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 목사(주필)

1930년 이래로 4년마다 세계인을 열광시키는 전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스포츠가 된 축구라는 이름은 1314년 영국의 문헌에서 발견된다. 매스풋볼이라고 불리웠던 초기의 게임은 위험한 오락이었다. 초창기 축구는 주먹질과 발길질이 다반사여서 물건이나 사람을 거칠게 다룬다는 뜻에서 풋볼이라는 동사가 생겨났다. 영국의 세계적인 대문호 셰익스피어도 그의 작품 리어왕에서 풋볼 같은 녀석이라는 표현을 써 상대방의 인격을 매도하고 있다. 19세기 중반까지 국왕이나 시장이 발표한 금지령만도 42건이나 될 정도로 축구는 강인한 남성들의 스포츠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영국 청교도 혁명의 영웅 올리버 크롬웰도 학창시절 유명한 풋볼 선수였다. 이런 축구가 19세기 영국사회에서 영국의 신사도가 도입되며 신사들의 사교 스포츠로 자리매김 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스포츠맨십이 강조되었고 승패보다 페어플레이를 중시하게 되었다. 이런 영국축구는 주변국으로 전해졌고 영국이 해가지지 않는 나라로 세계 대제국이 되면서 19세기 제국주의는 축구를 세계화하기에 이른다. 이런 가운데 1904년 FIFA가 파리에서 창립된다.

1905년 초대회장인 프랑스의 로베르 게렝은 파리에서 열린 총회에서 제1회 대회를 1906년 개최할 것을 결의했다. 영국 4개 협회를 포함한 유럽15개국이 4개 그룹으로 나뉘어져 경기를 한 후 스위스에서 준결승 및 결승을 치룬다는 내용이었으나 교통이 불편한 것과 경비부담으로 무산됐다. 특히 스웨덴이나 스페인은 축구협회 결성이 되지 않았고 프랑스는 두 팀이 서로 자기들이 국가대표라고 우기며 싸우고 있었다. 초대회장 로베르게렝은 대회무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고 모처럼 불던 축구 열기는 1914년의 제1차 세계대전으로 사라져갔다. 전쟁은 유럽 여러 나라의 축구경기를 중단시켰고 월드컵 준비는 가라앉고 있었다.

1918년 전쟁이 끝나고 또다시 축구 열기가 일어나고 있었는데, 이후 1920년 종주국 영국이 축구협회를 탈퇴했다. 이유는 중립국이 패전국과 경기를 했다는 것 때문이었다. 이때 제3대 회장인 줄 리메는 세계선수권대회 개최에 힘을 쏟는다. 1926년 줄 리메의 오른팔이었던 앙리 드로네 사무총장은 “아마추어 프로 모두가 참가하는 세계 챔피언 대회가 필요하다”고 역설, 1928년 FIFA회의는 2년 후인 1930년 제1회 대회를 열기로 하고 4년마다 개최할 것을 찬성 25 반대 5표로 가결, 지금의 월드컵이 탄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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