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남장로교 변요한 맹현리 선교사
헌신적 사역 통해 꾸준히 성장
예배당 화재 등 온갖 시련에도
‘어머니교회’로서 위상은 불변

진도를 복음의 섬으로 일군 첫 생명공동체

전남 진도에 복음이 전래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894년의 일로 남아있다. 미국남장로교 7인의 선발대의 일원이었던 윌리엄 레이놀즈(한국명 이눌서) 선교사와 의료선교사 드류(한국명 유대모), 한국어 선생 서 씨 등과 함께 두 달 동안 호남 일대를 순회하며 선교정탐활동을 펼쳤다.

그해 3월 7일 군산에서 출발한 이들이 함평 무안 목포 등을 지나 진도를 찾아온 것은 대략 한 달쯤 지난 4월경으로 추정된다.

진도초대교회는 진도 일대 107개 교회의 어머니교회로서 위상을 지금도 굳건히 한다.
진도초대교회는 진도 일대 107개 교회의 어머니교회로서 위상을 지금도 굳건히 한다.

하지만 정식으로 교회가 설립한 것은 그로부터 한참 시간이 지난 후였다. 존 프레스톤(한국명 변요한)과 클레멘트 오웬(한국명 오기원) 선교사 등이 1905년 목포에서 출발해 해남 우수영을 거쳐 진도로 들어온 무렵이다.

유배에 처해져 진도로 온 김낙중이라는 선비를 선교팀이 만났고, 그를 중심으로 진도 최초의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이 프레스톤 선교사의 보고서 내용이다. 바로 분토리교회, 현재의 진도초대교회(홍강원 목사)다.

1926년부터 기록된 진도초대교회 당회록.
1926년부터 기록된 진도초대교회 당회록.

계속해서 프레스톤의 보고서에는 유배자 김낙중이 이미 서울에서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성경을 읽고 회심한 인물이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런 내용들을 기초해보면 분토리교회의 정식 설립을 대략 1906년경으로 볼 수 있는데, 홍강원 목사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분토리교회는 1902년 7월 13일에 세워졌다는 게 우리 교회 자체의 정설입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는 교회가 이미 그 전부터 존재했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옵니다. 실제로 우리 교회가 소장한 교적부에 따르면 김맹환 장로님의 경우 1900년 10월 21일에 결신하고, 이듬해 10월 20일에 세례를 받은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홍 목사의 설명대로라면 이미 미국남장로교 선교사들의 첫 번째 진도 방문이었던 1894년 이후에 예수 믿는 이들이 생겨났고, 자생적 예배공동체도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아무튼 분토리교회의 초창기는 몹시 활발한 분위기였으리라 여겨진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의 기록이 이를 입증한다.

분토리교회 시절을 이끈 미국남장로교 변요한 선교사.
분토리교회 시절을 이끈 미국남장로교 변요한 선교사.

“진도군 분토리에 교회가 성립되다. 초 정경숙 김경원 김경오의 7인이 도정의의 전도로 신교하고, 동리서재를 차득하여 예배하다가 불과 일 년에 신도가 칠십여 인에 달하매 삼백여 원을 출연하여 예배당을 신축하였고, 후에 정경숙을 장로로 장립하여 당회가 조직되니라.”

도정의는 프레스톤 선교팀의 일원이자, 권서인의 역할을 맡았던 인물이었다. 그의 열정적인 전도와 선교사들의 돌봄, 그리고 초창기 성도들의 헌신으로 분토리교회는 예배당도 건립하고, 교세를 점점 확장해나갔다.

프레스톤의 뒤를 이어 진도선교를 담당한 것은 헨리 맥컬리(한국명 맹현리) 선교사였다. 맥컬리는 1908년 프레스톤과 함께 처음 진도를 방문해, 1주일간 전도사역을 펼쳤다. 이듬해부터는 자신의 집안에서 후원한 복음선을 몰고 진도를 비롯한 여러 섬들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교회들을 세웠다. 맥컬리에게는 오늘날까지 ‘섬 선교의 아버지’라는 별명이 붙는다.

맹현리 선교사.
맹현리 선교사.

맥컬리의 배를 타고 의료선교사인 윌리엄 포사이드와 간호선교사 에밀리 코르델 등이 찾아와 섬기면서 분토리교회는 더욱 부흥했다. 1911년 1월에 작성된 맥컬리의 선교보고서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1월에 가장 큰 섬 진도를 방문하였다. 주일학교가 시작되었으며, 교회를 확장하고, 교인도 증가함으로써 사기가 진작되었다. 부인 3명, 남자 2명, 어린아이 4명에게 세례를 베풀었으며, 8명의 부인과 4명의 학생은 교리문답 교인으로 받아들였다. 근래에 들으니까 교회가 좁아서 인근 부락에 별도의 교회를 세우려 한다.”

그렇게 분토리교회를 통해 1920년 진도중앙교회가 설립되고, 이후에도 진도 곳곳에 여러 교회들이 세워지면서 진도는 복음의 섬으로 변모해갔다.

