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과 헌신 순교신앙이 잠잠하던 교회들의 동력을 일깨우다

①독천교회 역사게시판 한 가운데 젊은 나이에 희생된 두 순교자의 존영이 자리하고 있다. ②독천교회가 앞장서면서 영암지역 순교사적지들이 다시 교단 차원의 집중 조명을 받는 중이다. 사진은 독천교회당. ③독천교회의 순교사적을 명확히 복원하는데 힘써 온 김성환 목사.
①독천교회 역사게시판 한 가운데 젊은 나이에 희생된 두 순교자의 존영이 자리하고 있다. ②독천교회가 앞장서면서 영암지역 순교사적지들이 다시 교단 차원의 집중 조명을 받는 중이다. 사진은 독천교회당. ③독천교회의 순교사적을 명확히 복원하는데 힘써 온 김성환 목사.

■두 젊은이 희생 딛고 일어선 독천교회

독천교회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오기 전에 있던 자리는 영암군 미암면 채지리 월창마을이었다. 1930년 미국남장로교 소속 조하파 선교사가 세운 독천교회는 해방 후 온 힘을 모아 월창마을에 목조예배당을 건축했다. 하지만 예배당은 짓고 나서 불과 2년도 채 버티지 못했다. 6·25 발발 후 영암까지 밀고 내려온 인민군들이 예배당에 석유를 붓고 불을 지르는 폭거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회가 잃은 건 비단 건물만이 아니었다.

더 소중한 젊은 생명이 아깝게도 둘씩이나 전쟁 기간에 스러지고 말았던 것이다. 당시 주일학교 교사와 청년회장으로 섬기던 정길성 성도와 고등학생이던 안안순이 그 주인공이었다. 신실한 교인이던 두 사람은 어느 날 인민군들의 손에 동구 밖으로 끌려간 뒤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그저 숨죽여 지내야했던 교우들에게는 애도의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이후 교회는 처소를 이웃마을 학산면 독천리로 옮기며 다시 일어섰다. 하지만 독천교회의 순교사적은 주변의 다른 교회들에 비해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정길성 성도조차 ‘정성길’이라는 잘못된 이름으로 전해졌고, 안안순은 아예 그 존재마저 잊혀졌다.

2007년에 부임한 김성환 목사는 역사를 바로잡는데 많은 공을 들였다. 그 결과 영암군순교비에 정길성의 이름을 제대로 새겨 넣고, 존재감이 희미했던 안안순 또한 순교자 반열에 합류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더 나아가 독천교회는 지난해 두 명의 순교자를 총회 순교자 명부에 등재시키는 일에도 나섰다. 독천교회가 앞장서면서 같은 영암지역 다른 교회들의 순교사적까지 총회순교자기념사업부에 함께 보고되어, 올 회기에 나란히 정식 순교자 등재가 되는 감격을 누릴 수 있게 됐다.

김성환 목사는 “몇 해 전까지 생존해계셨던 현영자 권사님 등의 증언이 있어 6·25 당시의 사적들을 더 분명히 밝힐 수 있었다”면서 “순교자의 후예라는 자긍심을 갖고 성도들이 신앙생활에 더욱 매진하도록 이끌어 갈 것”이라고 다짐한다.

①신흥교회의 가장 큰 신앙유산은 6·25 당시의 순교사적이다. ②신흥교회 순교자 박병권 장로와 아들 박금규의 시신이 안장된 가족묘지. ③구자성 목사는 순교자들의 존재가 신흥교회에 새로운 영적 동력이 되리라 확신한다.
①신흥교회의 가장 큰 신앙유산은 6·25 당시의 순교사적이다. ②신흥교회 순교자 박병권 장로와 아들 박금규의 시신이 안장된 가족묘지. ③구자성 목사는 순교자들의 존재가 신흥교회에 새로운 영적 동력이 되리라 확신한다.

■부자가 함께 순교의 길 걸은 신흥교회

영암읍 승평리의 신흥교회는 1937년 9월 9일 설립된 공동체이다. 6·25 발발 당시 신흥교회에는 초대 교역자인 박병근 장로가 사역하고 있었다.

광주 출신인 박병근 장로는 숭일학교를 졸업한 후 평양신학교 통신과정을 마치고, 1925년 전남노회 소속 전도사로 임명되어 담양 창평교회 등에서 사역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무려 5년간이나 광주형무소에서 복역할 만큼 신앙적 결기가 강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냉혹한 일제조차 어쩌지 못했던 그의 목숨은 결국 동족의 손에 끊어지고 말았다. 끝까지 사역자로서 본분을 지키던 그는 1950년 8월 17일 순교로 생을 마감했다.

비극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박 장로의 아들 박금규는 당시 부친의 모교이기도한 숭일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하지만 부고를 듣고 급하게 달려왔던 그마저 공산세력에 붙잡혔고, 결국 부자가 나란히 순교의 길을 걷게 되었다.

두 사람의 시신은 신흥교회 예배당 지척에 있는 가족묘지에 안장되어있다. 후손들이 관리하는 묘소에는 신흥교회 18대 교역자로 사역 중인 구자성 목사와 교우들도 자주 들러 살피고 있다. 두 사람은 이미 총회 순교자 명부에 등재된 것으로 확인됐다.

