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획] 사적지 지정 앞둔 총회 신앙유산 ②전주서문교회

초기 한국교회 선교 열정과 열매 흔적 곳곳에 …
구약성경 번역 시작과 완성 유산 확인하다

“어? 여기 뭐가 있네!”

전주서문교회(김석호 목사)가 지금의 예배당을 건축하기 위해 한창 작업 중이던 1983년의 일이다. 앞서 1935년에 건축된 옛 예배당의 머릿돌 속에서 특이한 물건이 발견됐다. 세 가지 문서였다.

하나는 앞서 1933년에 간행된 성경전서, 다른 둘은 각각 호남선교 40년 약사와 전주서문교회 약사였다. 마치 오래된 왕릉의 부장품처럼 소중하고 은밀하게 보관되어온 이 보물들은 전라도에서 최초로 탄생한 이 믿음의 공동체가 무엇을 기초로 설립되었는지를 설명해준다.

“복음이지요. 선교사들의 발걸음을 이곳으로 이끈 힘은 바로 그것입니다. 미국 사회에서 촉망받는 존재였던 젊은 그들에게는 만약 복음이 아니었다면 이 땅을 찾을 일도 없었을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얼마나 끔찍이도 대한민국을 사랑하셨는지 전주서문교회의 역사를 통해 깊이 깨닫습니다.”

▲ 전주서문교회 역사관 전시실 내부 모습.

전주서문교회 역사관에서 해설사 역할을 담당하는 최창선 원로장로는 전시실 벽면에 걸린 호남선교 7인의 선발대 사진과 전주 은송리의 첫 초가예배당 앞에선 테이트(한국명 최의덕) 선교사의 사진을 차례로 바라보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부연하여 한마디를 덧붙인다. 전주서문교회의 역사가 바로 하나님 사랑의 증거라고.

실제로 전주서문교회 곳곳에서는 하나님 그리고 그분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이 땅에 쏟은 지극한 정성의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교회당 입구를 장식하는 오래된 종각으로 걸어가 보자. 높이 약 7미터에 이르는 이 나무탑에는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더 된, 아프고도 감동적인 사연 하나가 숨어있다.

7인의 선발대 중 한 사람인 전킨(한국명 전위렴)은 부지런한 인물이었다. 전주를 중심으로 군산 김제 등 전라도 곳곳을 누비며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워나갔다. 하지만 이 열매들을 위해 그가 치른 대가는 혹독했다.

어린 아들 셋을 풍토병으로 연달아 잃은데 이어, 본인마저 과로로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선교부에서는 전킨의 사역지를 전주 일대로 제한하고, 반경 20리 이상 이동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그의 열정은 그 무엇으로도 꺾을 수 없었다.

전주서문교회 담임목사를 맡아 예배당을 신축하고, 일대에 여섯 교회를 설립했으며, 의료선교사인 포사이드와 함께 고아원을 세웠다. 이처럼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일하던 그는 1907년 12월 폐렴으로 쓰러지고, 이듬해 1월 숨을 거둔다. 당시 나이 43세였다.

▲ 전킨 선교사 가족의 애달픈 사연과 헌신의 이야기가 담긴 전주서문교회 종각.

전주서문교회의 종탑은 남편과 자식들을 한국 땅에 묻은 고인의 아내 메리 레이번이 미국에 주문해 추모의 마음을 담아 헌납한 종을 가지고 세운 것이다. 계절이 네 번 바뀌고 다시 돌아온 겨울, 종탑에서는 그 때까지 일대에서 들어본 적이 없는 맑고 우렁찬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쉽게도 원래의 종은 전쟁준비에 광분한 일제에 빼앗기고, 해방 후 새로 제작된 종이 그 자리를 채웠지만 아름다운 이야기는 종탑과 함께 살아남아 지금까지 전해진다. 이 같은 희생과 헌신 속에서 교회들이, 학교와 병원들이, 성경학교가 잇달아 세워지며 복음의 지경을 넓혀나갔다.

124년 세월을 이어온 전주서문교회의 보석과도 같은 유물들과 이야깃거리들은 이처럼 예배당 앞마당에서, 행정실 로비에서, 역사관에서 그리고 두 개의 사료실 등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는 유산은 ‘성경’이다.

▲ 역사관장 정낙현 장로와 역사해설사 역할을 하는 최창선 장로가 교회 옛 문서들을 살펴보고 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전주서문교회는 선교사들과 한국인 성도들이 힘을 합쳐 구약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해 발간한 역사적인 장소이다. 앞서 1890년대 로스 선교사가 번역한 ‘예수셩교전서’가 존재하고 있었지만 번역상의 한계 때문에 새로운 우리말 성경의 제작이 요청되자, 레이놀즈(한국명 이눌서)와 언더우드 선교사 등의 주도로 구약성경 번역 작업이 시작됐다.

특히 레이놀즈는 전주서문교회를 담임하면서 한국인 성도들의 도움을 받아 착수한 지 5년 4개월만인 1910년 4월 2일 구약성경 번역을 최종 완성한다. 작업에 동참한 이승두 씨는 이듬해 전주서문교회 장로로 임직한다.

서문역사관 관장을 맡고 있는 정낙현 장로는 “당시의 구약 번역을 기념하는 성경전시회를 교회 설립 130주년을 즈음하여 열 계획”이라면서 “조만간 이루어질 역사관 개편과 사료실 정리를 통해 그간 감추어져 있던 새로운 사적들도 발굴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고 밝힌다.

연간 3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견학 차, 순례차 방문하는 전주서문교회의 역사 찾기는 지금도 진행 중이며, 멈추지 않고 새 단장이 이루어진다. 새삼스럽고도 흥미진진하다. 이 거대한 타임캡슐에서는 앞으로 또 어떤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줄 것인가.

