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획] 사적지 지정 앞둔 총회 신앙유산 ⑥고흥읍교회

애국애족의 굳건한 기반 위에서 자라난 신앙전통, 한국교회에 뚜렷한 족적 남겨

▲ 고흥읍교회는 굳센 바위처럼 복음을 위해, 겨레를 위해 우직한 길을 걸어온 공동체이다.

돌로 쌓아 지은 예배당의 자태는 건축한 지 60년도 더 넘긴 지금까지 의연하고 굳건하다. 정규오 목사가 시무하던 1958년 당시 일본신사 터에 세운 120평짜리 예배당이다. 나라를 집어삼키고 교회를 옥죄었던 그 망령들을 통쾌하게 몰아내는 믿음의 쾌거였다.

고흥읍교회(최동식 목사)는 시작 과정부터가 심상치 않았던 공동체였다. 국운이 기울어 나라를 일제에 빼앗기기 직전의 암울한 상황, 남쪽 고흥반도의 향리들은 어느 서양인과의 뜻밖의 만남을 통해 희망의 빛을 발견했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에서 파송된 오웬(한국명 오기원)은 이곳 사람들을 찾아와 전도했고, 박용섭 박무웅 설준승 등 복음을 들은 여섯 사람이 1905년 4월 신우구씨의 한약방에 모여 예배하기 시작한 것이 옥하리교회, 즉 현 고흥읍교회의 출발이었다.

하지만 유교적 문화가 깊이 뿌리내린 당시 사회분위기를 갓 피어난 교회가 극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흥읍교회 연혁’(1961년 작성)에는 이를 ‘많은 사람들이 (복음에) 귀를 기울이던 반면에 외면을 한 자가 많았다’거나 ‘교회는 외부의 많은 조소와 비방과 환란을 겪으면서도’라는 표현을 사용해 녹록치 않았던 그 때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고흥읍교회의 개척자들은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모습으로 성장통을 겪어냈다. 전도도 열심히 했지만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벌어졌을 때는 앞 다투어 성금을 기부하는 등 겨레를 향한 사랑의 마음을 아낌없이 표현했다.

▲ 성령의 임재를 상징하며 예배당 꼭대기에 조각된 비둘기 장식.

그 인물들 중 목치숙이라는 인물이 있다. 거의가 40~50대였던 고흥읍교회 최초의 입교자들 중에 목치숙은 유일하게 20세의 젊은이였다. 교회설립 이듬해에는 전남노회 순천지방회로부터 조사로 임명을 받아 고흥읍교회 초대 교역자가 되었고, 다시 4년 후에는 장로로 임직했다.

1919년은 목치숙 인생의 대전환기였다. 당시 평양신학교 입학을 위해 길을 떠났던 목치숙은 갑자기 집으로 되돌아왔다.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 소식을 접하고는, 고향인 고흥에서도 이 운동을 일으키고자 독립선언문을 구해 들고 내려온 것이다.

그는 금산의 여러 기독교인들과 지인들을 규합하여 4월 14일 고흥 장터에서 만세의거를 일으키기로 계획한다. 하지만 당일 쏟아진 폭우로 시위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정체가 탄로 난 목치숙과 동료들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다. 그렇다고 이들의 의기가 꺾인 것은 아니었다.

이듬해 8월 25일 고흥기독교청년회를 결성한 목치숙은 초대 회장을 맡아 이끌어가며, 기독교청년회가 야학과 사립학교를 개설하고 물산장려운동을 전개하는 등 조국 독립을 위한 민족의 힘을 키우는 일에 주력했다. 목치숙의 든든한 동료로 모든 애국활동에 함께했던 오병주는 훗날 목사가 되어 고흥읍교회 제4대 담임목사로 부임한다.

▲ 고흥에서 최초로 세워진 유치원 전경. 1971년 완공한 건물이다.

이처럼 굳건한 기반 위에서 자라난 고흥읍교회의 신앙전통은 이후에도 한국교회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다. 한국인 최초의 목사이자 총회장을 지낸 이기풍 목사가 자신의 첫 사역지 제주도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사역한 곳이 바로 고흥읍교회였고, 소록도의 성자로 불리는 김정복 목사가 신사참배에 반대하다 투옥의 수난을 당한 것도 고흥읍교회를 담임하던 시절이었다.
훗날 순교의 길까지 걸어간 이 두 사람의 담임목사의 행적은 물론이고, 이들의 앞뒤에서 강단을 지킨 정태일 서재화 정규오 목사 등의 존재도 고흥읍교회 역사에 커다란 긍지로 남아있다. 그 역사가 이제 120주년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

물론 그 사이에 신학적 문제, 교단 총회의 분열의 여파 등으로 인해 여러 차례 분립의 아픔을 겪으며 고흥읍교회에도 적지 않은 상흔들이 남았다. 그렇지만 고흥읍교회는 여전히 고흥복음화를 위해 정진하며, 약한 교회들에까지 힘을 보태는 어머니 교회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고 있다. 고흥 최초로 설립한 유치원을 통해서도 수많은 인재들을 길러냈다.

최동식 목사는 “수많은 풍랑을 헤쳐 나온 우리 교회이기에 주님의 은혜와 돌보심을 항상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품으며 온 교우들이 믿음을 지키고 있다”면서 “앞으로도 고흥읍교회는 복음을 위해, 조국을 위해 사명을 다하는 자리에 있을 것”이라고 다짐한다.

