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회 현대사의 중심에 언제나 대전노회가 있었다총회 역사에서 대전노회의 존재는 몹시 중요하다. 한국장로교회에 중요한 이정표라 할 만한 커다란 사건들 속에서 대전노회는 항상 중심에 있었고, 그때마다 노회 스스로 커다란 변천을 겪기도 했다. 이를 총 망라해 정리한 역사집이 발간됐다.대전노회(노회장:김정민 목사)는 제140회 정기회를 기념해 를 발간하고, 올해 10월 21일 대전중앙교회(고석찬 목사)에서 발간 감사예배를 드렸다.대전노회역사편찬위원회(위원장:신종철 목사)가 총 1000페이지가 넘는 분량으로 발간한
진도를 복음의 섬으로 일군 첫 생명공동체전남 진도에 복음이 전래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894년의 일로 남아있다. 미국남장로교 7인의 선발대의 일원이었던 윌리엄 레이놀즈(한국명 이눌서) 선교사와 의료선교사 드류(한국명 유대모), 한국어 선생 서 씨 등과 함께 두 달 동안 호남 일대를 순회하며 선교정탐활동을 펼쳤다.그해 3월 7일 군산에서 출발한 이들이 함평 무안 목포 등을 지나 진도를 찾아온 것은 대략 한 달쯤 지난 4월경으로 추정된다.하지만 정식으로 교회가 설립한 것은 그로부터 한참 시간이 지난 후였다. 존 프레스톤(한국명 변요한
순교자의 불굴신앙 70년 세월 지났어도 여전히 건재청송군 현서면 구산리의 화목제일교회(김영재 목사·경중노회)에선 슬픈 이야기 하나가 두고두고 전해진다. 그것은 1951년 2월 17일의 일이었다.새벽기도회를 마친 후 엄주선 강도사는 홀로 예배당에 남아 기도하던 중, 갑자기 요란한 소리를 들었다. 인근 산악지대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던 인민군들이 마을을 습격하며 총격을 해댄 것이었다. 놀랄 사이도 없었다. 교회 안으로 침입해 온 이들이 엄 강도사를 붙잡아, 자신들의 본거지로 끌고 갔기 때문이다.엄 강도사는 이웃한 의성군 다인면 봉정동 출
전쟁 참화 속 한국인 곁을 지킨 보이열 선교사올해 7월 27일은 한반도에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70주년을 맞는 날이다. 전쟁의 고통은 참혹했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친구들도 발견할 수 있었다. 자신의 생명을 걸고 우리 곁을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선교사들도 거기에 포함된다. 그 중 한 사람, 미국인 보이열을 만나본다. “순천을 떠나 여수, 부산, 대전을 거쳐 지금 전주에 와 있습니다. 여수까지는 기차로, 다시 배를 타고 부산까지, 기차로 대전까지 그리고 각기 다른 트럭으로 네 번에 걸쳐 지나가는 트럭을 얻어 타고
경북북부 복음화 이끌며 빛나는 생명력으로 장식한 한 세기미국북장로교 안동선교부가 이룬 토대 위에서 1921년 경북노회로부터 분립주일학교 진흥과 CE창설 앞장서며 한국교회 다음세대 양성에 눈부신 공헌3·1만세운동과 농촌운동 등에 힘써 민족사에 자랑스러운 흔적을 새겨놓기도1906년 미국북장로교 선교부는 경북 안동에 선교지부를 설치하자는 논의를 시작했다. 이미 경북에는 1896년 윌리엄 베어드(한국명 배위량) 선교사를 통해 대구에 선교지부가 설치돼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하지만 경북의 남쪽에 치우쳐 있는 대구에서 북부지역까지 담당하
1903년 8월 원산 부흥 역사 통해 놀라운 영적 대각성운동 전개교회 지도자들부터 스스로 죄악을 회개하자 방방곡곡으로 복음이 힘차게 전파침체의 위기 앞에 놓인 오늘날 한국교회도 부흥의 은총 사모하는 모습 보여야기독교 역사를 돌이켜 보면, 수많은 도전과 박해가 폭풍처럼 교회에 닥쳐오기도 했다. 그러나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했다. 환난이나 곤고나 총칼의 박해나 불같은 생명의 위협도 성도들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었다. 성도는 무정한 시대, 무자비한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대장부처럼 돌파하며 나아간다. 나라가 망해가고 있
복음이 우리 겨레와 함께 하며 새겨놓은 흔적들서양인 선교사가 이 땅의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고안한 한글점자 교재 눈길기독인 정치가와 의료인이 남긴 격동기 기록들도 역사적·문화적 가치 지녀2023년에는 문화재청(청장:최응천)의 기독교 관련 유물들에 대한 근대문화유산 등재가 예년만큼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로제타 홀 선교사가 제작한 ‘한글점자 교재’가 1월 5일에, 월남 이상재 선생의 ‘주미조선공사관 관련 기록’이 5월 11일에, 쌍천 이영춘 박사의 ‘농촌위생 진료기록물’이 9월 7일에 등록문화재 지위를 얻은 것이 전부이다.비록 숫