▲ 전주서문교회 앞마당에 서있는 김인전 목사와 배은희 목사의 기념비. 애국신앙의 표본으로 살았던 두 사람의 정신을 이 뜰에서 배울 수 있다.

테이트 레이놀즈 전킨 등 호남선교의 선구자들이었던 선교사들에 이어 한국인으로는 처음 전주서문교회 담임목사가 된 인물은 평북 의주에서 건너온 김병농 목사였다. 이후 역대 총회장을 지낸 최성원 서은선 목사 등 여러 목회자들이 강단을 지키며 교회를 이끌었다. 한국인 최초의 장로교 총회장을 지낸 김필수 목사 또한 전주서문교회 출신이다. 이렇게 출중한 인물들 속에서도 전주서문교회 역사에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은 김인전 목사와 배은희 목사이다.

제6대 담임목사인 김인전 목사는 애국신앙의 표본과도 같은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충남 서천에서 태어나 고향마을에 한영학교라는 이름의 교육기관을 설립하며 민족을 이끌어갈 인재들을 키우던 김인전은 1914년 평양신학교 졸업과 함께 목사안수를 받고 전주서문교회로 부임한다.

1919년 삼일만세운동이 벌어지자 김인전 목사는 1919년 교인들에게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다량 제작하게 하고, 주변 교회들은 물론이고 신흥학교 기전학교에다 천도교인들까지 규합해 3월 13일 전주 남문광장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킨다. 시위는 75일 동안 21회에 걸쳐 벌어졌고, 연인원 5만여 명이 참여했다.

일제의 검거 표적이 된 김인전 목사는 이를 피해 중국 상해로 망명한 후, 임시정부의정원 의장을 지내고 무장항일운동단체인 노병회를 조직하는 등 왕성하게 활동하다 끝내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23년 상해의 한 여관에서 숨을 거둔다.

뒤이어 부임한 제7대 배은희 목사는 신간회 전주지부장을 맡아 독립운동의 명맥을 이어가는 한편, 교회 안에 유치원과 야학을 설립해 인재양성에 힘썼다. 아무런 기회도 희망도 없이 살아가던 식민지의 가난한 집안 자녀들에게 교회가 내민 손길은 구원의 메시지나 다름없었다. 야학에 몸담은 학생 수가 무려 500~600명에 이른 적도 있다고 전해진다.

뿐만 아니라 독신전도단을 조직해 농촌부흥운동을 전개하고, 신사참배 반대를 이유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해방 후 불안한 정국 속에서 한국교회의 조직을 수습하며 1946년 제32회 총회장에 피선됐고, 전북치안대책위원회 위원장과 민족자대회 회장 등을 맡아 사회에 공헌하다 1951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두 사람의 기념비는 1986년에 건립되어 역대 전주를 빛낸 인물들의 공적비와 함께 전주 다가공원 입구에 세워져 있다가, 최근 전주서문교회 예배당 앞마당으로 이전했다. 전주서문교회의 후예들은 물론 이 뜰을 찾는 수많은 순례자들에게 두 사람의 존재는 믿음과 애국 사이의 수많은 미로 속에서 바른 길을 제시하는 나침반과도 같다.

 

“개신교 유적지로 꾸며갈 것”
김석호 목사 “신앙유산 계승은 중요한 사명”

▲ 전주서문교회 100주년 기념비 앞에 선 김석호 목사.

“환란 중에 있는 소외된 이웃을 돌보고, 세상의 조류로부터 자신을 지켜 하나님 원리로 살아갑시다.”

부임한 지 2년째를 맞은 전주서문교회 김석호 목사가 교우들에게 전한 새해인사이다. 평범한 권면이나 덕담처럼 보이지만 이 말에는 전주서문교회의 자랑스러운 역사와 전통을 계승하고, 이제 막 넘어서고 있는 혼란기를 극복코자 하는 의지가 담겨있다.

“호남의 모교회로서 하나의 표본이 되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저희에게 있습니다. 단지 내 교회의 성장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교계 나아가 한국교회 전체를 바라보는 신중한 자세로 목회에 임하여야 한다는 무거운 사명감을 느낍니다.”

김 목사는 그래서 개혁주의 교회의 전통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변화하는 세태를 무시하지 않는 방향으로 목회의 기조를 잡고 있다고 밝힌다. 특히 강산이 두 번 바뀔 정도로 긴 세월동안 이어진 내분과 소송 때문에 지친 공동체가 회복하는 게 시급한 당면과제라고 강조한다.

“저 뿐만 아니라 당회원들 모두가 겸손하고 투명한 일처리 자세를 갖고 섬기려 하고 있습니다. 다행히도 상처가 아물고 새 살이 돋아나는 긍정적인 신호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는 중입니다. 젊은 세대들이 교회 내에서 서서히 기지개를 켜는 모습이 가장 반갑습니다. 이들이 교회 안팎에서 건강히 세워지도록 다양한 목회적 배려로 힘을 보태야겠지요.”

끝으로 김 목사는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전해 받고,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혼신을 다해 계승해 온 역사와 그 유산들을 지켜나가는 일을 꾸준히 추진할 계획이라고 설명한다.

“장기적으로는 우리 교회 터와 주변을 개신교 유적지로 꾸며나가려 합니다. 은송리에 세워졌던 최초의 초가 예배당을 복원하고, 역사문화연구소를 설립하는 방안까지 모색 중입니다. 과거 약자들을 돌보는 데 앞장섰던 선교사들의 마음을 품고 기부와 봉사에도 힘을 더할 생각입니다. 그렇게 다음세대에 훌륭한 신앙유산을 물려주는 것이 이 시기 우리 사명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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