예배당 지붕 오른쪽 끝에는 유심히 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쉬운 장식 하나가 있다. 비둘기, 바로 성령의 임재를 상징하는 존재가 돌로 조각되어 있는 것이다. 성령의 감화를 통해 시작된 공동체, 그분의 인도와 조명을 받아 지탱되어온 고흥읍교회의 역사는 앞으로도 그렇게 또 흘러갈 것이다.

▲ 고흥읍교회가 물려받은 신앙유산을 잘 계승하고, 변화하는 세태를 극복해나가는데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하는 최동식 목사.

“고흥의 최초 교회라는 타이틀 말고도 민족복음화의 기틀을 함께 이루어온 교회라는 긍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흥읍교회 제13대 담임목사로 사역 중인 최동식 목사는 강한 자부심을 숨기지 않는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다. 최초의 선교사 이기풍 목사, 소록도의 성자 김정복 목사, 보수신학의 거두 정규오 목사 등 고흥읍교회의 강단을 거쳐서갔던 이들의 면면만 보아도 수긍이 간다.

“이 분들이 한국교회에 남긴 순교적 자산, 선교적 자산, 신학적 자산들을 되새겨보면 고흥읍교회가 얼마나 험난하고도 영광스러운 길을 걸어왔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지간한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교회, 그것이 저희들의 저력입니다.”

물론 흔들림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다. 최동식 목사만 하더라도 부임 당시 3년 동안 담임목사가 부재했던 강단을 물려받아야 했고, 몇 해 전에는 태풍으로 본당이 파손되는 타격을 입기도 했다. 멈출 줄 모르는 이농현상과 고령화현상은 끊임없이 교회의 근간을 위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흥읍교회는 서로가 서로를 알아주고, 품어주며 앞으로 나아가는 힘을 가진 공동체입니다. 연배가 높은 교우들, 중직자들이 솔선하여 자신을 낮추고, 조용히 섬기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교회에 닥친 현안들을 해결할 뿐 아니라 주변의 더 작은 교회들까지 돌보면서 사명을 감당해왔습니다.”

실제로 고흥읍교회는 선교부를 중심으로 수많은 농어촌교회와 낙도교회를 돌보는 사역으로 이 일대 복음사역을 지탱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최근에도 암 투병 중인 한 목회자 사모의 치료비를 후원하고자 전 교인들이 저금통 모금캠페인을 벌인 바 있다.

“우리에게 닥치는 고난을 장애로 여기지 말고 오히려 신앙을 더욱 성숙하게 하고, 복음이 널리 전파되도록 북돋는 유익으로 여기자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경의 가르침인 동시에 고흥읍교회를 지켜온 믿음의 선배들이 남겨준 교훈이기도 합니다.”

최동식 목사는 앞으로 <고흥읍교회 120년사> 편찬과 역사관 건립을 통해 이 같은 신앙유산을 보존 계승함과 동시에, 지속적으로 고흥일대 복음사역의 중심기지로 활약할 수 있는 힘을 키우는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다짐한다.

고흥읍교회와 동요 ‘자전거’
목치숙 목사 애틋함을 담다

▲ 고흥문화예술회관 앞마당에 세워진 ‘자전거’ 노래비. 이 노래에는 고흥읍교회에서 사역한 목치숙 목사와 아들 목일신의 애틋한 사연이 숨어있다.

고흥읍내로 들어가는 초입인 고흥문화예술회관 앞마당에는 노래비 하나가 세워져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어린 시절 누구나 불러보았던, 낯설지 않은 동요 가사가 자전거 모양으로 제작된 돌비석에 새겨져있다.

‘찌르릉 찌르릉 비켜나셔요/자전거가 나갑니다 찌르르릉/저기 가는 저 영감 꼬부랑 영감/어물어물하다가는 큰일납니다.’

‘자전거’라는 제목을 가진 이 노래는 이 고장에서 나고 자란 작가 목일신의 동시에, 작곡가 김대현이 곡을 붙여 1930년대 조선예수교서회에서 발행하던 어린이잡지 <아이생활>에 발표한 작품이다.

그런데 이 노래에 등장하는 자전거에는 특별한 사연이 하나 있다. 목일신은 1974년 집필한 ‘나의 습작시대 회고담’에서 그 사연을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내가 보통학교 5학년 때에 선교회(미국남장로교 순천선교부)에서 우리 아버지에게 아주 멋진 자전거 한 대가 기증되어왔었다. 나의 아버지는 그 자전거로 각처의 교회를 순회하시며 교역의 일을 보셨는데 쉬시는 날은 그 자전거를 나에게 양보하여 주시어서 나는 시오리나 되는 보통학교를 그 자전거를 타고서 다니게 되었던 것이다. 하루는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갔다가 집으로 와서 지어본 것이 동요 <자전거>이다.”

목일신의 아버지는 고흥읍교회 최초의 장로이자 담임교역자였던 목치숙 목사였다. 신실한 목회자이자 열정적인 독립운동가였던 목치숙 목사는 우리말과 글을 말살하려는 일제의 탄압에 맞서 동시를 지을 것을 장남 목일신에게 권했고 효심 깊은 아들은 그 분부를 잘 받들었다. 수백편의 주옥같은 시와 산문들이 그렇게 탄생했다.

훗날 목일신은 전주 신흥학교에 진학 후 일제에 맞서는 격문을 집필하며 학생운동에 앞장서다 퇴학을 당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이후에도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목일신에게 ‘자전거’는 아버지 목치숙 목사에 대한 존경과 애틋함을 담은 특별한 작품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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