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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의 값진 희생, 긍지의 역사로 계승되다[역사기획] 사적지 지정 앞둔 총회 신앙유산 ③영광 법성교회

한국전쟁 참혹한 현장서 7인의 순교자 배출...순교신앙 기리며 무명의 순교자 발굴에 진력

 

▲ 한국전쟁 당시 빛나는 순교역사를 간직한 영광 법성교회 예배당 전경.

3월 중순이면 영광 법성포 앞 칠산바다에서 참조기들이 잡혔다. 잡은 고기에 소금을 뿌리고 바닷바람에 오래 말리면 그 맛이 일품이었다.

고려 중기 난을 일으키다 실패하고 영광으로 귀양 온 이자겸이 그 맛을 보고 반했다. 무슨 까닭에서인지 이 말린 생선을 임금에게 올려보내며 이자겸은 이름을 ‘굴비(屈非)’라 칭했다. “왕에게 선물은 하지만 결코 굴복하지는 않겠다”는 나름 비장한 각오를 거기에 담았다고 한다.

세월은 그로부터 800년이 흘렀다. 전쟁의 포화가 한반도를 휩쓸고 있던 1950년 9월, 마치 굴비처럼 단단한 줄에 묶인 채 끌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법성포 거리에 나타났다. 공산체제에 반대하는 이들을 색출하던 인민군들이 법성교회 교인들을 체포해 처형하러 나선 것이다.

당시 법성교회를 담임했던 김종인 목사는 이미 며칠 전 목숨을 잃은 터였다. 9월 13일 영광으로 밀고 들어온 인민군들은 김 목사를 면사무소에 가두어두었다가, 영광읍에서 법성포로 향하는 길목인 대사고개로 끌고 갔다.

양잿물을 입에 가득 부어 삼키도록 했으나 김 목사가 계속 입에 머금고만 있자, 인민군들은 그의 목을 칼로 쳤다. 피난 가라는 주변의 재촉에도 끝까지 남아 교회와 성도들을 돌보겠다고 고집한 목회자가 이 땅에서 맞이한 최후였다.

아버지의 참혹한 죽음 소식에 딸 순화 씨는 그만 정신줄을 놓았다.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공산당 물러가라!”고 외치다 결국 체포되었다. 인민군들은 그녀마저 신덕동의 저수지로 끌고 가서는 죽창으로 온 몸을 찔러 목숨을 빼앗고 만다.

▲ 법성교회 순교자 7명의 순교자 명부 등재를 기념하는 감사예배가 열리는 모습.

그리고 이제 교인들의 차례였다. 김 목사를 도와 교회를 이끌던 장기탁 장로는 인민군이 집에 들이닥치기 직전 간신히 탈출했다. 하지만 아내 송옥수 집사는 자식들과 함께 붙잡혔고 박옥남 집사 김진복 청년 등과 나란히 인민군들에게 끌려갔다.

대덕리 언목산 아래에는 바닷물이 드나들며 만들어진 해수 웅덩이가 있었다. 이곳까지 끌려온 교인들 또한 순화 씨처럼 온 몸이 죽창에 찔린 채 둠벙에 버려졌다. 함께 목숨을 잃은 이들 중에는 전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고 다니다 마침 영광을 방문했던 이광연 전도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굴비였다. 생존을 위해서 신념을 버리지 않았으며, 결국 목숨을 바친 대가로 하나님나라를 감동시키는 천국의 진상품이 된 것이다.

세월이 오래 흘러 그들이 이 땅에 머물러 살았던 흔적도, 그들이 최후를 맞은 곳들의 자취마저도 다 사라져버렸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순교자들의 증거라 하면 고 장기탁 장로 유족들의 증언과 그의 아내 송옥수 집사가 묻혀있는 가족묘역의 기록들이 사실상 유일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그들을 기억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제99회 총회에서는 김종인 송옥수 박옥남 신기운 심순화 김진복 이광년 등 법성교회 7인의 이름을 정식으로 순교자 명부에 등재했다. 교단 합동 이전 예장개혁 총회도 이들을 순교자로 지정한 바 있다.

▲ 순교자 송옥수 집사의 묘소.

등재가 이루어진 3년여 만인 2018년 3월 27일 법성교회에서는 이들의 순교자 등재를 기념하는 감사예배가 열렸다. 총회장 전계헌 목사를 비롯해 총회역사위원회 순교자기념사업부 등 여러 유관기관 인사들이 동참한 가운데 추모의식이 거행되며, 한 시대의 역사를 정리했다.

하지만 모든 작업이 완수된 것은 아니다. 아직도 찾아내지 못한 무명의 순교자들 신상을 발굴해 정식 등재하는 일, 순교기념관을 건립하여 믿음의 선배들의 정신을 기리고 계승하는 일, 법성교회를 한국기독교순교사적지로 지정하여 널리 교훈으로 삼는 일 등 교회와 총회가 손을 맞잡고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있다.

다행스럽게도 이 과제들을 해결해나갈 실마리들이 조금씩 발견되고 있다. 7인의 순교자 이외에 당시 함께 희생된 인물의 신원이 행정자료를 통해 새롭게 밝혀졌고, 순교기념관 건립은 현 예배당 내 순교역사실 설치로 시작해 차츰 확장해나간다는 복안이다.

