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획] 사적지 지정 앞둔 총회 신앙유산 ⑨광주 삼도교회

‘광주지역 첫 교회’ 자부심 각인 … 중요한 선교 동력된 역사 재조명과 복원 움직임 활발

무안광주고속도로 나주 나들목을 빠져나오면 바로 만나는 연결도로에 요즘 확장공사가 한창이다. 예전의 무진주, 지금의 광주광역시가 크게 부상하여 중심축이 옮겨졌지만 본래 이 도로는 목포에서 영암과 영산포 나주를 지나 전북 군산까지 호남 서부의 요충지들을 잇는 길이었다.

▲ 삼도교회는 한국인 성도들이 자치적 역량을 발휘하며 복음 확장에 공헌한 공동체로 평가받는다. 사진은 교회당 전경.

자연히 복음을 들고 동분서주했던 옛 선교사들에게도 이 길은 즐겨 왕래하는 통로가 됐다. 그 길 주변으로 자연스럽게 복음이 전파되며 여러 교회들이 세워졌고, 광주 삼도교회(백형환 목사)도 바로 이 길목에 서있다. 본래는 나주에 속한 지역이었지만 대도시 확장세를 따라 현재는 광주광역시 광산구에 편입되었다.

1916년 7월 30일부터 기록하기 시작한 삼도교회 당회록의 첫 페이지는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배유지(본명 유진 벨) 목사와 이기풍 목사가 오셔서 성경 사도행전 20장 17절부터 35절까지 보고, 이기풍 목사가 기도한 후에, 이계수 집사를 장로장립하다.”

▲ 삼도교회 예배당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설치된 표지석.

100여 년 전 당시 한국교회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이 장면은 삼도교회의 역사적 중요성을 보여준다. 실제 초창기 삼도교회를 돌본 이들 목록에는 오기원 남대리 변요한 선교사, 백용기 목사, 변창연 마서규 임성옥 노응표 조상학 조사 등 걸출한 존재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삼도교회의 출발은 이보다 훨씬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일대 최초의 교회로 알려진 잉계교회(우산리교회)가 설립된 것이 1897년의 일이었다. 골말 혹은 동촌이라고 불리던 자신들의 마을에서 10km나 떨어진 잉계교회를 출석하던 정원삼 이문오 윤상삼 등이 삼도리교회를 분리해 세웠다.

역사 기록에는 삼도리교회 바다등교회 골말교회 등 여러 이름들이 등장하는데, 학자들은 이들이 같은 교회를 일컫는 다른 명칭이었다는데 의견을 모은다. 또한 학자들은 비록 명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교회 설립시기를 1897년부터 1898년 사이로 추정한다.

▲ 광주지역 최초의 교회라는 자부심이 돌판에 깊이 새겨져있다.

기독교향토역사연구소(소장:김호욱 교수)는 지난해 개최한 학술포럼을 통해 당시 어지러운 시대상황 속에서 소멸된 잉계교회의 역사성을 삼도리교회가 계승했으며, 따라서 광주권 최초의 교회 지위를 오늘날의 삼도교회에 부여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특히 학술포럼에서는 초창기 삼도리교회의 특징을 자치(self-governing) 자전(self-propagating) 자립(self-supporting) 등으로 설명하며, 선교사들에 의존하기보다 한국인성도들이 주도적으로 활동하며 발전한 공동체였음을 드러냈다.

교회 설립자 중 한 사람으로 자신의 여막을 삼도리교회 첫 예배처소로 내놓았던 이문오는 배유지 선교사의 어학선생 역할도 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나주선교가 양반 유생들의 반대로 벽에 부딪치면서, 이문오를 비롯한 한국인들이 선교사를 대신해 복음전파와 교회 운영에 주도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삼도교회는 이후 함평 성정교회 마암교회 문장교회 용성교회, 영광 하라리교회, 장성 황용리교회, 광주 구소교회, 나주 내산교회 등 주변의 수많은 교회들이 일어나는 토대가 된다. 광주 성내에서 자리 잡으며 성장한 광주제일교회 양림교회 등과는 별도로 광주권 선교의 중요한 동력으로 역할을 한 것이다.

1912년에는 초등교육기관인 기독 광명의숙을 개교해 문맹퇴치와 신앙교육에 앞장섰고(상자기사 참조), 한국전쟁 기간에는 김방원 목사와 김봉선 김봉길 장로 등 수많은 성도들이 회유 감금 겁박 등에 시달리면서도 신앙을 지켰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교회에서는 이들을 ‘산 순교자’로 부르며 기린다.

▲ 6·25 한국전쟁 당시 고초를 당한 삼도교회의 ‘산 순교자’들과 신앙을 따르다 목숨을 잃은 성도들을 기리는 기념비. 삼도교회의 대표적 상징물인 종탑. 돌로 쌓은 탑이라는 이채로운 형태로, 지금도 주일이면 맑은 종소리를 온 동네에 널리 퍼뜨린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마을의 급격한 쇠퇴와 함께 교세도 내리막길을 걷고 말았다. 예배당 위치는 바뀌었고, 교우들은 대부분 도시로 이주하거나 세상을 떠났다. 교회의 소중한 역사들과 함께, 삼도교회 존재는 하마터면 사람들의 기억 저편으로 묻힐 뻔 했다.

