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복음화 큰 걸음, 한국교회 자랑되다
한강 이남 첫 교회로 민족의 아픔 함께 해 … 다양한 사역 통해 이웃사랑 확장

제101회 총회에서 최초로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지정을 발표했을 때 초량교회가 포함되지 않았던 점을 의아해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제1호 승동교회가 수도권을 대표하고, 제2호 김제 금산교회가 호남지역을 대표한다면, 영남권을 상징하는 대표적 사적지로는 누구라도 단연 부산 초량교회를 손꼽기 때문이다. 초량교회는 한강 이남에 설립된 최초의 교회이자, 삼일만세운동을 비롯한 일제 치하 항일구국활동에 누구보다 앞장선 교회로서 숱한 역사적 기록과 숭고한 자취를 남겨왔다. 교회 역사관 안에는 120년 넘는 세월의 소중한 유산들이 보존되고 있다. 때문에 제102회 총회에서 다시 역사사적지 지정을 하며 초량교회를 목록에 올린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진다. <편집자 주>

▲ 복음의 행진, 겨레의 역사에 분연히 뛰어들며 120년 넘는 세월을 보낸 초량교회 예배당 전경.

부산역 앞에서 시작돼 초량동 산복도로로 이어지는 ‘이바구길’은 요즘 제법 인기 좋은 여행코스이다. 한 시간 반쯤이면 대충 돌아볼 수 있는 이 여행코스에서는 배낭과 운동화차림으로 길목 여기저기를 서성이는 여행객들을 연중 내내 발견할 수 있다.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주오’라는 구절로 유명한 김민부 시인의 자취며, 무려 168개에 이르는 계단과 모노레일, 가난한 이들에게 참 인술을 실천한 장기려 박사의 더 나눔센터, 청마 유치환의 우체통 등 온갖 볼거리들이 즐비한 멋진 탐방로의 중심에 바로 초량교회가 있다.

▲ 2011년 개관한 초량교회 역사관 내부 모습.

초량교회는 미국북장로교 선교부에서 파송한 베어드 선교사가 세운 부산 최초이자, 한강 이남의 첫 교회이다. 1890년 12월 미국 샌프란스시코에서 출발해 이듬해 1월 29일 부산에 당도한 윌리엄 베어드(한국명 배위량) 선교사는 서울로 올라갔다가 선교부의 결정으로 다시 부산에 내려온다.

그해 9월 당시 일본인 거류지였던 영서현(영선현)에 대지를 마련하고, 다음해 4월 일명 ‘옴니버스하우스’라는 이름으로 건축된 선교사 사택에 입주한 베어드 선교사는 자신의 사랑방에 사람들을 불러 모아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선교부에서 개설한 ‘한문서당’을 찾아온 학생들, 여인들, 항구 선원들이 전도를 받고 예배에 참석하며 점점 그 인원이 늘어났다.

1982년 11월 영서현교회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예배공동체는 영주동교회, 초량삼일교회 시절을 거쳐 초량교회라는 현재 명칭으로 정착했다. 베어드를 비롯한 미국북장로교 소속 선교사들이 경남 일대에서 왕성한 복음사역을 하면서 초량교회는 영남지역 모 교회 역할을 감당하게 됐다.

▲ 영주동교회 시절 작성된 생명록.

영주동교회 시절 호주선교부의 부지를 매입해 현재의 위치로 이전해오면서, 초량교회는 일제 치세에 시달리던 겨레를 위해 영남 일대 독립운동의 거점으로서 맹활약을 시작한다.

기미년 만세운동이 벌어지던 해, 초량교회 인근에는 안희재가 세운 ‘백산상회’라는 이름의 기업이 설립된다. 겉으로는 무역을 업으로 하는 회사였지만 실제로는 군자금을 모아 상해임시정부와 광복군을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초량교회의 여러 교우들과 선교사들은 이를 통해 독립운동을 음으로 양으로 적극 후원했다.

1932년 초량교회가 첫 개척교회로 설립한 산리교회 예배당은 초량교회 교우들이 신사참배 반대 등 항일운동을 모의하며 회합하던 장소로 활용되다가, 이를 발각한 일제에 의해 파괴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제2대 정덕생 목사를 비롯해 주기철 이약신 한상동 등 역대 담임목사들과 방계성 장로, 손명복 조수옥 전도사, 윤현태 윤현진 강루식 집사 등은 이와 연관해 옥고를 치르거나, 목숨까지 잃는 등 애국신앙을 보여준 산 표본들로 기억되고 있다. 초량교회의 이름이 한때 초량3·1교회로 불렸던 배경에는 이런 희생과 수난의 역사가 자리한다.

▲ 손양원 목사가 자필로 작성한 이력서.

초량교회 역사관에는 1920년 교회당 신축당시 헌금을 바친 내역들을 기록한 ‘예배당신축의연금장’이라는 문서가 전시되어있다. 이 장부에는 교우들 뿐 아니라 다수의 불신자들까지 건축헌금에 참여한 내용들이 나온다. 겨레를 위해 항거했던 초량삼일교회에 대한 이웃들의 신망이 얼마나 두터웠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민족사의 아픔에 함께한 초량교회의 역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수도로 정해진 부산으로 찾아온 수많은 피난민들에게 초량교회는 위로와 안식의 처소가 되어주었다. 당시 피난민 성도들이 초량교회에 모여 전개한 통회구국기도운동은 한국교회사의 역사적 사건 중 하나로 기억된다.