순교사적지 지정 또한 총회역사위원회 위원들의 현장답사를 통해 긍정적인 검토가 이루어지는 중이다. 자료보충 등 몇 가지 절차가 완료되면, 이웃 염산교회와 김제 만경교회에 이어 올 가을 제103회 총회에서 세 번째로 한국기독교순교사적지에 지정될 것이 유력해 보인다.

법성교회 이병화 목사는 “마지막 순간까지 신앙을 잃지 않고 산 소망으로 학살자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했다는 순교자들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기억하고 계승할 것”이라면서 “그 마음을 본받아 온 교우들과 함께 순교사적 발굴보존과 영혼구원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한다.

우리의 기억 창고를 채워줄 법성포의 이야기가 더 풍성해졌다. 굴비의 스토리가 세상에 남아있는 한, 이를 능가하는 더욱 진실하고 감칠맛 나는 순교자의 이야기들도 함께 전해지리라.
 

“순교자 발굴사업 동력 얻어”
이병화 목사 “믿음의 역사 계승 책임 막중”

▲ 법성교회 순교자등재 감사예배에서 교회 역사를 설명하는 이병화 목사.

“우리 교회 송동필 장로님 등 여러분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7명 외에 이름 없는 희생자들이 20명 가까이 더 존재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 중 문순화 집사님의 딸 장완숙의 신원을 최근 확인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계속해서 순교자 발굴사업을 진행할 동력을 얻었습니다.”

법성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한 지 5년째를 맞이한 이병화 목사는 순교자 7인 등재 감사예배를 준비하고, 예배당 건축을 마무리하면서 교우들과 함께 역사 발굴에 많은 공을 들였다. 교회에 남아있는 자료들이 거의 없다시피 해, 약간의 가능성만 있어보여도 어디든 찾아다녔다. 그 결과 소기의 성과들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순교자들이 물려준 숭고한 믿음의 유산을 이어받은 교회가 아닙니까? 다음세대에 그 정신을 계승하고, 한국교회 성도들의 신앙을 일깨워야 할 막중한 책임을 느끼고 있습니다. 추가 등재 등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이병화 목사와 법성교회가 계획하는 일에는 순교전시관 건립, 옛 ‘ㄱ’자 모양의 예배당 복원, 법성교회 영광대교회 야월교회 등 순교사적을 지닌 인근 교회들과 연계한 순교자 순례길 조성 등이 있다. 영광군과 이들 교회는 협력해 영광군순교센터 개관 사업도 추진하는 중이다.

“건강하고 든든한 공동체로 서는 것은 법성교회가 이루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과제입니다. 우리 교회는 초창기부터 복음전파, 야학, 성경학교 등을 통해 문맹퇴치와 구습타파에 앞장서왔습니다. 그 정신을 이어 다음세대를 키우고, 이웃들을 사랑과 나눔으로 섬기는 교회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법성교회에는 현재 장년 성도와 주일학교 학생 400여 명이 출석하며, 가정교회 시스템을 도입한 소그룹 중심 목회전략으로 어촌교회의 한계를 넘어 성장가도를 달리고 있다. 한편으로는 예배당 1층에서 운영하는 그루터기카페의 수익금으로 구제 및 선교사업을 펼치는 등 지역사회를 섬기는 일에도 힘쓰고 있다.


종탑 모양 순교기념비에 담긴 사연
인민군의 진입 미리 알리다

▲ 법성교회 앞마당을 장식하고 있는 종탑 모양의 순교기념비.

1950년 9월 인민군이 영광을 점령하기 직전에 일어났다고 법성교회 주변에 회자되는 전설이 있다.

주인공은 교회당에서 예배 시작을 알리는 종이다. 어느 날부터인가 아무런 이유 없이 종소리가 마을에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종은 나흘 동안 계속해서 울렸다. 사람들은 불안감에 짐을 싸서 마을을 떠나기 시작했다.

열흘 후 실제로 인민군들이 마을에 진입했고, 김종인 목사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처럼 한국전쟁과 관련된 두 가지 스토리를 결합하여 예배당 앞마당에 새롭게 탄생한 것이 법성교회의 순교기념비이다.

전체적으로는 종탑 모양이지만 아래쪽에는 순교자들의 명단과 그 사적을 함께 기록해, 교회당 앞을 지나는 이들이 이 독특한 조형물에 담긴 사연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이병화 목사는 앞서 익산 북일교회가 유사한 형태로 건립한 조형물에서 착안한 것이라고 밝힌다.

순교기념비가 앞으로 법성교회를 대표하는 상징 역할을 담당할 것이 분명하지만, 이 지역에는 또 다른 자랑거리도 있다. 1918년 9월 미국남장로교 선교부에서 75만원을 후원받아 20여 평의 ‘ㄱ’자 예배당을 새로 세운 법성교회는 이곳에서 대성학원을 운영하며 지역사회에 신교육을 도입했다. 대성학원은 오늘날 법성초등학교의 전신이 되었다.

법성교회는 1900년대 초 법성포에 복음이 들어오며 형성된 일대 가정교회를 중심으로 1915년 성재동에 설립되었다. 전쟁으로 많은 것들을 잃으며, 한 때는 유흥점으로 사용되었던 해월루를 예배당으로 매입해 사용하던 시기도 있었다. 현재의 예배당은 2002년에 완공된 것이다.

이처럼 설립 초기부터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수많은 사적과 일화들을 남긴 법성교회는 새로운 믿음의 유산들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지금도 분투 중이다.

 

정재영 기자 jyjung@kid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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