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러시아 월드컵은 이변의 연속이다. 1930년 시작된 월드컵은 2014년 브라질 대회까지 총 20번 열렸다. 그 중 삼바축구의 나라 브라질이 5번 우승했고 독일과 이탈리아가 4차례 정상을 밟았다. 그리고 마라도나의 나라 아르헨티나가 인구 400만의 나라 우루과이와 함께 두 번씩 정상에 등극했고, 축구 종가 잉글랜드와 21세기 축구를 이끈 나라로 평가되는 프리메라리가의 나라 스페인, 세계적인 유망주로 구성된 프랑스가 각각 한차례씩 정상에 올랐다.이제 살아남은 팀은 각각 한차례 정상등극에 그친 프랑스와 잉글랜드 두 나라 밖에
오늘 우리는 매우 슬프다. 이 말은 휴머노이드 로봇 ‘소피아’와 속삭인 독일 총리 메르겔의 말이다. 디펜딩 챔피언 독일이 한국에 2골차 패배를 당한 소식은 6월 28일 하루 종일 세계 언론과 누리꾼 사이에서 최대 화제였다. 독일의 축구 전문매체 키커도 “역사적인 패배에 챔피언 독일이 사라진다”고 보도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라는 말을 입증시킨 독일과의 일전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처럼 아예 비교 자체를 할 수 없는 그런 싸움이었다.국제축구연맹 FIFA 랭킹 1위와 57위의 이날 대전을 놓고 한국의 승리를 예상한 나라는 FIF
1930년 이래로 4년마다 세계인을 열광시키는 전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스포츠가 된 축구라는 이름은 1314년 영국의 문헌에서 발견된다. 매스풋볼이라고 불리웠던 초기의 게임은 위험한 오락이었다. 초창기 축구는 주먹질과 발길질이 다반사여서 물건이나 사람을 거칠게 다룬다는 뜻에서 풋볼이라는 동사가 생겨났다. 영국의 세계적인 대문호 셰익스피어도 그의 작품 리어왕에서 풋볼 같은 녀석이라는 표현을 써 상대방의 인격을 매도하고 있다. 19세기 중반까지 국왕이나 시장이 발표한 금지령만도 42건이나 될 정도로 축구는 강인한 남성들의 스포츠로
476년 서로마가 야만족들에 의해 멸망한 후 동로마는 정통성을 계승하며 비잔틴 로마 제국으로 불리게 되었다. 비잔틴의 명칭은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옛 이름 비잔티움에서 유래했다. 비잔틴 제국은 이 도시를 중심으로 한 로마제국이라는 뜻이다. 비잔틴 제국 비잔틴 로마 제국 동로마제국 등은 모두 똑같은 제국을 가리키는 이름들이다. 하지만 비잔틴 제국을 엄밀히 논한다면 주후 5세기에서 1453년 5월 29일 멸망하기까지 천년을 가르킨다.비잔틴 제국의 최고 전성기는 5세기였고 이후는 쇠락의 길을 걸었던 것이 비잔틴의 역사이다. 그 절정의 시기
좌주와 문생은 고려 귀족사회의 대표적 키워드다. 좌주는 과거시험문제를 출제하고 관리하는 ‘지공거’와 ‘동지공거’를 두는 고시관 제도이다.고시관의 주관으로 시행된 과거에서 합격한 사람을 문생이라 했다. 문생은 좌주를 ‘은문’이라 부르면서 평생 스승으로 모셨다. 이는 자신들을 선발해 준 감독관에 대한 예우이기도 하였다.이러한 좌주 문생관계는 공공연한 의례 풍속으로 발전했다. 좌주와 문생관계는 고려 문치사회의 큰 세력으로 나타났다.좌주와 문생관계가 확대되자 이재현의 장인인 권부라는 사람은 아예 좌주와 문생의 이름을 모아 을 만들
과학이 하우(how)에 대한 대답을 가르치고 있다면 기독교는 와이(why)에 대하여 대답한다. 과학이 하우(how)에 대한 질의 응답 시스템이라면 기독교는 와이(why)에 대한 질의응답 시스템인 것이다. 지금도 과학의 영역에서는 과학에 의해 문제가 제기 되었으나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이 너무도 많다. 이를 한계질문(limit question)이라고 한다. 과학이 무엇임을(what is)을 제시해준다면 기독교는 무엇이어야함(what should be)를 제시해 줌으로서 서로 보완해줄 수 있다.과학과 종교의 상호작용에 대하여 1921년
정신분석 심리학의 창시자인 프로이드는 행복을 ‘갈등이나 흥분이 없는 안정된 심리상태’라고 말했다. 또한 인본주의 심리학의 대표라는 메슬로우는 ‘어떤 절정감의 극치’를 행복의 본질로 이해했다. 코핫은 행복을 ‘정신적 산소의 경험’이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행복이란 상쾌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정서적 경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코핫은 행복을 얻기 위한 구체적 방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는 인류역사의 수많은 창조적 영웅들에 대하여 말하면서 저들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고 했다. 따라서 그는 기독교 신앙의
예수 그리스도는 3년의 공생애를 대부분 대화로 보내셨다. 예수님의 사역은 크게 세 가지로 대변되는데, 가르치고 먹이시고 치유하시는 것이었다. 주님은 어떤 일을 시도하실 때 대화로 시작하셨다.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는 최초의 이방여자 선교사를 만드는 일화를 남기셨고 엠마오 도상에서 만난 제자들과의 대화 역시 부활을 믿지 못하는 자들에게 확실한 교육의 장이 되게 하셨다. 부활 이후 디베랴 바다로 고기 잡으러 간 제자 베드로를 다시 소명하실 때도 대화로서 다가가셨다.대화는 모든 나눔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대화 없이 나누는 물질은 효과적