진도의 어머니교회로서 분토리교회의 책임은 막중했다. 1926년부터 기록되기 시작한 당회록을 살펴보면 그 시절 분토리교회가 성경 속 초대교회처럼 얼마나 철저하게 권징을 시행하며, 사람들 앞에서 참 신앙과 경건의 본을 보이고자 했는지 알 수 있다.

예배당 앞에 건립된 ‘진도 최초의 개신교 교회’ 기념표지와 옛 종이 어우러진 조형물.
예배당 앞에 건립된 ‘진도 최초의 개신교 교회’ 기념표지와 옛 종이 어우러진 조형물.

분토리교회는 이후 군내중앙교회 시절을 거쳐, 20년 전 현재의 이름인 진도초대교회 시절까지 긴 역사를 이어왔다. 그 사이 화재로 인해 예배당과 중요한 문서기록 등이 소실된 사건이며, 심각한 분쟁으로 교세가 크게 약화되는 사건 등을 겪기도 했다.

그렇다 해서 그 위상마저 흔들린 것은 아니다. 현재 진도초대교회를 시무하는 정승호 장로는 “제가 어린 시절 성탄절이나 부활절이 돌아오면 진도 일대 여러 교회의 성도들이 수십 킬로 떨어진 먼 곳에서부터 우리 교회까지 걸어와 함께 예배하고 돌아가곤 했습니다. 그 어르신들 중에서는 지금도 우리 교회를 일컬어 ‘본교회’라고 부르시는 경우도 있습니다”라고 증언한다.

교회당 입구에는 오래 전 누군가의 실수로 고물상에 팔려갔다가, 수소문 끝에 경상도까지 쫒아가 되찾아온 바로 그 종이 지금도 놓여있다. 

진도초대교회는 이 크고 작은 역사들을 잘 보존하고 또 새롭게 발굴하는 노력과 함께, 역사관 건립의 꿈도 키우는 중이다. 소속한 목포제일노회를 통해 제109회 총회에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지정도 청원할 예정이다.

홍강원 목사는 “진도 관내 107개 교회를 대표하는 공동체로서 더욱 탄탄하고 충성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도록 온 교우들이 함께 힘쓸 것”을 다짐한다.

“진도가 받은 복음의 빚, 필리핀서 갚습니다”

진도초대교회 홍강원 목사

“미국남장로교 선교사님들의 헌신적인 섬김 덕분에 우리 교회는 진도 최초의 개신교회라는 명성은 물론이고 1911년 진도 최초의 주일학교 운영, 1925년 진도 최초의 주야학당 운영 등의 기록도 남길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우리도 그 사랑의 빚을 갚아나가야겠지요.”

홍강원 목사는 진도초대교회의 역사를 보존하고 계승하는 일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긴다.
홍강원 목사는 진도초대교회의 역사를 보존하고 계승하는 일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긴다.

진도초대교회 홍강원 목사와 교우들은 이 빚을 필리핀 민도르라는 또 다른 선교지에서 갚고 있다. 홍 목사는 20년 전 광주에서 해돋는교회를 개척할 당시부터 필리핀의 김종실 선교사를 도와, 망이안 부족들을 대상으로 한 선교사역에 힘써왔다. 그 결과 초창기에 세운 교회를 통해, 현재는 13개 교회를 개척하고 많은 생명을 구하는 열매를 거두었다.

그 사역을 진도초대교회가 계승해 이어갈 수 있도록, 올해 3월 성도들과 함께 민도르 현지로 찾아가 단기선교사역을 펼치고 돌아왔다. 함께 현장을 누비며 선교비전을 공유한 성도들은 열심히 기도하고 헌금하며, 망이안족 복음화를 위해 일익을 감당한다는 각오이다.

진도초대교회 예배당 입구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는 필리핀 민도르섬에서 촬영한 사진들과 함께, 온 교우들의 신앙과 비전을 담은 ‘공동체고백’이 게시돼 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성령 충만한 생명의 공동체가 되어 민족을 섬기는 섬김 공동체, 제자를 재생산하는 훈련공동체, 세계선교를 향한 연합공동체, 다음세대를 책임지는 비전공동체로 나아가겠습니다’.

필리핀 민도르섬에서 단기선교 사역을 펼치며 복음의 빚을 갚는 진도초대교회 성도들.
필리핀 민도르섬에서 단기선교 사역을 펼치며 복음의 빚을 갚는 진도초대교회 성도들.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홍강원 목사가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자신이 담임목사로 부임하기 이전, 오랜 분쟁 속에서 흩어졌던 성도들의 마음을 다시 하나로 모으는 일이다. 감사하게도 진도초대교회의 교세는 다시 상승세로 돌아섰고, 상처들을 이제 조금씩 아물고 회복되는 중이다.

“선교사역과 제자훈련을 통해 온 교회가 같은 꿈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또한 이 과정에서 지역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어머니교회’로서 역할도 회복해나가려 합니다. 자랑스러운 역사에 걸맞은 앞으로의 모습을 꼭 보여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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