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신문

상단여백
HOME 역사
복음 향기 진한 ‘양림동산의 꿈’ 시작되었다[역사기획] |사적지 지정 앞둔 총회 신앙유산 ④ 광주양림교회

근대 선교의 귀한 거름된 선교사 흔적 곳곳에 … 세계적 기독교 성지 개발 프로젝트 추진

어디부터 시작해야 하나. 순례자들은 발길을 정하기가 힘들다. 왼쪽도, 오른쪽, 앞쪽도, 뒤쪽도 어느 하나 포기할 수 없는 볼거리들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양림동은 눈을 쉴 수 없게 만든다.
광주시 남구가 추천하는 ‘선교투어’ 코스는 유진벨선교기념관부터 시작해야 하지만, 기독교인 해설사들은 종종 광주선교기념비에서 출발한다. 비록 지금은 자그마한 돌비석이 하나 있을 뿐이지만, 이곳은 광주에서 최초로 예배를 드린 역사적인 장소이다.

▲ 양림동산을 무대로 사랑과 헌신의 삶을 살다 간 이들이 안식하는 선교사묘원

1904년 12월 25일 유진 벨(한국명 배유지) 선교사의 사택에서 선교사 가족들과 동네 주민 등 200여 명이 모여 성탄예배를 드린 것이 광주의 공식적인 첫 예배이다. 미국 남장로교에서 파송한 유진 벨과 오웬(한국명 오기원) 선교사는 목포선교부에서 함께 올라 온 조사 변요한 변창연 등과 함께 양림동산을 중심으로 광주선교부를 일구었다.

제대로 된 장례조차 할 형편이 되지 못했던 가난한 집 아이들 시신을 그냥 맨 땅에 버리던 풍장터 양림동산에 이때부터 죽음의 기운의 물러나고 생명의 기운이 돋아났다. 교회가 세워지고, 학교와 병원이 들어섰다. 눈동자가 파랗고, 코가 뾰족이 솟은 낯선 이들의 진심을 서서히 눈치 챈 광주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서양인 동네 양림동산으로 모여들었다.

▲ 광주양림교회 전경

그들은 선교사와 함께 어울려 복음 들고 일하며 교회들을 성장시켰고, 새로운 교육과 의술을 이 땅에 도입했으며, 건축 음악 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기독문화를 꽃피웠다. 목숨 걸고 신앙을 지키다 핍박을 받기도 했다.

3·1운동 당시에는 교인들과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 학생들, 제중원(현 광주기독병원) 직원들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벌어져 수많은 이들이 투옥됐으며, 1937년에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일제에 맞서던 김현승 백영흠 등 교회 청년들이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6·25 한국전쟁 중에는 양림교회 제8대 당회장으로 시무하던 박석현 목사가 가족과 함께 순교의 길을 걸었다.

그 고귀한 자취들이 양림동산에는 고스란히 남아있다. 선교기념비에서 아랫길로 내려가면 이 땅에서 순직한 선교사를 추모하는 오웬기념각, 선진 농업기술을 이 땅에 전수한 선교사를 기리는 어비슨기념관을 둘러볼 수 있다.

수피아여고로 발걸음을 돌리면 광주3·1운동기념상을 비롯해 수피아홀 윈스브로우홀 커티스메모리홀 등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많은 문화재들을 관람할 수 있으며, 바로 옆 광주기독병원에서도 의료선교사들이 보여준 눈부신 헌신의 열매들을 살펴볼 수 있다.

▲ 광주의 첫 예배가 열린 장소에 세워진 선교기념비

방향을 바꿔 호남신학대를 향해 다시 언덕길을 오르다보면 고된 타향살이에 시름하던 선교사들을 위로해 준 호랑가시나무와, 제중원 애양원 등에서 사역한 의료선교사 윌슨이 머물던 우일선선교사사택을 비롯해 여러 채의 서양식 가옥들을 마주친다.

‘가을의 기도’로 유명한 김현승 시인을 추억하는 시비와 다형다방, 수피아학교와 광주YWCA를 중심으로 여성운동과 인권운동에 앞장섰던 조아라를 기리는 기념관, 숭일학교 출신 음악가 정율성이 태어난 생가 등 양림동산을 무대로 치열한 인생을 살다간 이들의 흔적도 엿보게 된다.
여기저기 들어선 미술관과 건물들마다에는 복음으로 일구어낸 양림동의 풍경들이 절묘하게 디자인돼 있다. 한 번에 다 둘러보기 어려울 만큼 양림동산의 볼거리는 풍성하다. 그리고 이 여정의 끝에 양림동산 꼭대기에 조성된 선교사묘원이 기다리고 있다.

양림동선교사묘원에는 총 45기의 묘소가 있다. 그 중 22기가 광주 목포 순천 일대에서 사역하다 생을 다한 미국남장로교 선교사들의 무덤이다. 비석 하나하나를 천천히 읽어가면서 위로와 감사가 가슴 속에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묘원은 순례자들에게도 훌륭한 안식처이다.

최근에는 광주광역시기독교교단협의회(회장:김성원 목사)를 중심으로 이 일대를 세계적인 기독교 성지로 개발하는 ‘양림동산의 꿈’이라는 이름의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광주양림교회는 그 모든 시간과 사건들의 중심에 서있었다. 강산이 열두 번째 바뀌는 세월 속에서 양림동산의 사연들은 공동체 속에, 성도들 각자의 삶 가운데 체화되고 나이테를 그렸다. 그 다져진 세월 속에서 복음은 더 예쁜 꽃을 피우고, 깊고 고운 향기를 널리 퍼뜨릴 것이다.
------------------------------------------------------------------
“역사는 오늘을 새롭게 한다”

  정태영 목사 “선교사묘역은 긍지의 장소” 

“제 마음이 나태해진다 싶으면 양림동산 선교사묘역으로 올라갑니다. 거기에 묻힌 선교사님들이 이 땅에 바친 헌신을 생각하면서 목회에 임하는 제 자신을 다잡곤 합니다.”

