서, 그 동력이 기념관 건립에도 이어질 것으로 현지에서는 기대한다.

이미 대구·경북 일대는 물론 전국적으로 의성일대 기독교 유적들을 탐방하는 행사들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최근에도 11월 18일 대구산격교회(한혜성 목사) 성도들이 구 의성경찰서를 찾아와 견학했고, 11월 27일에는 서대문교회 장봉생 목사 등 일행이 현장을 방문해 관계자들로부터 향후 사업계획에 대한 설명을 들은 바 있다.

추진위 사무국장으로서 이 사업 진행에 많은 공을 들여온 추성환 목사(철파교회)는 “아직은 시작단계일 뿐 앞으로 실제 사업의 착수 진행과정에서 다양한 의견과 구상들이 반영될 수 있다”면서도 “한국교회 수난의 역사를 제대로 전달하는 역할을 잘 감당하는 기념관이 완공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 주기철 목사

주기철 목사 누구인가

소양 주기철 목사는 1897년 경남 웅천에서 태어났다. 웅천 개통소학교(현 웅천초등학교)와 평북 정주 오산학교를 나온 후, 웅천교회에서 집사로 섬기다 당대의 부흥사 김익두 목사의 설교에 감동해 소명을 느끼고 1921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한다.

신학교 졸업 후 1926년 부산 초량교회를 시작으로, 마산 문창교회(1931년) 평양 산정현교회(1936년) 등을 담임하며 신실한 목회자로서 널리 명성을 알렸다. 경남성경학원을 설립해 이 지역 교회지도자들을 양성하는 데 힘쓰기도 했다.

특히 주기철 목사의 활동기는 조국 교회에 대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극심하던 무렵이었다. 대부흥운동의 진원지로서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리던 평양의 교회들은 특히 극심한 탄압을 받았으며, 조만식 등 민족주의자들이 출석하던 산정현교회 또한 요주의 대상이었다.

그 중심에 서있던 주기철 목사는 1938년 3월 예배당 헌당식 직전 검속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 투옥과 석방을 반복하며 지독한 고문으로 쇠약해진다. 특히 의성 농우회사건에 연루되어 의성경찰서에 투옥된 기간에 그의 건강은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빠진다.

1940년 2월에 잠시 석방되어 산정현교회에서 ‘다섯 종목의 나의 기도’라는 제목의 유언과도 같은 설교를 남기고, 이틀 후 다시 검거된다. 당시 평양노회는 주기철 목사를 면직하고, 산정현교회도 폐쇄된다. 그리고 주 목사는 1944년 4월 13일 옥중에서 순교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주기철 목사에게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며 독립유공자로 인정했다. 주요 장로교단은 주기철 목사를 공식 순교자 명부에 올리며, 한국교회사를 대표하는 인물로 추앙하고 있다. 총회와 평양노회는 약 80년 만인 2016년 주 목사의 복권·복적을 결의한다.

 

일제에 저항한 자주독립운동 

의성농우회사건

1930년대 평양신학교 학생들은 기독교농촌연구회, 곧 농우회를 조직한다. 각자의 고향에서 야학을 열고, 일제에 착취당하던 농촌경제 활성화를 위해 농사개량과 협동조합 조직 등 여러 활동을 펼쳤다.

농우회사건은 1938년 6월 경북 의성경찰서에서 유재기 목사, 정일영 목사, 오진문 장로를 비롯해 농우회 활동에 참여한 기독교 지도자들과 청년들을 반일사상 혐의로 체포하며 탄압한 사건이다. 당시 의성은 농우회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지역이었다.

일제는 의성농우회 사건을 한국교회를 탄압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당시 신사참배에 항거하는 기독교인들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중, 이들을 농우회 사건에 연루시켜서는 검속 등의 방법으로 잡아들여 극심한 고문을 가한 것이다. 그 결과 일제의 뜻대로 장로교 총회는 그해 열린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공식 결의한다.

당시 희생된 인물들 중 대표적인 이들이 평양 산정현교회의 주기철 목사, 의성 중리교회의 권중하 전도사 등이었다. 잔인한 음모와 핍박의 현장이었던 의성경찰서 건물은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로 지정된 데 이어, 주기철목사수난기념관으로 변신을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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