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 목사(주필)

1519년 쯔빙글리는 스위스의 취리히 대성당 사제로 임명된다. 1522년 3월초 쯔빙글리는 친구 프로샤우어의 집에서 저녁모임을 갖는다. 때는 예수그리스도의 수난일 40일을 기리는 고난주간이었다. 고난주간 기간에는 일체의 육식과 음주가 금기시 되고 있었다. 저녁모임이 길어지자 프로샤우어는 소시지를 내왔고 쯔빙글리를 제외한 모두가 간식으로 맛있게 먹었다. 그런데 이 일이 입소문으로 퍼져 급기야는 시당국이 알게 되었고 시의회는 프로샤우어를 체포 벌금을 때렸다.

중세유럽의 가장 큰 특징이 무엇인가? 그것은 동일한 신앙으로 기독교 국가를 이룬 것이었다. 기독교 정신은 중세의 뿌리였고 그 열매였다. 모든 것이 교리적 통념으로 지배되던 당시 쯔빙글리는 이 사태를 지켜보면서 고난주간 규정들뿐 아니라 중세 로마 가톨릭의 총체적 문제들을 생각하게 된다. 쯔빙글리의 고민은 67개조항의 중세 로마 가톨릭의 불의함이라는 개혁된 사항을 정리해 취리히 시의회에 제출 하면서, 스위스 개혁이 시작된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면죄부 문제로 인한 95개조 반박문으로 시작된 것에 반해, 스위스 개혁은 소시지 문제가 발단이었다. 쯔빙글리는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인문주의자로 성경원어 연구에 몰두하여 스스로 개혁사상을 터득하게 된다. 젊은 시절 쯔빙글리는 흑사병으로 인한 죽음의 위기에서 소생함을 받는다. 그는 이때 인간의 운명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달려 있음을 깨달으면서 생명과 구원은 교황이 아닌 신적 주권에서 나온다고 믿게 된다.

쯔빙글리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 초월적 신성을 가르쳤고 불멸의 세계를 주장했기에 모두 그리스도인의 예표라고 생각했다. 쯔빙글리의 주장은 루터와 유사한 것이 많지만 매우 급진적이었다. 그는 교황의 권위 고난주간 금식 화체설성찬 마리아숭배 성화숭배 성자추앙 유물수집 연옥존재와 공로구원들을 모두 부정했다.

취리히의회는 쯔빙글리의 주장을 받아들였으며 취리히는 개혁도시로 탈바꿈되면서 대성당의 성화가 사라지고 성상을 부수었고 매주 베푼 성찬을 1년에 4번만 베풀게 되었다. 취리히개혁은 이웃주들인 베른, 바젤 샤프하우젠 제네바로 옮겨지면서 스위스의 절반이 개혁도시로 탈바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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