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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6년 신성로마 황제 카를 5세는 루터파의 진멸을 시도한다. 당시 오토만 제국의 슬레이만 대제와 신성 로마제국의 카를 5세는 세계패권을 다투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카를 5세에게는 도처에 적이 생기는데 그것이 프랑스 왕실과의 군사적 충돌이었고 로마교황과의 군사적 충돌이었다. 따라서 카를 5세는 애초 계획했던 기독교 박해를 진행할 수 없게 된다.1526년 오토만 제국이 침공했을 당시 독일의 루터파 영주들은 개신교 권리를 요청할 제국회의를 요청한다. 이에 황제 카를 5세는 자신의 동생 페르디난트 공작에게 슈파이어(Speyer)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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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0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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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2년은 스페인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해였다. 700년간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한 그라나다 왕국을 몰락시킨 해였다. 소위 레콩퀴스타(Reconquista), 즉 재정복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술탄 무함마드 12세로 하여금 장탄식(the last sigh of the Moor)과 함께 저들 영화의 상징인 알람브라 궁전을 남겨둔 채 아프리카로 도주하게 만들었다.1492년의 두 번째 사건이 알람브라 포고령이다. 이는 유대인의 추방과 이단 심문이었다. 이 포고령은 가톨릭의 개종을 명한 사건으로 이를 거부하는 자들은 추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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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13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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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베드로 대성당 건축기금 마련이라는 명목으로 면죄부 판매를 시작한 레오 10세는 1520년 6월 루터에게 최후통첩을 한다. 60일 이내에 이단성을 인정하고 1000년 중세교회를 지탱해온 근간을 흔들고 있는 주장들을 철회하라고 경고한다. 이에 루터는 “주여 일어나소서 멧돼지가 거룩한 포도원을 파괴하고 있나이다”라며 교황의 교서를 불태우고 자신의 입장 철회를 거부했다.당시 교황의 눈에는 루터가 교회를 더럽히는 멧돼지로 보였지만 루터는 자신의 본문을 잃은 교황이 교회라는 포도원을 허는 멧돼지와 여우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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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06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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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개조 반박문 사건은 종교개혁의 시작이었고 새 시대 개막의 상징이었다. 이로써 역사는 중세가 아닌 근대로 건너오게 되었다. 루터의 글은 금속활자로 인쇄되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었다. 누군가가 95개조 반박문을 면죄부 판매 책임자인 마인쯔의 대주교 알브레히트에게 보냈다. 당시 당황한 알프레히트 대주교는 이 문서 95개조 반박문을 교황에게 보내면서 사태는 일파만파로 확대된다.면죄부 판매비용으로 성베드로 대성당의 건축비를 충당했던 레오 10세는 일개 수도사인 루터의 반박문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다음해인 1518년 교황 레오 1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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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30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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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면서 진심으로 우려했던 것은 면죄부 구입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는 가짜 기독교의 등장이었다. 아무런 희생도 봉사도 헌신도 없이 구원을 받는다는 이 허무맹랑한 요설 앞에서 그는 95개조 반박문을 통해 이렇게 주장하였다.제32조 ‘사면장으로 구원을 판매한 이들은 그 가르친 이들과 함께 저주를 받을 것이다’. 제86조 ‘교황은 오늘날 어떤 대부호보다도 더 부유하다. 그런데 성베드로 대성당을 지을 때 왜 자신의 돈을 쓰지 않고 가난한 신자들의 돈을 쓰려하는가’. 제95조 ‘면죄부라는 거짓된 확신이 아니라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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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3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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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는 3년에 한번씩 호적을 정리했다. 당시 호적에는 오늘날의 직업에 해당하는 ‘직역’(職域)이라는 것을 기재하게 했다. 이 직역 중에는 ‘유학’과 ‘학생’이라는 것이 있었다. 지금 우리는 관직이 없는 선비를 살아서는 ‘유학’이라 부르고, 죽어서는 ‘학생’이라고 칭하는데 이는 잘못된 속설이다. 조선후기 실학자로 을 쓴 안산 출신의 이익은 그의 저서 에서 “선비는 모두 학교에 속해 있는데 이게 살아있을 때는 학생이 아니란 말인가?”고 했다. 조선 초기만 해도 유학과 학생은 성균관과 사학(四學), 즉 향교의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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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6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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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교회재판이 세상법정으로 가 한국교회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사회 법정이 범죄자의 처벌과 징계를 목적으로 한다면 교회재판은 교회의 거룩성과 질서를 세우고 범죄자를 교정하여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게 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그리고 책벌의 지위제한은 목회자와 교인이 그 대상이다. 교단헌법에서 책벌은 권계, 견책, 정직, 면직, 수찬 정지, 제명, 출교가 있다. 권징은 재판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책벌소송을 할 때 교인은 3심제, 목회자는 2심제를 거친다.사회법정에서 다루는 교회 재판 중에는 교회재산과 쟁점에 관한 분쟁이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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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09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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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동아일보는 창간 15주년을 기념하여 연재소설을 모집했다. 이때 1등으로 당선된 작품이 심훈의 다. 1935년은 동아일보가 주최한 브나로드 운동이 끝난 해였다. 브나로드는 19세기 러시아의 지식층이 ‘민중 속으로’라는 구호를 외치며, 민중 계몽운동을 전개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후 이 말은 계몽운동의 고유명사처럼 쓰였고 1931년 동아일보는 이 운동을 전개하며, 대학생과 지식인들이 여름방학 중 농촌으로 내려가 봉사활동을 하게 했다. 