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 목사(주필)

서세동점! 이는 19세기 후반이 되면서 서양세력에 의해 동아시아가 침략을 당하던 시절 생겨진 정치적 산물이다. 1860년 조선의 비변사에는 참담한 보고가 날아든다. 서양 오랑캐인 영국 프랑스 연합군에게 사대하던 나라 청나라의 수도 북경이 함락되었다는 보고였다. 당시 동지사를 수행해 북경에 다녀온 서장관인 조윤주의 ‘문견별단’에는 청나라의 제9대 황제인 함풍제, 문종이 황망한 모습으로 북경을 탈출해 북쪽의 열하로 피신했으며 영국 프랑스 연합군은 북경교외에 있던 황제의 별장인 원명원을 약탈하고 불을 질렀다고 기록돼 있다. 청나라와 영국과의 충돌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년 전인 1840년 청나라와 영국은 전쟁을 벌였다. 당시 영국 상인들이 마약인 아편을 중국에 밀배하자 이를 청나라 정부가 단속한다. 이에 영국 정부는 이를 빌미로 전면적인 시장개방을 얻어내기 위한 목적으로 군대를 동원해 청을 공격했다. 이것이 아편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라고 해서 ‘아편전쟁’이라 부른다. 청나라는 이 전쟁에서 영국에 패하고 당시 천문학적인 돈을 배상금으로 지불한다. 하지만 이 때만해도 전쟁터가 양자강과 주장강 등 남족 변방이었기에 이 전쟁을 변방에서 일어난 우환정도로 여겼던 것이 당시의 정서였다. 그래서 광동 아모이 복주 영파 상해 등 5개 항구의 개방약속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물론 홍콩은 영국에 150년 동안 내어준 상태였다. 그러자 영국은 다시금 확실한 약속을 받아내려고 1856년 10월 애로호 사건을 벌인다. 당시 애로호라는 배는 중국인 소유였고 해적선이었는데 여기에 영국국기를 달았고 청나라 선원 13명에다 영국인 선장 한 명이 있었다.

바다의 안전을 위협하는 해적선 단속은 청나라로서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사실 체포도 중국인 선원 13명만 했는데도 영국은 이를 빌미로 프랑스와 연합해 전쟁을 일으켰던 것이다. 결국 제2차 아편전쟁이라 불리는 애로호 사건으로 일어난 영국 프랑스 연합군에게 청나라는 자국의 수도가 짓밟히는 치욕을 당했던 것이다. 1854년 미국은 페리제독으로 하여금 일본의 도쿄 우라카항에 나타나 함포사격으로 개항을 강요한다. 이에 일본은 개항을 하면서 오랑캐를 무찌른다는 막부의 수장인 쇼군 즉 정이대장군이 타도를 당하면서 14년 후인 1868년에 명치유신이 일어난다.

1857년 프랑스는 자국 선교사가 베트남에서 살해된 사건을 구실로 다낭을 공격하고 사이공을 비롯한 남부베트남 일대를 점령했다. 영국 프랑스 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한 사건도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던 서양세력의 동아시아 침략의 연장선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바로 ‘서세동점’이라는 정치적 신조가 역사 속에 생겨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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