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획] 사적지 지정 앞둔 총회 신앙유산 ⑧김제 송지동교회

김제 일대 장로교회의 모태 역할 감당 … 철저한 다음세대 교육 사역 전통은 자부심

원래가 외부 노출이 잘 안 되는 동네였다. 사람들이 나룻배를 타고 만경강을 건너와서도, 사방이 빽빽한 숲으로 둘러싸인 이 마을로 접근하기란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울창한 소나무 때문에 이름 붙여진 송지동에 복음이 일찌감치 들어왔다는 사실은 그래서 참 놀라운 일이다.

▲ 1897년 설립된 이후 김제 일대 장로교회들의 모태 역할을 감당해 온 송지동교회. 사진은 교회 본당 전경.

송지동 사람들은 주로 군산까지 찾아가 장을 보고 왔다. 하루는 장터에서 서양선교사를 만났다. 전킨(한국명 전위렴)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선교사를 통해 복음을 들은 사람들은 그를 자기들 동네에까지 모셔 들였다. 1896년 문학선씨의 집 대청마루에서 송원선 강문성 최치국 문종삼씨 등 여러 사람이 모여 첫 예배를 드렸다. 송지동교회의 시작이었다.

이듬해인 1897년 정식으로 교회 설립이 이루어졌는데, 호남 최초의 교회인 전주서문교회가 설립된 바로 다음 해에 벌어진 일이다. 전위렴 하위렴 부위렴 등 여러 선교사들이 부지런히 송지동으로 왕래하며 성경을 가르치고, 세례를 베풀면서 교회는 날로 부흥했다.

전주예수병원을 설립한 마티 잉골드는 전주와 군산 등지를 오가며 선교사와 교회들을 도와 의료선교사역에 매진했다. 고국 선교부로 보낸 보고서에서 그녀는 송지동에서 머물렀던 시간들이 가장 기쁜 순간들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녀의 보고에서는 1900년 무렵에 이미 송지동교회는 물론 부근 일대에 복음이 왕성하게 퍼져나갔고, 특히 아이들을 열심히 가르치는 교사들의 재능과 헌신이 돋보인다는 내용을 찾을 수 있다.

▲ .‘ㄱ’자 형태로 건축된 옛 예배당의 그림. 송지동교회는 이 그림을 매주 주보에 게재하며 복원의 소망을 나눈다.

1902년에 작성된 전위렴 선교사의 송지동교회 방문 보고서에서는 당시 한국교회의 철저한 신앙자세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기술들을 찾을 수 있다. 특히 세례를 베푸는 일에 당시 선교사와 교회들이 얼마나 신중을 기했는지 확인하게 된다.

“나는 세례를 받기 위해 기다리는 71명의 사람들을 발견했다. 그들의 사역의 열매는 그들의 신앙 증명서로 나타났다. 새로운 형제들을 문답하는데 8일이 걸렸다. 평균 입교인 한 사람을 문답하는데 1시간이 걸렸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계속해서 보고서에는 ‘예수는 누구인가?’ ‘당신은 십계명을 지키고 있는가?’ ‘조상숭배를 금하고 있는가?’ ‘아침과 저녁에 가정예배를 드리는가?’ ‘다른 사람에게 복음의 진리를 가르쳐본 적이 있는가?’ 등 무려 21가지나 되는 질문 항목들이 이어진다. 오늘날 대폭 간소화하고, 일부에서는 허술해지기까지 한 세례식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던 것이다. 세례식을 거치며 사람들은 술을 끊었고, 축첩을 멈추었으며, 부지런히 가정예배를 드렸다. 1904년 무렵 송지동교회에는 이처럼 새로운 인생을 살기 시작한 신실한 교인들의 숫자가 200명에 육박했다.

▲ 1905년부터 작성되기 시작한 송지동교회 당회록.