다행히 박대규 원로목사가 시무하던 시절부터 역사 찾기를 위한 노력이 일어나고, 지역교계가 광주기독교유적지기념회를 결성하고 삼도교회의 역사를 재조명하며 복원하는 움직임이 더해져 교회에 활기가 돌아왔다. 비록 현실적 벽 앞에 부딪쳐 진척되지 못하고 있지만, 교회당 옆에 광주기독교유적지기념관를 건립하는 사업도 한동안 의욕적으로 추진됐다.

올해 들어 삼도교회는 사라진 역사를 되찾고 기념하는 작업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중이다. 광주권 최초의 교회라는 표지부터, 광명의숙과 ‘산 순교자’들에 대한 기념비들이 차례로 세워졌다. 지나간 시절을 증언해 줄 인물들을 찾아내고 각종 관련 자료를 찾는데도 성과를 거뒀다.

이런 중에 남광주노회의 헌의와 총회역사위원회의 보고를 통해, 제103회 총회에서 삼도교회가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로 지정받은 일은 백형환 목사와 교우들에게 큰 경사가 아닐 수 없다. 신부남 원로장로는 “믿음의 선배들이 남긴 자랑스러운 역사가 잘 계승되고 후세에 전해질 수 있도록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한다.

▲ 삼도교회 앞마당에서 교우들과 함께 선 백형환 목사(왼쪽 첫 번째). 교회에 대한 긍지와 사랑을 교우들과 함께 키워나가고 있다고 말한다.

백형환 목사는 부임 후 삼도교회 교우들이 교회 역사에 대한 긍지를 가질 수 있도록 많은 힘을 기울였다고 밝힌다. 그 중에 하나가 다른 교회에서는 찾기 힘든 ‘타종위원’ 제도를 운영하는 것이었다.

“타종위원들은 대부분 80세 이상의 고령 성도들이 맡습니다. 우리 교회 최고령자인 전봉님 권사(94세)님도 작년까지 타종위원으로 섬기셨지요. 타종위원들은 맡은 역할을 성심껏 수행합니다. 비록 작은 일이지만 오래된 보물과도 같은 종을 울리면서, 교회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을 확인합니다.”

교회가 고령화를 넘어 이미 ‘초고령화’된 상태이지만 삼도교회에는 여전히 감당할 사명이 있다고 백 목사는 믿는다. 광주전남지역에 수많은 교회들을 일으키는 모태역할을 한 교회로서, 지나온 발자취들을 발굴·보전하여 널리 알리는 것이다.

“역사를 모르고서는 현재도 미래도 바르게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먼저 철저한 역사교육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하고, 소중한 믿음의 자산들을 후세에까지 물려주려고 합니다. 이는 비단 우리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광주교계 전체 나아가 총회와 전국 교회 차원에서 관심을 두고 협력해주셔야 할 일입니다.”

백형환 목사는 요즘 각종 방송출연과 신문기고 등을 통해 삼도교회의 역사 및 광주·전남교회사에서 차지하는 가치를 소개하는 일에 열심을 낸다. 예전처럼 맑고 웅장한 소리를 낼 수 없을 정도로 낡고 삐걱거리지만 여전히 제 역할을 감당하는 교회 종처럼, 삼도교회도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는 공동체가 될 것이라고 다짐한다.

 

‘기독광명의숙’은 긍지의 역사

 초창기 한국선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네비우스선교정책 중 하나는 교회마다 초등학교 수준의 학교를 세워 젊은 인재들을 일러내는 것이었다. 삼도교회도 이 정책에 따라 1912년 ‘기독광명의숙’이라는 이름의 학교를 세운다.

▲ 광주 삼도교회 앞마당에 건립된 기독광명의숙 기념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말씀을 교육이념으로 삼아, 예배와 성경공부를 비롯한 다양한 교육내용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기독광명의숙을 통해 마을의 문맹이 타파됐고, 기본적인 지식교육 외에 예의범절을 비롯한 품성교육도 이루어졌다.

특히 ‘노엘의 밤’이라는 행사를 통해 학생들이 각자 달란트를 키우고, 이를 마을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는 기회도 마련되었다. 뿐만 아니라 기독광명의숙은 지역사회에 항일교육과 여성교육의 산실 역할도 했다고 전해진다.

이 같은 내용은 1926년 기독광명의숙 교사로 시작해 학교가 공립 삼도남초등학교로 병합돼 문을 닫던 1937년 6월 9일까지 교장으로 섬겼던 고 김봉길 장로의 유품과, 김방원 목사의 육필 회고록, 당시 학교를 다닌 생존 성도들의 증언 등으로 확인된다.

김봉길 장로의 아들로 이 학교에 대해 깊이 연구한 김중배 장로(광주겨자씨교회)의 논문에 따르면 기독광명의숙의 중심은 바로 예배였다. “예배는 학교교육의 처음이요, 나중이었으니 철저히 예배에 집중되어야했다. 공부 시작 전 예배드렸고, 공부 끝나 하교 전 예배로 정리했다.”

철저한 예배교육은 학생들의 철저한 신앙으로 이어졌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극심한 상황에서도 학생들은 가정마다 배부된 ‘가미나다’(위패 단지)를 과감히 태워 없앨 정도로 믿음에 충실했다는 증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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