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획] 사적지 지정 앞둔 총회 신앙유산 ⑦소록도교회와 순교자 김정복 목사

일제와 해방 시기의 혼란 잠재운 김정복 목사 순교 후 소록도교회 신앙유산 지켜와

그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연약한 양떼들을 버려둘 수 없다고 했다. 늙은 목숨 살자고 도망갈 수가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끝까지 소록도에 남았다. 육신적으로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한 가족이 된 이들 곁을 지키기 위해서.

1916년 5월 17일 소록도에 낯선 사람 100여 명이 배를 타고 건너왔다. 일제의 수용정책에 따라 섬에 개설된 자혜의원(현 국립소록도병원의 모태)으로 찾아온 한센병 환자들이었다. 환자들의 숫자는 점점 늘었고, 자연히 병원과 정착촌의 규모도 커졌다. 이들에게 소록도는 치료의 공간이자 새로운 삶의 터전이었지만, 동시에 창살 없는 감옥이기도 했다.

▲ 매일 정오가 되면 조국과 한국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소록도교회의 풍경은 지금도 변함없다.

적지 않은 수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소록도로의 이주가 졸지에 신앙의 자유를 빼앗기는 계기가 되었다. 이미 광주 부산 대구 등지에서는 서양인 의료선교사들의 한센인 치료사역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들로부터 복음을 전해 듣고 천국소망을 품게 된 환자들에게 예배 없는 삶, 일제의 천조대신을 숭배하도록 강요받는 삶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급기야 섬을 탈출하는 시도들이 계속됐다. 이들을 붙잡아 취조한 결과 “우리는 기독교인인데 신앙의 자유가 없어 이 병원에서는 못 살겠다”는 대답이 나오자 일본인들도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그리하여 당시 일본 성결교단 전도목사로 활동하던 다나까 신사부로 목사가 1922년 10월 8일 소록도를 찾아왔다. 구북리의 1호사 건물에서 수십 명의 성도들과 첫 예배가 열렸고, 이것이 소록도교회의 시작이었다.

▲ 소록도중앙교회 앞마당에 세워진 김정복 목사의 순교기념비와 김두영 목사의 공로비.

원치 않았던 질병, 육신의 고통에 동반된 가난, 사람들의 외면과 천대, 가족과의 이별, 일본인들의 강압적 통제, 극심한 노동과 학대. 행복할 이유라곤 단 한 가지도 갖지 못했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기쁨과 소망을 찾았다. 교회는 금세 부흥했고, 정착촌이 들어선 섬 곳곳에 예배당이 세워졌다.

하지만 일제의 신사참배 정책이 심화되면서 소록도의 교회들에는 다시 암운이 드리웠다. 목사를 추방하고 그 자리에 승려를 앉히더니, 설상가상 새로 부임한 수호 마사히데 원장은 자신의 동상을 세우고 그 앞에 절하도록 강요했다. 거부하거나 반항하는 이들에게는 처절한 보복이 따랐다. 목숨을 잃는 이들도 허다했다.

고난의 시간이 흘러가고 마침내 해방이 왔다. 그렇지만 소록도의 혼란은 끝나지 않았다. 내부 소요로 인해 무려 84명의 성도들이 목숨을 잃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어수선한 상황에서 한국인 목회자가 소록도교회에 부임했다. 김정복이라는 이름을 가진 64세의 목사였다.

▲ 소록도에 신앙의 자유를 가져다 준 일본인 하나이 젠기스 원장의 공덕비.

충남 한산 출신의 김정복 목사는 대한제국의 군인과 하와이 사탕수수농장 노동자 시절을 거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남노회 소속으로 목회를 시작한 인물이다. 신사참배에 반대하다 옥고를 치렀고, 애양원의 손양원 목사로부터 소록도교회 부임을 권유받을 무렵에는 고흥읍교회에서 사역하던 중이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간 사람이었다. 천국 복음을 들려주고,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스스럼없이 대했다. 자기 딸을 살해한 채 인생을 포기했던 여죄수를 양녀로 삼아 돌보기도 했다.
김정복 목사가 재직하던 시절 마지막으로 장안교회가 세워지며 소록도 일곱 교회 시대가 열렸다. 소록도의 성도들은 참 목자를 만나 믿음의 꽃을 활짝 피웠다. 순교의 길을 걸으며 그가 떠난 후, 소록도교회는 오히려 더욱 굳세졌다. 바통을 이어받은 역대 교역자들과 장로들의 헌신 속에서 교회는 무럭무럭 자랐다.

섬 안에 성실성경고등학교가 세워지며 한센인 복음사역자들이 대거 양성됐고, 육지의 정착촌으로 떠난 성도들이 세운 교회들로 성진노회가 결성될 정도로 이 땅의 한센인 선교는 활기를 띠었다. 소록도교회의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는 천우열 전도사는 “우리 눈물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시련을 이기며 감사한 인생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머잖아 100주년을 맞이하는 소록도교회는 일곱 개의 교회당 뿐 아니라 최초의 예배처소였던 구북리 1호사, 소록도에 신앙의 자유를 가져다 준 일본인 하니이 젠기스 원장의 공덕비, 김정복 목사의 기도처였던 굴날뿌리 등 수많은 신앙유산들을 간직하고 있다.

소록도교회 제10대 담임목사로 섬기는 김선호 목사와 당회원들은 “선교사와 한국교회로부터 받은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며, 그 빚에 기도로 보답하는 삶을 지금도 열심히 살고 있다”면서 “마지막 때까지 말씀과 기도 속에서 한국 기독교성지 소록도를 지킬 것”이라고 다짐한다.

▲ 김선호 목사는 소록도교회가 지닌 믿음의 유산을 보존하고 계승하는 일에 한국교회가 힘을 보태줄 것을 호소한다.