구자성 목사는 “급격한 교세의 약화 속에서 옛 역사를 제대로 보존·계승하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면서 “이번 순교자 등재가 오랫동안 잠잠해 있던 신흥교회 교우들의 자긍심과 열정을 다시 일깨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소망했다.

①영암 전체 교회들 중 가장 많은 수의 순교자 등재 신청을 한 천해교회의 예배당 모습. ②천해교회 당회록에 기록된 초창기 역사와 6·25 당시의 순교사적. ③김황식 목사는 교회설립 100주년을 앞두고 순교자 명부 정식 등재가 큰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한다.
①영암 전체 교회들 중 가장 많은 수의 순교자 등재 신청을 한 천해교회의 예배당 모습. ②천해교회 당회록에 기록된 초창기 역사와 6·25 당시의 순교사적. ③김황식 목사는 교회설립 100주년을 앞두고 순교자 명부 정식 등재가 큰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한다.

■35명의 순교자 등재 신청한 천해교회

영암군 학산면의 천해교회는 이번 순교자 등재 심사에 가장 많은 인원인 35명의 신청목록을 올렸다. 등재가 확정된다면 2년 앞으로 다가온 교회설립 100주년을 앞두고 기념비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

천해교회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존재가 상월교회이다. 전쟁 발발 후 한 달쯤 지난 1950년 7월 23일 상월교회에는 큰 비극이 벌어졌다. 당시 교회를 담임하던 신덕철 전도사와, 광주양림교회에서 사역하던 중 잠시 처가가 있는 상월리로 피난을 왔던 박석현 목사 가족 등 5명이 한꺼번에 공산세력에게 목숨을 잃는다.

참사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공산세력이 완전히 퇴각할 때까지 상월교회에서는 신덕철 전도사의 남은 가족들, 임유삼 집사 일가, 심지어 어머니 뱃속에서 숨을 거둔 아기까지 수많은 생명들이 학살을 당했다.

영암군기독교순교자기념사업회는 ‘89인 순교자의 땅 영암’이라는 소책자를 제작하면서, 이들 순교자 중 26명을 상월교회 순교자로, 10명을 천해교회 순교자로 각각 분류한 바 있다. 지금은 학산천을 사이에 두고 각각 용소리(천해교회)와 상월리(상월교회)에 위치하며, 소속 교단도 다른 두 교회이지만 사실은 같은 뿌리를 가졌다는 게 <전남기독교이야기> 시리즈(세움북스)를 집필한 목포기독교연구소 김양호 소장의 설명이다.

“상월교회는 원래 장로파 교회였는데, 6·25 상처와 함께 교역자였던 전도사가 사망하는 바람에 목자 없는 양 떼처럼 지내다 그리스도의교회파로 환원되었다…한편 교회가 그리스도의교회파로 바뀌게 되자 이홍길 장로의 유가족 등이 인근의 천해마을에 1952년 장로파교회를 따로 세웠으니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는 천해교회다.”(<전남기독교이야기1>, p.250)

천해교회 김황식 목사가 그동안 상월교회 순교자로 분류된 이들까지 이번 순교자 등재 신청명단에 포함시킨 이유는 이런 역사적 해석과 여러 근거들에 따른 것이다. 김황식 목사는 “순교사적이라는 값진 유산을 충실히 발굴하고 계승하는데 최선을 다하려 한다”고 밝혔다.

영암읍교회가 6·25 당시 숨진 25인 순교자를 기리기 위해 교회 앞마당에 조성한 순교비와 추모공원.
영암읍교회가 6·25 당시 숨진 25인 순교자를 기리기 위해 교회 앞마당에 조성한 순교비와 추모공원.

영암 일대의 다른 순교사적지들

동목포노회 소속 영암 서호교회(김형주 목사)도 순교역사를 간직한 교회이다.

서호교회 출신인 노홍균 전도사가 6·25 당시 해남에서 목회하던 중, 전쟁이 발발하자 고향 교회로 피신해 있다가 빨치산에 붙잡혀 1950년 8월 24일 순교한 기록이 전해진다. 노홍균 전도사의 총회 순교자 명부 등재는 이미 2007년 이루어진 바 있다.

구림교회 순교자들의 합장묘와 함께 영암지역을 대표하는 유적지가 영암읍교회 일대이다.

기장 교단 소속으로 영암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교회로 손꼽히는 영암읍교회(영암읍 서남리)에서는 전쟁 중에 김동흠 장로와 김인봉 전도사 등 25명의 순교자가 배출됐다. 교회 앞마당에는 이들의 행적을 기리는 공원이 조성되어있다. 특히 그 중심에 있는 순교비의 글씨는 6·25 이후 대한민국 정부 부통령을 지낸 함태영 목사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같은 기장 교단 소속인 매월교회(학산면 매월리)의 경우는 임자임 이태일 집사와 이양심 성도 등 3명의 순교자가 나왔다.
본문에 소개한 상월그리스도의교회도 순교자들을 기리는 기념비를 건립하고, 순교신앙을 계승하며 널리 전파하는데 힘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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