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 6·25전쟁 중 삶 걸고
교회들 재건하고 한센인들 돌봐
허름한 차림새 기꺼이 감수하며
가난하고 병든 한국인 위해 헌신

전쟁 참화 속 한국인 곁을 지킨 보이열 선교사

올해 7월 27일은 한반도에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70주년을 맞는 날이다. 전쟁의 고통은 참혹했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친구들도 발견할 수 있었다. 자신의 생명을 걸고 우리 곁을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선교사들도 거기에 포함된다. 그 중 한 사람, 미국인 보이열을 만나본다. <편집자 주>

“순천을 떠나 여수, 부산, 대전을 거쳐 지금 전주에 와 있습니다. 여수까지는 기차로, 다시 배를 타고 부산까지, 기차로 대전까지 그리고 각기 다른 트럭으로 네 번에 걸쳐 지나가는 트럭을 얻어 타고 전주까지 왔습니다. 잠도 거의 못자고 먹을 것도 없었던 추운 4일 밤낮의 여행이었습니다.”

45년 동안 한국선교사로 섬기며 수많은 교회를 세우고 한센인들을 돌본 엘머 보이어(한국명 보이열) 선교사.
45년 동안 한국선교사로 섬기며 수많은 교회를 세우고 한센인들을 돌본 엘머 보이어(한국명 보이열) 선교사.

1950년 겨울 성탄절 무렵, 57세의 미국인 선교사는 한국에서 이 같은 편지를 가족에게 보냈다. 전쟁이 한창인 한국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홀로 이곳저곳을 누비며 복음을 위해 애쓴 그였지만, 사랑하는 가족을 향한 그리움마저 누를 수는 없었다.

그가 타고 다닌 기차 지붕에서는 터널을 지날 때마다 떨어져 죽는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렸고, 파괴된 도시의 길가에는 느닷없는 총격으로 혹은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리다 숨져간 이들의 시신이 즐비했다. 생전 처음 보는 처참한 광경들이었다. 하지만 그는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 자신을 바라보며 도움과 구원을 갈망하는 이들의 눈길을 저버리지 못한 것이다.

“여보, 내가 어려운 상황에서 내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오. 새해에는 곤경에 빠진 이 나라에 평화가 찾아오기를 소망합니다.” 편지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엘머 티모시 보이어, 한국이름 보이열. 미국 일리노이주 출신으로, 1893년에 태어나 1976년 세상을 떠났다. 아내 사라 글래디스 퍼킨스와 1926년 결혼해 다섯 자녀를 낳았다. 한남대학교 인돈학술원에서 발간한 <미국남장로회 내한선교사 편람>의 보이열 관련 수록 내용이다.

그는 1921년 선교사로 첫 내한했다. 웨스트민스터대학과 루이빌신학교를 졸업하고, 아칸소에서 안정된 목회를 하던 중에 선교사로 자원했다. ‘복음은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되어야 한다’고 외친 자신의 설교를 스스로가 앞장서 실천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이었다. 자신의 여동생이 먼저 와서 선교사자녀를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던 한국으로 사역지를 결정했다.

1969년 9월 17일 전주동부교회에서 열린 보이열 목사 환송예배 기념사진.
1969년 9월 17일 전주동부교회에서 열린 보이열 목사 환송예배 기념사진.

미국남장로교 전주선교부로 부임한 보이열은 테이트 레이놀즈 등 ‘7인의 선발대’라는 전설적인 이름으로 불리는 호남선교 개척 선교사들과 함께 생활했다. 쟁쟁한 선배들과 동역하며 그는 열정적인 전도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국말을 채 익히지 못한 상태에서도 길가에서 지나가는 아이들을 붙잡고 신기한 앰프소리를 들려주며 복음을 전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에게는 전주 동쪽의 산악지대, 곧 무주 진안 장수 일대를 담당하도록 책임이 주어졌다. 천성이 부지런했던 그는 열심히 전도하고 가르치며 교회들을 세웠다. 한 해 동안 79명의 유아와 285명의 성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초신자 370명에게 교리문답을 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가 한국에서 사역하는 동안 개척한 교회는 무려 65개에 이른다.

순천기독진료소 마당에는 전쟁 중에도 한국인 곁을 지키며 헌신한 보이열을 기리는 기념비가 서 있다.
순천기독진료소 마당에는 전쟁 중에도 한국인 곁을 지키며 헌신한 보이열을 기리는 기념비가 서 있다.

그는 한국을 몹시 사랑했다. 한국의 사람들을, 한국의 산하를, 한국의 문화를 사랑했다. <한국오지에 내 삶을 불태우며>(To build Him a House)라는 이름으로 발간한 그의 회고록에는 “44년간 내가 사랑하는 한국에서 선교사로서 봉사하는 멋진 삶을 살았고, 믿음과 복종이라는 모험 아닌 모험을 결코 후회해 본 적이 없다”는 고백이 등장한다.

그런 마음가짐이었기에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무렵인 1940년, 일제의 추방조치로 한국을 떠나야했을 때 허탈감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미국으로 돌아가 다시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에 정진하는 중에도 그의 뇌리 속에는 항상 한국이 있었다. 결국 해방을 맞은 대한민국으로 1947년 다시 돌아왔다. 새로운 임지는 전남 순천이었다.