“한때 7개에 이르던 소록도의 연합교회들은 이제 4개 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소록도 전체에 남아있는 인구는 500여 명에 불과하고, 당연히 교인들의 숫자도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소록도교회 성도들의 신앙에 결코 흔들림은 없습니다.”

소록도교회를 담임하는 김선호 목사의 설명처럼 섬 안에서 현재 예배와 목회가 이루어지는 교회는 직원교회를 제외하고 중앙교회 신성교회 동성교회 북성교회 뿐이다. 서성교회와 장성교회는 진작 문을 닫았고, 어렵게 명맥이 유지되어오던 남성교회는 올해 북성교회와 합병했다. “매일 낮 12시가 되면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정오기도회도 계속되고 있고, 불편한 몸을 이끌고 매일 새벽예배를 나오는 성도들의 열심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지난 100년간 지켜온 이 고귀한 믿음을 어떻게 보존하고 후대에 계승할 수 있을까 그게 가장 큰 고민입니다.”

폐쇄된 채 방치되어있던 서성교회 예배당을 복원하는 꿈, 소록도교회 유산들의 문화재청 근대문화유산 등록이 이루어지는 꿈, 소록도교회가 백주년을 맞는 2022년까지 기독교역사관 건립과 100년사 발간을 완수하는 꿈 등은 김선호 목사만의 것이 아니다. 교우들 또한 같은 꿈을 품으며 빈약한 살림을 털어 이미 7000만여 원의 기금을 모았다.

“교우들은 이미 자신들이 감당할 수 있는 이상의 헌신을 하고 있습니다. 총회와 전국교회가 뒷받침해주시길 바랍니다. 소록도교회의 역사적 발자취들과 아름다운 신앙유산들이 흔적 없이 사라지지 않도록 힘을 보태주십시오.”

다른 종교단체들이 외부의 지원 속에서 각자의 숙원을 척척 해결해내며, 갖가지 이벤트를 통해 언론들로부터 수시로 주목을 받는 광경은 이곳 성도들의 자존심을 종종 멍들게 한다. 그런 소록도교회에게 총회와 전국의 형제교회들은 현실적으로 가장 의지할 수밖에 없는 대상이다.

“두 명의 교역자가 매일 네 교회를 순회하며 돌보고 있습니다. 당연히 고되고 힘듭니다. 하지만 한센인들을 사랑과 진심으로 섬긴 순교자 김정복 목사님, 소록도교회와 한센인 선교의 기틀을 탄탄하게 닦은 김두영 목사님, 그리고 한센인 선교의 길을 찾아가신 직전 담임목사님들의 뒤를 따라 끝까지 우리의 사명을 다할 것입니다.”

 샛별부활동산, 김정복 목사 기리다

▲ 고흥군 등암리에 조성된 순교자 김정복 목사의 추모공간인 샛별부활동산.

죽음은 존재를 규정한다. 어떤 최후였느냐가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평가하는 척도가 된다는 것이다.

‘여기 작은 사슴섬에 한 목자 있었네/우리를 떠나 바다를 건너/벼랑에 선 외로운 양들/그 영혼 싸매주던 사랑의 손길이여.’ 박종구 목사의 추모시 ‘목자의 향기’를 새긴 시비가 샛별부활동산을 찾는 이들을 먼저 마중한다. 고흥군보건소 입구 도로변에 조성된 샛별부활동산은 소록도의 순교자 김정복 목사를 추모하는 공간이다.

6·25 당시 소록도에서 인민군에 체포돼 고흥 읍내에 설치된 정치보위부로 압송된 김 목사는 9월 30일 인근 야산으로 끌려가 총탄 앞에 목숨을 잃었다. 나중에 발견된 시신은 기도하는 모습이었다고 전해진다.

순교 이듬해 3월 3일 김정복 목사의 추모예배가 소록도교회에서 고대작 목사 집례로 열렸다. 1977년에는 소록도교회에서 김두영 목사의 노력으로 고인의 순교기념비를, 1978년에는 소록도병원에서 김정복 목사를 비롯한 순직자들을 기리는 순록탑을 각각 건립했다. 고인의 묘소도 옮겨 제대로 된 묘역을 조성했다.

천대성 목사가 이끄는 기독교십자성선교회는 1980년 고인을 소재로 한 영화 <사랑의 뿌리> 제작을 마친 후, 이를 기념하며 고인의 묘소에 순교기념비를 세웠다. 총회순교자기념사업부는 2002년 김정복 목사를 순교자 명부에 공식 등재하고, 다음해에는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김남식 저)라는 이름으로 전기집도 발간한다.

그리고 소록도교회와 고흥군 그리고 총회사회부가 협력해 김정복 목사의 순교묘역이 2014년 샛별부활동산으로 대대적으로 정비돼 재탄생한다. 고인을 추모하는 여러 기념비와 추모시비 등이 한 장소에 모이고, 서울태평교회와 대경CE의 후원으로 고인의 생애를 정리하여 소개한 안내판도 설치되었다.

순교신앙에 대한 교훈도 얻고, 휴식도 취할 수 있도록 정성들여 조성한 추모공원이지만 들르는 이가 많지 않아 아쉬움을 남긴다. 순례자들이 쉽게 찾을 수 있게 부근 도로에 이정표도 세우고, 공원에 대한 세심한 관리가 이루어지도록 지역교회들의 관심이 필요해 보인다.

소록도교회 성도들은 애양원 손양원 목사의 묘역과 달리, 김정복 목사의 추모공간이 상대적으로 왜소하게 꾸며진 부분을 몹시 안타까워한다. 총회역사위원회는 최근 이 묘역을 방문하고 한국기독교순교유적지 지정을 검토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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