교회가 부흥하면서 점점 더 커다란 예배당이 건축됐고, 이곳에서 문맹자들을 위해 낮에는 아이들에게 밤에는 어린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다음세대를 길러내는 일은 오래 전부터 송지동교회의 핵심 사명이었다. 1930년대 여름성경학교에는 어린이들 숫자만 400여 명에 이르렀다.

일제 강점기에는 찬송가를 빼앗아 불살라버리는 수난을 받고, 6·25 당시에는 수많은 성도들이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었다. 그럼에도 송지동교회 성도들은 굴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며 교회를 굳건히 세웠고, 남전교회 대송교회 대동교회 대신교회 동계리교회 등 김제와 익산 일대 수많은 교회들의 모태로서 역할을 감당했다. 그 가운데 단 한 번도 분쟁으로 교회가 갈라지거나 타교단으로 옮겨간 일이 없었다는 점도 눈여겨 볼 일이다.

선교사들의 뒤를 이어 김필수 백용기 김응규 김창복 김덕환 등 당시에 명성을 떨치던 한국인 목회자들이 강단을 지켰고, 서기행 목사도 전도사와 강도사 시절 3년 동안 송지동교회에서 담임교역자로 활약했다. 이 같은 내용들은 1905년부터 기록하기 시작해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는 송지동교회 당회록에 잘 담겨있다.

비록 건축물로서 옛 자취는 찾을 수 없지만, 이 당회록 그리고 김대생 장로 등이 적극 수소문해 미국에서 찾아낸 선교보고서를 통해 송지동교회의 옛 역사는 복원할 수 있게 됐다.

더 나아가 송지동교회는 다음세대를 위한 활발한 사역으로 믿음의 선배들이 실천한 정신들을 고스란히 계승한다. 제16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장현식 목사는 장기간 이 부분에 집중하며, 작은 농촌마을의 교회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 수준의 교육시설들을 갖추어놓았다.

▲ 송지동교회 창고에 보관 중인 옛 ‘ㄱ’자 예배당의 상량문과 첫 예배처소였던 초가집 마룻바닥 목재.

잘 정돈된 교육관, 엄청난 장서를 갖춘 도서관, 재미난 놀이공간, 도시교회도 부러워할 정도의 수련장은 송지동교회의 큰 자부심이다. 자녀교육을 위해 도회지로 떠난 교우들도 주일이면 자녀들과 함께 모교회로 돌아오는 이유, 해마다 여름이면 수많은 남녀노소들이 믿음을 키우기 위해 좁은 시골길을 따라 찾아오는 사연이 현장을 목격하는 순간 곧바로 이해된다.

120년 전의 소망을 담은 타임캡슐은 지금 그 문을 활짝 열고 있다. 송지동교회는 선교사와 믿음의 선배들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의 원형, 그리고 다음세대를 향한 꿈을 잘 간직하며 키우는 공동체이다.

▲ 30년 동안 강단을 지키며 송지동교회 최장수 목회자라는 기록을 쓰고 있는 장현식 목사. 교회 역사를 발굴하고 보존하는 일이 현재 장 목사에게 가장 큰 과제가 됐다.

“‘ㄱ’자 모양의 첫 교회당을 복원하는 일을 가장 시급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북 서해안 일대의 첫 교회라는 자긍심을 위해서도 이 사업은 당연히 우선과제가 되어야 하겠지요. 잃어버린 교회역사를 되찾는 일의 시작은 바로 여기에서부터입니다.”

장현식 목사는 햇수로 30년째 김제 송지동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교회 역사상 최장기간 강단을 지키는 기록을 매년 갱신하는 중이다. 그런 만큼 120년이 넘는 교회의 유산을 보존하고 복원하는 일에 막중한 사명감을 느끼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하지만 장 목사 본인만의 또 다른 이유들도 있다.

“생각해보면 아쉬운 순간들이 많습니다. 처음 부임할 당시에 낡은 건물의 목재들을 땔감으로 쓰는 모습을 목격했죠. 그 때는 무심코 지나쳤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바로 우리 교회의 첫 예배당을 뜯어낸 것이었답니다. 지금 같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인데 말입니다.”