혼자 힘으로 순천선교부를 재건해 나가던 중 여순사건이 벌어졌다. 기독교인들을 포함한 수많은 생명이 목숨을 잃었고, 총알과 포탄이 선교사의 집 앞 마당까지 여러 차례 쏟아지는 일을 겪었다. 그럼에도 보이열은 포기하지 않고 교회와 성도들을 지켰다. 1949년에는 가족들까지 데려왔다.

2004년 우리말로 번역해 출간된 보이열 선교사의 회고록  표지.
2004년 우리말로 번역해 출간된 보이열 선교사의 회고록 표지.

이듬해에는 또 6·25전쟁이 발발했지만, 보이열은 가족을 일본으로 피신시킨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도처에서 준동하는 빨치산에게 목숨을 잃을 뻔한 상황을 넘기면서도 그는 전국 여러 곳을 오가며 성경학교를 시작하고, 미션스쿨들을 다시 열고, 예배를 인도했다. 포로수용소에 찾아가 인민군 포로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도 감당했다.

가장 큰 일은 전쟁 중에 손양원 목사를 잃은 여수 애양원의 환자들과 성도들을 돌보는 일이었다. 선교부의 철수명령까지 거부하며 애양원을 지켰던 그는 1965년까지 이곳에서 봉직하며, 한센인 치료와 사회복귀를 위해 헌신했다.

자신은 항상 낡은 옷차림이었지만, 한국인들에게는 좋은 옷가지와 약품 하나라도 더 전해주기 위해 애쓴 보이열의 모습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한다.

보이열 선교사와 최순집 장로가 협력해 세운 전주동부교회의 초창기 모습.
보이열 선교사와 최순집 장로가 협력해 세운 전주동부교회의 초창기 모습.

전쟁 후 한국교회가 빠르게 회복될 수 있었던 데는 보이열의 이 같은 공로도 큰 몫을 했다. 순천기독진료소 마당에 세워진 ‘보이열 목사 기념비’는 은퇴 후 미국으로 돌아가 1976년 세상을 떠난 그의 아름다운 삶을 지금도 기리고 있다.

보이열 선교사의 한국인 친구 최순집 장로

내한 선교사들에게는 단짝 같은 한국인 동역자들이 있었다. 서울의 헨리 아펜젤러(한국명 아편설라)와 조한규, 평양의 사무엘 모펫(한국명 마포삼열)과 이기풍, 전주의 루이스 테이트(한국명 최의덕)과 김창국. 그들은 함께 땀과 눈물을 흘리며 복음의 불모지 한국을 개간했다.

보이열 선교사의 한국인 동역자로 오랜 세월 함께한 최순집 장로.
보이열 선교사의 한국인 동역자로 오랜 세월 함께한 최순집 장로.

엘머 보이어(한국명 보이열) 선교사에게도 든든한 한국인 벗들이 있었다. 부임 당시 서울의 한국어학교가 이미 개강을 한 후여서, 보이열은 뒤늦게 수업 진도를 따라가며 한국생활에도 적응하느라 애를 먹었다. 그래서 한국어 개인교사로 언어습득에 도움을 준 김정국과, 집안일을 이모저모 돕던 최순집은 큰 의지가 됐다.

특히 최순집과의 우정은 각별했다. 시골마을에 살았던 최순집은 장터에 나왔다가 우연히 만난 미국인 선교사 드와이트 윈을 통해 복음을 듣고, 예수를 영접한 후 열정적인 신자가 됐다.

이후 그는 전주로 다시 거처를 옮겨 한동안 인력거 끄는 일을 하다, 나중에는 선교사들을 돕는 역할을 맡게 됐다. 최순집은 주로 식사를 준비하는 요리사 역할을 맡았고, 아내 박은혜는 빨래와 바느질 등을 도왔다. 독신이었던 보이열이 결혼하고 자녀들을 낳은 후에도 두 집안은 한 가족처럼 살갑게 지냈다.

최순집은 보이열의 지도 속에서 무럭무럭 믿음이 자라, 전주서문교회에서 집사 직분을 받고 열심히 섬겼다. 특히 최순집이 1933년 전주동부교회를 세우는 과정에서도 보이열 선교사는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첫 당회장 역할을 맡아 교회의 기틀을 잡아주었을 뿐 아니라, 예배당 건축에도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사진으로 보는 동부교회 80년사>에는 최순집으로부터 도움 요청을 받은 보이열 선교사가 자신의 아이 돌잔치에 들어온 축하금을 내주면서, 전주시 화원동(현재 경원동)에 첫 예배당 부지를 구입할 수 있었다는 증언이 나온다. 전주동부교회 초대 담임목사인 김윤식 목사도 보이열 선교사를 통해 신앙에 입문한 인물이었다.

보이열의 헌신적 뒷받침 속에서 최순집은 초대 장로로, 박은혜는 초대 권사로 섬기며 평생 전주동부교회를 지켰다. 그 가운데 교회는 수많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모여들며 ‘학생교회’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다음세대 사역에 큰 결실을 맺는 신앙공동체로 자라났다. 그 속에서 목회자와 선교사들이 무수히 배출됐으며, 제102회 총회장을 지낸 전계헌 목사도 이 중 한 명이다.

1969년 한국에서의 사역을 마치고 미국으로 떠나는 보이열 선교사를 위해 전주동부교회 온 성도들은 환송예배를 열고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이 때 촬영한 기념사진은 올해로 설립 90주년을 맞은 전주동부교회의 대표적인 역사자료 중 하나다.

두 사람의 만남으로 시작된 복음의 물줄기는 100년이 지나도록 유구하게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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