▲ 애니 베어드 선교사가 초량교회 사역당시 작사한 찬송가 ‘멀리멀리 갔더니’.

전쟁을 전후해 교회당 주변이 빈민들의 집단 거주지로 변모하면서 초량교회는 이들을 돌보는 사역에도 최선을 다했다. 이웃사랑을 온 몸으로 실천하는 교회의 전통은 이후로도 이어져 오늘날 ‘사랑의 도시락’ 운동이나 빛과소금복지재단을 통한 다양한 사업들로 계승하는 중이다.
초량교회는 오래된 역사와 관습 속에 안주하지 않고 지금도 다음세대를 양육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세대간 균형과 조화를 건강하게 이루고 있으며, 월삭기도회를 비롯한 다섯 가지 기도운동을 역동적으로 전개하며 ‘기도의 강이 흐르는 공동체’의 모습도 보여준다.

2011년 7월 개관한 초량교회 역사관에는 이처럼 길고도 역동적인 세월들이 응축되어 있다. 그 숨결을 느껴보고자 매일처럼 전국에서 찾아온 순례자들의 발길이 교회당 문턱을 넘나든다. 초량교회가 남긴 유산들은 비단 한 교회만이 아닌 한국교회 전체의 자랑이기 때문이다.
 

▲ 김대훈 목사(부산 초량교회)

제11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지 내년이면 20년째, 앞서 부교역자로 재임했던 시절까지 합하면 초량교회와 함께한 시간이 김대훈 목사(사진)의 인생에 차지하는 비중은 훨씬 더 늘어난다.

“깊은 우물 같은 교회이죠. 역사 자체도 오래되었지만 그 역사 속에서 주님의 은혜를 뼈 속 깊이까지 체험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매년, 매주 우리 교회는 그 은혜를 경험합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날까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교회로 서있고 싶습니다.”

김대훈 목사는 오랜 역사가 초량교회의 자랑이지만 동시에 그 역사 속에 매몰되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점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본질 사수와 시대적 변화를 동시에 추구하는 방향으로 꾸준히 목회를 펼쳐왔고, 그 결과 예배당이 자리한 부산 동구의 인구가 지난 20년 사이 절반 이하로 감소했음에도 교회 성장세는 꾸준히 유지되는 쉽지 않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저는 교회역사에 대해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의 공동체로서만 아니라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가는 삶이 모여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그래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님 백성으로서 자세와 사명에 충실하도록 열심히 지도하고 있습니다.”

부임 이후 교회 역사를 정리하고 발굴하는데 힘을 기울여 역사관을 개설하고, 2012년에는 <초량교회 120년 약사>를 발간하는 등 결실들이 적지 않았지만 상당수 자료와 유물들은 이미 사라졌거나 대외로 유출된 상태여서 아쉬움도 컸다고 김 목사는 말한다.

“그럼에도 초량교회가 지내온 역사를 통해 믿음의 선배들이 보여주신 나라사랑의 마음, 이웃사랑의 마음을 절절하게 배웁니다. 다음세대에 그 소중한 자산을 물려주기 위해 더 열심히 가르치고, 우리가 받은 은혜를 이웃들과 열방에 흘려보내는 사역에도 항상 최선을 다하렵니다.”

 

초량교회 역사관을 둘러보니

초량교회 역사관에 들어서면 벽안의 서양여성 한 사람의 사진이 제일 먼저 눈에 띈다. 남편인 배위량을 따라 한국에 찾아온 애니 베어드 선교사이다. 부산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 그녀가 낳은 딸 낸시는 안타깝게도 뇌척수막염으로 숨지고 만다.

▲ 초량교회 역사관에 전시된 여러 유물들. 주기철 목사가 사용했던 강대상.

사명을 위해 슬픔과 고독을 삭혀야 했던 애니 베어드가 잠잠히 써내려간 시들이 있었고, 나중에 이 시들은 한국 찬송가에 수록된다. ‘멀리 멀리 갔더니’와 ‘나는 갈길 모르니’ 등 우리에게 익숙한 찬송들은 이처럼 초량교회 초기 역사와 맥이 닿아있다.

역사관에는 배위량 선교사를 필두로 한 여러 선교사들과 초대 한국인 담임목사였던 한득룡 목사 이후 여러 담임목사들이 이어 섬기며 초량교회에 남긴 갖가지 행적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영주동교회 시절 작성된 교인명부인 ‘생명록’과 ‘당회록’, 백산상회와 상해임시정부를 통해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던 윤현태 윤현진 집사의 관련 자료들, 순교자 주기철 목사가 사용했던 강대상, 손양원 목사가 친필로 작성했던 이력서, 60여년 간 발간되었다는 교회소식지 <초량> 등 넓지 않은 공간임에도 역사관에는 눈길이 가는 전시물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 옛 선교사가 기증한 환등기.

예배당 맞은 편 골목길에 조성된 이바구길 담장에도 초량교회와 이 교회 성도들이 열심히 살아온 시간들이 간단한 글과 사진으로 요약되어 순례자들에게 소개되고 있다.

초량교회 역사관은 주일과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토요일은 낮 12시까지) 이용할 수 있으며, 교회 사무실 전화(051-465-0533)를 통해 사전예약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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