서세동점! 이는 19세기 후반이 되면서 서양세력에 의해 동아시아가 침략을 당하던 시절 생겨진 정치적 산물이다. 1860년 조선의 비변사에는 참담한 보고가 날아든다. 서양 오랑캐인 영국 프랑스 연합군에게 사대하던 나라 청나라의 수도 북경이 함락되었다는 보고였다. 당시 동지사를 수행해 북경에 다녀온 서장관인 조윤주의 ‘문견별단’에는 청나라의 제9대 황제인 함풍제, 문종이 황망한 모습으로 북경을 탈출해 북쪽의 열하로 피신했으며 영국 프랑스 연합군은 북경교외에 있던 황제의 별장인 원명원을 약탈하고 불을 질렀다고 기록돼 있다. 청나라와 영국
1444년 세종대왕은 를 발표한다. 이글에서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삼는다. 농사짓기는 먹을 것의 근원이니 왕정에서 먼저 해야 할 것이다.” 세종은 권농, 즉 농사를 권장하고 장려하는 일에 앞장섰는데 그 가운데 ‘친경’(親耕)은 국왕이 몸소 밭을 가는 시범을 보이는 것이었다. 조정은 농사 여건을 개선하기 위해 수리시설인 제언을 쌓았고 농경에 제일 중요한 노동력을 제공하는 소를 도살하지 못하게 했다. 감사와 고을 수령들은 농사를 살피는 책무를 짊어졌고, 수령들은 파종과 제초 작업은 물론이고
세계문명의 첫 발상지가 메소포타미아이다. 메소(Meso)는 중간이란 뜻이고 포타미아(Potamia)는 강이란 뜻이다. 따라서 메소포타미아는 유프라데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의 넓은 지역을 말한다. 특히 티그리스 강은 험하다는 뜻의 이름으로 이 어근에서 타이거(tiger:호랑이)가 나올 만큼 사나운 급류의 강이었다. 메소포타미아의 첫 문명은 B.C 4000년경 초기 청동기 시대에 등장한 수메르 문명이다.위대한 선사인으로 불리는 수메르인들은 검은 머리의 사람들이었다. 최초로 수로를 통해 관계농업의 장을 연 이들은 목축에 능했고 농작물을 체
기독교인들에게 아주 친숙한 용어가 ‘거룩’이다. 거룩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신앙적 의미의 말이다. 거룩한 성도들, 즉 거룩한 무리가 된 하나님 자녀들에게 꼭 필요한 말이다. 한 마디로 거룩은 예배자의 선행조건이다.구약의 원시족장 중 가인과 아벨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사는 안 받으시고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다. 우리는 이 사건에서 믿음 없이 예배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다고 해석한다.하지만 가인은 제물 이전에 예배자가 될 수 없는 삶을 산 것은 아닐까!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것은 아마도 아벨이 예배자의 삶
4월 3일은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 줄곧 왜곡되고 은폐되어온 제주4·3사건 70주년의 해이다. 제주4·3사건은 해방 후 남한이 미군정 하에서부터 이승만 정권까지 벌어진 사건이다. 1950년 김용하 제주도지사가 밝힌 제주4·3사태 사망자 수는 2만7719명이었는데, 그로부터 10년 후인 1960년 6월 6일 자진신고를 한 국회기록에는 1만4028명으로 축소되었다. 그리고 2000년 김대중 정권에서 최종 확정한 사망자는 1만4028명으로 기록되어져 있다. 상기한 기록이 말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제주4·3사건의 상처가 골 깊게 남아있는 것
320년경 삼위일체를 부인하면서 예수는 하나님과 유사한 신성을 가진 피조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알렉산드리아의 사제 아리우스였다. 여기에 대하여 삼단논법으로 아리우스의 주장에 반박한 사람이 아타나시우스였다. 그는 “하나님만이 구원자이시다. 피조물은 같은 피조물을 구원할 수 없다. 고로 구원자 예수는 피조물이 아니며 하나님이시다.” 결국 아리우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추방된다.아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니코메디아의 주교 유세비우스의 지지를 받으며 세를 확장하면서 테러를 일삼았다. 이런 상황에서 소집된 공의회가 니케아회
1519년 쯔빙글리는 스위스의 취리히 대성당 사제로 임명된다. 1522년 3월초 쯔빙글리는 친구 프로샤우어의 집에서 저녁모임을 갖는다. 때는 예수그리스도의 수난일 40일을 기리는 고난주간이었다. 고난주간 기간에는 일체의 육식과 음주가 금기시 되고 있었다. 저녁모임이 길어지자 프로샤우어는 소시지를 내왔고 쯔빙글리를 제외한 모두가 간식으로 맛있게 먹었다. 그런데 이 일이 입소문으로 퍼져 급기야는 시당국이 알게 되었고 시의회는 프로샤우어를 체포 벌금을 때렸다.중세유럽의 가장 큰 특징이 무엇인가? 그것은 동일한 신앙으로 기독교 국가를 이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