이들은 야학을 만들어 한글과 산수를 가르쳤는가 하면 시국강연, 위생강연 활동도 병행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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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5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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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년대 교황 중의 교황이라 불리던 이노센트 3세가 누렸던 권력은 한 세기만에 종료된다. 중세 말의 교황청은 한마디로 경제적 기관과 같았다. 교황은 영적인 돌봄보다 다양한 명목의 세금징수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면죄부와 성직이 매매되고 있었고 사제들로부터 상납을 받는 것이 일상화되고 있었다.A.D 1300년 보니페이스 8세 교황은 희년을 선포했다. 교황 보니페이스 8세는 무너지고 있는 중세와 변화하는 시대를 감지하지 못한 인물로 각국의 국왕들을 봉신으로 취급했다.프랑스의 국왕 필립 4세는 자국의 교회를 장악하고 교황청에 보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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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8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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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신의 덕목으로 성(誠)을 중요시하여 성심(誠心)으로 사람을 대했던 율곡 이이. 그는 진정한 조선의 사대부로서 사명을 다한 채 49세라는 나이로 1584년 고단한 삶을 마감한 현인이었다.1574년 선조 7년에 저술한 (萬言封事)에서 이이는 이렇게 주장한다. “정치는 시세를 아는 것이 중요하고 일은 실제로 그 일에 힘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치를 하면서 시의(時宜)를 읽지 못하면 정치의 효과를 거둘 수 없습니다. 시의란 때에 맞추어 법을 만들고 백성을 구하는 것입니다.” 선조께 올린 글이었다. 시대상황에 적합한 법을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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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28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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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간다. 만세를 부르고 천황 폐하 만세를 목청껏 부르고 대륙의 풀밭에 피를 뿌리고 너보다 앞서서 나는 간다. 피는 뿜어서 누런 흙 위에 검게 엉기인다. 형아, 아우야 이 피는 너들의 피다. 너들의 뜨거운 피가 2300만 너들의 피가 내 몸을 통해서 흐르는 것이다. 역사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뿌려지는 피다. 반도의 무리가 님께 바친 처음의 피다.” 주요한의 시 의 전문이다.이 시는 1938년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킨 이래 실시한 지원병에 최초로 전사한 이인석이란 청년의 주검을 찬양케 한 시다. 주인공 이인석은 충복 옥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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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21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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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 조광조는 1519년 중종반정으로 조선 왕조가 개혁을 요구하던 시대에 그 중심에서 이일을 시도하다 39세라는 나이로 생을 마감한 미완의 개혁가였다. 조선 선비의 표상으로 성리학적 이상사회를 이룩하려던 그는 한마디로 혁명적 지식인이었다. 너무나 올곧기에 부러진 표본으로 회자되는 그는 연산군의 난정을 바로 잡는다는 명분하에서 일어난 중종반정의 국가적 여망에 부응하여 등장한 사림의 기수였다.제2차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운 개국공신 조온의 5대손으로 훈구가문 출신이었던 그는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조선선비의 이상인 치열한 학행으로 개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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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14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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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8월, 519년간 이어져오던 조선은 대한제국이라는 이름과 함께 사라졌다. 일본은 자국 영토를 편입한 한반도를 조선이라 불렀다. 2000만 동포들은 나라 잃은 슬픔을 분노와 저항으로 표출했다. 1910년 9월 7일 전남 광양 출신의 매천 황현은 절명시를 쓰고 자결했다. 1888년 생원시 복시에 장원급제한 황현은 당대의 시인으로 문장가로 역사가로 나라 잃은 슬픔을 죽음으로서 항거했다.당시 지식인들은 각국 공사관에 독립을 호소했는가 하면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민초들의 저항에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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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7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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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침탈로 고통 받던 시절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확장되고 있을 때, 안정된 삶의 영위는 하나의 희망사항이었다. 불안한 삶과 만성적인 실업은 식민지 조선인들을 투기라는 열풍으로 몰아갔다. 1920~1930년대 투기 열풍은 미두와 금광 투기였다. 미두는 미두장(米豆場)의 준말로 인천, 군산, 부산의 곡물거래시장에서 이루어진 쌀 거래를 의미한다.당시 조선의 가장 대표적인 생산물이었던 쌀의 집하와 거래를 위하여 개설된 미두거래소에 선물거래를 통해 투기적 차익을 얻고자 하는 투기꾼들이 모이면서 미두장은 이판사판의 투기장이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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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4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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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이후 중세는 도시들의 시대가 된다. 도시들의 인구와 경제적 규모로 인한 위상이 변방의 공국들보다 더 커지고 있었다. 무역이 급증하면서 도시의 경제력은 그 위상이 압도적으로 큰 부자들이 출현했는데 가장 부유했던 가문이 메디치가였다. 메디치가는 은행업으로 예술의 중심지 피렌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당시 메디치가는 금화를 찍어내어 화폐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만큼 메디치가가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중세는 나라나 도시마다 통화가 달랐다. 영주들은 화폐가 없는 농민들에게 세금으로 농산물을 받았고 당시 영주들은 혼사의 지참금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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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7 1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