▲ 역사와 전통을 계승하는 것 못지 않게 바른 신학을 실천하는 일을 중대한 사명으로 여긴다는 정태영 목사.

정태영 목사는 광주양림교회에 부임하여 양림동 사람이 된지 올해로 21년째이다. 예배당 문만 나서면 사방에 널린 믿음의 유산들, 그 중에서도 선교사묘역은 가장 힘이 되어주고 자랑하고 싶은 장소이다. 손님들이 탐방 차 찾아올 때도 가장 먼저 안내하는 곳이다.

“양림동에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고, 골목골목 돌아보는 모습은 물론 반갑지요. 아쉬운 부분은 당초에 기독교 문화유산들을 답사하기 위해 방문하는 이들이 다수였다면, 요즘은 반대로 소비하고 즐기기 위해 구경 오는 경우가 더 늘고 있는 것 같다는 점입니다.”

정 목사는 양림동 그리고 양림교회에 대한 깊은 애정이 있다. 광주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며 근처에 술집 하나 없는 동네에서 중심에 위치한 교회를 담임하는 자부심, 그리고 광주 뿐 아니라 광양 웅동교회, 벌교 무만교회, 여수 우학리교회 등 전남 일대 수많은 교회들의 뿌리가 된 영적 요람을 지키고 있다는 책임감이 그를 붙잡는다.

“현재가 중요합니다. 아무리 빛나는 역사가 있고 전통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모습이 형편없다면 과거는 별 소용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목회에 더욱 사명감을 가지고 임합니다.”

은퇴를 5년 앞두고 있지만 변화하는 세태를 따라잡는 데 소홀하지 않은 것이 정태영 목사의 스타일이다. 그의 정신은 아직도 젊다. 그럼에도 개혁신앙의 전통과 본질을 지키는 것만큼은 정 목사에게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과제이다.

“복음 아닌 것에 너무 치중하는 오늘날의 경향이 걱정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신학이 생명입니다. 지역사회의 모태 교회라는 영예를 차지하고 있으니 바른 신학을 지키는 일은 우리에게 더욱 중대한 과제이지요. 타락한 시대에 회개하라는 메시지를 강단에 남아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외칠 것입니다.”

세 양림교회, 믿음의 우애 쌓다

교단 다르지만 ‘하나됨’ 위한 다양한 연합

합동 양림교회(정태영 목사)에서 통합 양림교회(노치준 목사)까지는 지척이다. 어른 보폭으로 47걸음이면 된다. 기장 양림교회(최학휴 목사)까지는 조금 더 걸리기는 하지만 300걸음이 채 되지 않는다. 물리적 거리만 가까운 것이 아니다. 마음의 거리는 훨씬 더 좁혀져 있다.

한 공동체였다가 교단 분열의 여파 때문에 구성원들 사이의 불화로 갈라선 교회들의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특히 지역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교회가 신학적 차이로 크게 다툰 후 나뉜 경우는 좀처럼 회복되기 어렵다. 오랜 세월 담을 쌓고 지내다, 다시 만나서 예배 한 번 같이 하기까지 무려 반백년이 훌쩍 넘는 경우도 있다.
▲ 광주양림교회라는 이름을 공유하는 세 공동체의 연합은 유명하다. 자주 만나 교제하고 소통하며 좋은 본보기를 만든다. 사진은 세 교회가 함께 개최하는 양림찬양제의 모습.
광주양림교회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1953년 예장 양림교회와 기장 양림교회가 결별하고, 1961년에는 예장 양림교회가 합동과 통합으로 헤어졌다. 물론 당시의 싸움은 치열했고, 그 후유증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날 이들 교회들의 사이는 친 형제간을 방불케 한다.

20여 년 전 세 교회 목회자가 의기투합한 것이 계기를 만들었다. 갓 부임한 정태영 목사를 환영하는 자리에서 드디어 세 사람은 세 교회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찬양제를 열기로 합의했다.

세 교회의 찬양대와 연주자들, 청년들과 주일학교 학생들까지 참여해 한 목소리로 주님을 높이는 찬양제는 지난해 20회째를 맞기까지 꾸준히 이어졌고, 매년 성황을 이루며 온갖 재미난 이야깃거리들을 만들었다.

세 교회의 만남은 찬양제에 그치지 않고 봄가을로 양림동산 선교사묘역을 가꾸는 일도 함께하며, 세 교회 당회원들을 중심으로 광주양림교회협의회를 구성해 정기적인 만남의 자리를 가지며 중요 연합사역들을 협의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했다.

특히 교회설립 100주년을 맞이했을 때에는 세 교회 공동 주최로 기념예배를 드리는가 하면, 교회 100년사까지 함께 발간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물론 분립 이전의 역사를 공동 집필하고, 이후의 역사는 각자 서술하는 방식이었지만 다른 교회들의 경우라면 시도조차 상상하기 어려운 결과물이었다.

세월이 흘러 막내였던 정태영 목사가 어느새 맏이 역할을 하게 됐다. 정태영 목사는 “세 교회가 각기 건강하게 성장하면서 소속 교단에서도 비중 있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어 더욱 자부심을 갖는다”면서 “서로의 색깔은 다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우애를 나누며 아름다운 하나 됨의 모습을 주님 오실 때까지 지속해 나갈 것“이라고 밝힌다.

정재영 기자 jyjung@kidok.com

<저작권자 © 기독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주양림교회#정태영 목사

정재영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