선교사가 세운 학교, 신사참배 반대 ‘일등공신’격동기 군산 찾아든 복음 영향력 다각도 조명…애국신앙만세운동 앞장동학혁명 세력과도 충돌·협력 과정 거쳐 우리 겨레 역사에 깊숙이 개입군산지역 초기 선교사의 활동 및 역사에 대해 탐구하는 세미나가 11월 25일 군산 근대역사관 장미공연장에서 열렸다.전킨기념사업회(이사장:장철희 목사)가 주관하고 군산근대역사박물관(관장:김중규)이 주최한 이날 세미나는 동학농민운동 한일병탄 3·1만세운동으로 이어지는 격동기의 군산에서 개신교 선교사들과 기독인들의 활동상은 어떠했으며,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남
익산 기독인의 애국신앙 확인하는 두 역사관익산근대역사관, 기독의사 김병수의 삼산의원 건물에 독립유공자 활약상 담아익산항일독립운동기념관, 일제강점기 지역교회 주도 불굴의 항일 투쟁사 증언일제강점기 익산의 교회들은 항일운동의 주역이었다. 수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수난을 당하는 아픔 속에서도 겨레를 향한 사랑과 자주독립의 의지로 제국의 압제에 끝까지 맞서며. 기꺼이 희생을 감수했다.이 위대한 사적들을 소개하는 역사관들이 최근 익산 구도심에서 잇달아 개관하며, 민족사와 함께한 교회의 위상을 많은 이들의 뇌리에 새롭게 각인시키고 있다. 익산을
2022년은 충북선교의 개척자인 프레드릭 S. 밀러(한국명 민노아)의 내한 130주년을 맞은 해이다. 이를 기념해 11월 15일 청주 상당교회에서 '청주성서신학원'과 '민노아선교유산보존계승위원회' 주최로 민노아 학술세미나가 열렸다. 다음은 이날 소개된 세 편의 주제발표의 요지이다.■충청지역 선교의 대부:밀러의 선교활동(최재건 박사·성결대학교 석좌교수)1892년 미국북장로회 해외선교부의 17번째 파송선교사로 내한한 밀러 선교사는 서울 황해도 순회 선교사역을 하다가, 1900년부터 경기도 동남부와 충청도 사역에 나셨다. 김흥경 조사와
처음 추진이 시작된 시점부터 따지만 10여년, 본격적인 건립이 이루어진 때부터로는 4년 만에 완공된 전주시기독교근대역사기념관(관장:최원탁 목사)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올해 10월 7일 전주시 완산구 중화산동 예수병원 맞은편에 개관한 이 기념관은 전북지역 뿐 아니라 전국 각 지역교계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 현재 비슷한 내용과 형식으로 기념관 건립이 추진 중인 목포나 대구를 비롯한 옛 복음의 거점지역에서 기준으로 삼을만한 선례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기념관의 핵심을 이루는 전주 기독교 역사에 대한 전시는 건물 2층에서 집중적으
담이 큰 사람이라도 혼자 가기는 어려운 길이었다. 해발 410m의 가파르고 굽이진 고개 자체가 난코스이기도 했지만, 자주 출몰하는 산적 떼 때문에 여차하면 목숨까지 걸어야하는 도전이 필요했던 것이다. 오죽하면 여덟 사람이 함께 모여야 겨우 넘을 수 있다고 고개 이름이 ‘팔조령(八助嶺)’이었을까.지금은 수월하게 통과할 수 있도록 터널도 뚫리고 대체 도로가 나 한적한 길이 되고 말았지만, 경북 청도의 팔조령 옛길은 오랜 세월 부산에서 대구로 향하는 마지막 관문 역할을 하던 길목이었다.지금으로부터 130년 전 이 험준한 길을 열심히 올라
플레처 선교사 ‘대구애락원’ 설립, 한센인 사역…기념관 세워 뜻 기려야대한민국역사문화운동본부(이사장:전재규 장로)는 창립 10주년을 기념해 ‘청라정신과 대구·경북 근대역사문화’라는 주제로 10월 25일 대구 인터불고호텔에서 콘퍼런스를 개최했다. 이번 콘퍼런스에서 소개된 황봉환 교수의 ‘청라정신 계승과 발전방향’이라는 제목의 강연 내용과, 전재규 황봉환 공저 (우리시대)에 소개된 내용 중 일부를 정리해 본 지면에 소개한다. 1899년 대구에 부임한 선교사 헨리 브루언이 동산병원 동북쪽 동산
질병 탄압 순교의 아픈 역사 딛고 찬란한 믿음의 꽃 만개한 신앙공동체“우리는 장로교 신자입니다. 신앙의 자유가 없는 이 병원에서는 도저히 못 살겠습니다.”소록도를 탈출하려다 붙잡혀온 세 사람은 주눅 들어 있기는커녕 도리어 당당했다. 대구에서 온 최재범 김금영 그리고 부산에서 온 박장영 등 세 사람의 이처럼 의연한 모습에 일본인 원장은 깊은 고민을 시작했다.일제 조선총독부가 소록도에 자혜의원을 세우고 한센인들을 수용하기 시작한 것은 1916년의 일이었다. 서양선교사들이 주도하고 있던 한센인 치료와 선교활동이 자신들의 식민지배 체제에
소록도를 방문하는 이들이 가장 즐겨 찾는 곳은 섬 중앙의 잘 단장된 공원, 환자들에 가해진 잔혹한 탄압의 흔적인 강제 수술대와 교도소 등 옛 건물들, 그리고 소록도의 개요와 병원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전시관 등이다.소록도 사람들 절대 다수의 정신과 일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쳐온 기독교 복음과 교회들의 이야기는 이 가운데서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외부인들에게는 ‘소록도의 천사’라 불리는 두 명의 서양인 수녀 등 다른 종교인들의 발자취가 훨씬 더 비중 있게 알려져 있다.소록도교회의 성도들과 이미 섬을 떠나 육지에 정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