이후에도 힘든 농촌교회의 현실을 타파하고, 다가오는 미래를 앞서 구축하느라 앞만 보며 달려오는 동안 과거를 찬찬히 돌아볼 여유를 갖지 못했다. 다음세대를 열심히 길러내며, 훌륭한 수련시설을 갖춘 교회로 유명세를 탔지만 장 목사 마음 한 구석에는 늘 아쉬움이 존재했다.

“첫 예배가 열린 초가집에서 뜯어낸 마룻바닥, ‘ㄱ’자 교회당의 상량문이 적힌 목재 등 교회의 옛 흔적들을 보관해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언젠가 이 유물들과 우리 교회의 자랑스러운 역사들도 널리 알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송지동교회 주보 뒷면에는 장 목사가 꼭 복원하고 싶은 옛 ‘ㄱ’자 예배당의 그림이 인쇄되어있다. 오래 미뤄두었던 역사 찾기의 소망을 교우들과 함께 나누면서, 국내외에서 교회와 관련된 중요한 역사기록들이 발굴되는가하면 숨어있던 보물들도 여기저기서 등장했다. 장 목사는 요즘 들어 부쩍 의욕에 불타오른다.

“매년 1000여명 가까운 사람들이 우리 교회를 찾아옵니다. 그 중에 특히 어린세대들이 많고요. 선교사들로부터 전해 받은 복음이 송지동교회 역사 속에서 어떤 열매를 맺었는지를 이들에게 보여주고, 자신들 또한 열방으로 복음 들고 나아갈 꿈을 갖도록 가르치고 싶습니다.”

 

교회 다락은 소중한 역사보물창고 
 

▲ 선교사들이 들여온 것으로 추정하는 송지동교회의 배잔용 성찬기.

“와, 이런 것도 다 있네.”

송지동교회 본당 꼭대기층에 들어서면 눈을 사로잡는 물품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첫 예배처소였던 초가집의 마룻바닥이라든지, ‘ㄱ’자 예배당의 상량문 목재처럼 기념비적인 물품들을 비롯해 일제 강점기에 사용됐다는 예배용 풍금과 잠자리채 모양으로 길게 제작된 헌금바구니, 낡고 빛바랜 강단용 의자 같은 것들이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당시 시대상과 문화형태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노령의 성도들에게는 특히 반가울 유물들이다. 세월이 바뀌며 예전의 교회용품들이 대부분 폐기되거나 대체되는 속에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하나 둘씩 모아둔 물건들이 이렇게 교회의 다락방을 채우고 있다.

교회 인력이나 재정형편상 관리와 보존에 많은 힘을 들일 수 없어, 창고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보관만 되는 상태이지만 이들 보물은 언젠가 다시 세상 밖으로 나가 사람들을 만날 날을 기다린다.

옛 ‘ㄱ’자 예배당 자리에 지금은 담임목사 목양실로 사용하는 건물에는 특별한 물건이 하나 더 있다. 성찬식에 포도주 배잔용으로 사용된 성찬기들이 그것이다.

아기 주먹만 한 크기의 사기잔에 초록 파랑 빨강색 띠를 두른 이 성찬기는 국내에서 흔히 볼 수 없는 형태를 띠고 있어, 교회에서는 이를 선교사들이 오래 전 외국서 들여온 것으로 추정한다. 때문에 교회사 연구가들이 이미 여러 점 수집해가고 현재 교회에는 30여 점만 남아있는 상태이다.

장현식 목사와 송지동교회 당회원들은 “‘ㄱ’자 예배당이 복원되면 그 안에 전시물품으로 들여놓을 의미 있는 물품들이 적지 않다”면서 “초창기 한국교회의 문화와 역사를 되짚어보는 공간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총회 차원에서 깊은 관심을 가져달라”고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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